요리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많지만 설거지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고 했던가. 그래서인지 설거지는 늘 귀찮고, 힘들며, 티도 나지 않고, 안되어 있으면 늘 부부싸움의 원인이 되곤 하는 그런 일이었던 것 같다
나는 집에서 설거지를 종종 하곤 한다. 우리는 네 아이를 키우는지라 식기세척기를 아주 오래전부터 사용해왔기에 사실 설거지를 굳이 하지 않아도 된다. 아내가 막내를 재우러 들어가면 어질러져있는 거실을 좀 정리하고, 싱크대에 담겨있는 그릇을 식기세척기에 넣으면 사실 별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이 많지 않거나 하면 15분 남짓 그냥 손으로 설거지를 하는데,
신기하게도 그때만큼 마음이 차분해지고 정리되는 시간도 없다.
병원에서 많은 일들을 하다 보니, 늘 머릿속이 복잡하고 정리가 안되어 있곤 한데, 예전에는 수술장에서 한 가지 수술에 집중하고 있다 보면, 그 순간만큼은 한 가지 생각만 가득 차 있어 잠시나마 잡생각을 잊을 수 있는데, 최근에는 아무래도 수술장에 들어가는 일이 적어지다 보니 늘 머릿속이 복잡한 것 같다. 하루 종일 바쁘고 정신없이 무언가를 하는데 지나 보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나가버린 것 같은 그런 기분... 누구나 직장인이라면 느껴봤을 감정일 것이다.
설거지는 그 어지러운 생각을 잠시나마 정리할 수 있는 짧은 쉼표 같다.
그래도 그냥 설거지만 하긴 지루하기에 즐겨 듣는 카페 매장 음악 하나를 틀어놓고, 물을 튼다.
그리고 그 소리에 맞추어 하나씩 하나씩 그릇들을 정리해가다 보면, 마치 그릇이 닦여서 깨끗해지는 것처럼 나의 마음도 하나씩 정리가 되어 가는 느낌이 든다.
밤에 집에 울려 퍼지는 물소리는 안 좋은 기억과 기분을 모두 쓸어 내려가듯 청량하다. 혼란스러운 마음도 차분해지고 감정은 적당한 정도로 말랑말랑해진다.
식기세척기로는 느낄 수 없는 감정이다.
물론 너무 양이 많으면 노동에 치여 이런 느낌을 가지지 못하기에, 설거지 양이 많을 때는 일부만 식기세척기에 돌리고 내가 하기 적당한 만큼의 양만 손으로 하기도 한다.
특히 기분이 좋지 않거나, 화가 나 있을 때 이만큼 마음을 추스르는데 좋은 일은 없다.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거나 스트레스가 많이 쌓여있는 상태로 아이들 숙제를 봐주거나, 저녁때 아이들이 말을 듣지 않거나 하면 결국 큰소리를 내게 되는데, 잠시나마 설거지를 통해 마음을 비우고 나면 한결 부드럽게 아이들을 대할 수 있다.
이렇게 마음을 비우고 나면 아이들과 남은 숙제를 하고, 양치질을 시키고, 막내를 재우고 나온 아이 엄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남은 아이들을 재운다. 그리고 잠시나마 우리만의 시간을 갖는다. 물론 설거지 때부터 틀어두던 카페 음악은 잠시나마 우리 집을 카페처럼 느끼게 해 주기에 이 시간이 참 소중하고 체력이 부족한 날만 아니면, 이런 대화의 시간을 갖는 게 작은 행복이다.
생각해보면 부부싸움은 정말 사소한 것에서 시작된다. 힘든 일을 마치고 왔는데, 쌓여있는 설거지와 어질러진 집안을 보며 화를 내는 사람도 있고, 하루 종일 집에서 육아에 치여서 남편이 이제 도와주러 퇴근했다고 생각했는데, 오자마자 버럭 하는 통에 마음을 상하기도 하고, 아이를 힘들게 재우고 나왔는데, 집안 정리 하나 없이 혼자서 핸드폰만 쥐고 누워서 쉬고 있는 남편을 보며 울화통이 치밀기도 하고...
사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이해하면 그럴 수 있지, 그래 서로서로 조금씩 이해하고 나눠서 하자는 생각을 한다면 고작 설거지 같은 작은 일로 다툼이 생기진 않을 것이다.
오늘은 첫째 아이의 생일이라 일찍 집에 와서 저녁을 같이 먹고, 많은 설거지거리가 쌓여있어 식기세척기를 돌리고, 조금만 손으로 설거지거리를 남겨두고 15분 남짓 간단히 머릿속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조금 전 막내를 재우러 아내는 들어갔고 아이들을 숙제를 이제 슬슬 혼자 하기 시작했다. 아내는 막내가 거의 잠이 들 것 같아 금방 나올 것 같고, 집은 그 사이에 정리해서 깨끗하다.
거실에 혼자 앉아 이렇게 음악을 들으며 한 자 한 자 적을 수 있는 이 시간이 있어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