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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와 함께 걷는 시간 여행

-요새 화성과 요즘 행궁-

by 향기나


‘하필 화성 가는 날인데 비가 오는 걸까?’ 전국으로 날뛰던 산불의 발목을 잡은 고마운 비지만 야경까지 보려니 큰 부담이다. 하지만 나는 비 오는 날을 좋아한다. 비 맞고 말쑥해진 풍경도 좋고 창문에 부딪히는 빗방울의 두근거림도 좋다. 연녹색 잎들이 갈증을 푼 후 먹고 남은 물을 바람에 훌훌 털며 기분 좋아 한들한들하는 모습도 보기 좋고, 소란스럽던 먼지를 가라앉히는 차분함도 좋다.


제일 좋은 것은 비에 젖은 세상 속에서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일이다. 대학 때 동아리 신청서에 쓴 ‘비 오는레너드 코헨의 노래 들으며 창 넓은 카페에서 사람 구경하기’라는 내 취미를 보고 사람들은 웃었다. 지금은 그 앳된 감성도 나이를 먹어 코헨의 ‘Famous Blue Raincoat’에서 이은하의 ‘봄비’로 갈아탔지만, 여전히 비 오는 날은 설렌다. 봄비 추적추적 내리는 오늘, 사람 구경만큼 흥미로운 ‘요새 화성과 요즘 행궁’을 탐험했다.


실내에서 머무는 동안 비가 그치기를 바라며 먼저 수원 화성 박물관으로 향했다. ‘화성 축성실’에 들어서니 단연 정조와 정약용의 지혜가 차고 넘쳤다. 수원 화성은 정조가 기획하고 정약용이 과학적으로 설계해 만들어낸 명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찌 이 거대한 일을 두 사람 노력만으로 이뤄냈겠는가?


채제공은 기초를 튼튼하게 다잡으며 공사를 총 감독했고 1,800여 명의 장인과 일꾼들을 합치면 70만 명에 가까운 인력이 참여했다고 한다. 지금도 70만 명이면 어마어마한 숫자인데 조선시대에 동원된 인원이라고 생각하면 경이로운 기록이다.


설계의 지혜로움은 성벽 재료와 축성 방법에 잘 드러났다. 군사 방어시설에 적합한 화강암과 벽돌을 혼용해 쌓아 만든 화성은 토성이나 산성에 비해 더 견고한 요새가 될 수 있었다. 화강암을 여섯 가지 모양의 벽돌로 제작한 후 견고하게 짜 맞추어 단단함에 예술성을 더했다. 과학과 미학의 만남은 세계적인 유산이 되었다.


약 5.7km의 성곽을 2년 7개월 만에 완성했다는 것도 대단한 성과이다. 벽돌의 무게를 생각하여 거중기와 녹로, 유형거를 사용한 과학적인 건축이라는 것도 엄지 척이다. 이 모든 과정을 ‘화성성역의궤’에 기록으로 남긴 정조의 예지는 더욱 놀랍다.


이 기록이 없었더라면 6.25 전쟁으로 파손된 화성을 재건할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며 이런 기록이 있었기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될 수 있었다. 기록은 언젠가는 큰 힘을 발휘한다는 정조의 가르침을 새겼다.


지극한 효심과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도 진심이었던 정조. 사람을 우선 하는 리더의 덕목을 갖춘 왕이었다. 공사에 참여한 일꾼들에게 매일 임금을 지급하고 의료지원과 숙소를 제공했다. 혹한기, 폭염에는 공사를 중단하게 하고 백성들이 자기가 살던 고향을 떠나지 않게 성곽의 방향을 바꾼 것은 세심함과 깊은 사랑 때문일 것이다. 바람과는 달리 밖은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정조의 따뜻한 마음이 우산이 되어 주는 듯했다.

박물관을 나와 조선시대로 시간 여행을 계속했다. 화홍문에서 북동포루를 시작으로 성곽길을 따라 계속 오르락내리락하다 보니 성곽의 뚫린 보혈과 총안 사이로 보이는 성안과 성 밖의 풍경이 다채로웠다. 사람들의 생활 터전이 그대로 나타나 과거와 현재가 함께 공존했다.



꽃들이 추위에 움찔하고 바르르 빗물에 떨고 있는 모습, 새순을 피우다 멈칫한 나무들도 네모난 구멍에서는 달리 보였다. 마치 카메라의 앵글처럼 더 선명하여 액자에 담긴 그림 같았다. 계속 걷다 보니 암문, 각루, 공심돈, 포로, 치, 적대, 장대, 노대 등이 순서 없이 나타난다. 동서남북 네 방위마다 다 나오기도 하고 그렇지 못한 곳도 있었다.


각루는 누각 모양의 건물로 일종의 정자이다. ‘동북 각루’라 불리는 방화수류정은 화홍문 근처에 자리 잡고 ‘용연’이라 불리는 연못을 품고 있어 마음에 쏙 들었다. ‘꽃을 찾고 버들을 따라 노닌다’는 뜻을 가진 ‘방화수류정’은 빗속에서도 아름다운 자태로 높은 성곽 위에서 연못과 정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연못은 가운데 둥근 섬 하나를 가두고 잔잔한 수면 위로 빗방울의 파동을 살포시 퍼뜨린다. 비에 젖은 나무들은 수면에 비친 제 모습을 찾고자 이리저리 흔들어댄다.


연잎이 가득한 여름도 좋겠지만, 봄비 오는 날의 섬세한 고요는 차분한 매력을 주었다. 반달처럼 생긴 연못은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군사 시설의 무거운 이미지를 벗고 화성의 품격을 높여주었다.


방화수류정의 매력에 취해 사진 찍기에 몰입된 즈음 신발 밑창이 툭 하고 떨어져 나갔다. 아뿔싸 난감했다. 아침에 3년 이상 눈길 한번 안 주던 트레킹화를 집어 든 것이 화근이 되었다. ‘그동안 외면당한 신발의 복수인가?’ 양말이 푹 젖어 걷기 불편했다. 비 오는 날은 늘 관람석에 앉기를 좋아했는데 오늘 비 오는 무대로 뛰어들었더니 추억할 일이 생겼다.


함께 한 사람들과 즐거운 뒤풀이가 끝나고 주차장으로 가는 길, 성곽의 곡선이 빛으로 물들어 낮과는 다른 은은한 아름다움을 드러냈다. 한참을 바라보니 곡선을 좋아하는 가우디가 생각났다. 스페인 갔을 때 바르셀로나를 먹여 살리고 있는 가우디의 작품이 부러웠는데 화성의 곡선은 또 다른 걸작이었다. 젖은 벽돌들이 반사된 조명 속에서 조각보처럼 독특한 매력을 발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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