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아시아 키르기스스탄 여행
중앙아시아 키르기스스탄 여행 4일째, 오늘은 이식쿨호수에서 송쿨호수로 날이다. 250km가 넘는 장거리인데 고도까지 높아진다. 힘든 날이 예상되어 마음을 단단히 했다.
‘마지막 호수’라는 뜻을 가진 송쿨호수는 길이 29km, 폭 17km, 수심이 22m로 키르기스스탄에서 이식쿨호수 다음으로 큰 호수이다.
이식쿨호수는 텐산산맥 북쪽 해발 1,607m 비교적 낮은 곳에 있지만, 송쿨호수는 중앙부 3,016m 고산에 있어 관광객들도 가기 힘든 곳이다.
이식쿨호수를 떠나 3시간쯤 지났을 때 고르고츠 마을에서 잠깐 내려 사진을 찍었다. 원시적인 자연의 아름다움이 살아있는 고르고츠. 양털 같은 구름이 환상적인 사진 명소를 만들어 주었다. 빌딩과 자동차가 없는 자연에서 맑은 하늘을 배경으로 흰 구름이 만들어내는 그림은 깨끗함 그 자체였다.
키르기스스탄을 ‘중앙아시아의 스위스’라고 부를 만큼 이름값을 높여주는 것은 청명한 하늘과 각양각색의 산들이었다. 키르기스스탄은 전체 국토의 90%가 산지로 어디를 가나 산들로 둘러싸여 있다. 앞산, 뒷산, 옆 산 겹겹이 층을 이루고 있는 산들은 각각마다 색깔이 오묘하였고 고산이라 그런지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초록 숲의 느낌이 아닌 민둥산이었다.
산등성이는 조개 표면의 굴곡진 주름처럼 작은 협곡의 모양으로 흘러내리는데 때론 붉은 주름으로, 어떤 산은 황색의 깊은 주름으로 모두 색다르다. 붓 번짐으로 그림을 그린 듯 담백한 모습으로 서로 어깨 동무한 형제들처럼 의젓한 모습이다. 하지만 다정다감한 그 넓은 품으로 지하자원 하나 품지 못한 속 빈 강정이라니.
옆 나라 카자흐스탄만 해도 원소 주기율표 거의 모든 지하자원을 품고 있어 부자로 만들어주었다. 그래서인지 며칠 전 보았던 카자흐스탄의 산들은 왠지 더 당당해 보였다. 불모지라고 여겼던 카스피해 인근에서도 많은 양의 유전이 발견되어 카자흐스탄은 잘사는 나라가 되었다. 반면 자원이 없는 키르기스스탄은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고산 초원에서 유목 생활을 이어오고 있다. 영양가 없는 땅덩이로 인해 인근 나라들이 군침을 흘리지 않아 전쟁이나 약탈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니 그 평화가 다행스럽다.
고르고츠 마을에서 시장 구경하면서 유르트에서 먹을 과일과 감자, 약간의 술 등 필요한 것들을 샀다. 빠르게 장을 본 후 점심은 키르기스스탄 음식점에서 현지인들의 음식을 맛보았다. 라그만은 짜장면과 비슷하고 보르소크는 네모난 모양의 튀김으로 과자같이 바삭하여 치즈를 찍어 먹으면 딱 내 취향이다.
점심을 먹고 우리를 태운 25인승 버스는 계속 오르막 비포장도로를 달렸다. 오래된 버스는 힘이 약해 에어컨을 끈 채 S 코스로 된 오르막을 오르느라 너무 흔들어댔다. 댄싱카를 탄 듯 멀미가 났다. 게다가 열린 창문으로 흙먼지가 날려 호흡이 곤란해질 정도였다. 햇살 사이로 언뜻 날리는 뿌연 먼지를 보고서는 얼른 마스크를 꺼냈다. 날도 더운데 에어컨도 없는 차 안에서 황사용 마스크를 끼니 체감온도는 더 높아졌다. 고산으로 오르는 길은 고통과 함께 한다.
구불구불 촘촘히 놓인 S 코스의 산길을 오르다 보니 잔설이 흩어져 있는 높이까지 왔다. 높은 산에 오르자, 고산 증세가 심해졌다. 움직일 때마다 어질어질해서 멀미가 났다. 이럴 땐 빨리 걷거나 뛰면 안 된다. 이 여름에 눈앞에 나타난 설산은 놓칠 수 없는 풍경이다. 슬로비디오를 찍듯 천천히 한 걸음씩 옮기며 가슴까지 눈 덮인 텐산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았다. 육체적인 고통은 인생 통틀어 얻기 힘든 장면을 선물받았다.
중앙아시아 지역의 유목민들이 쓰는 전통 이동식 천막집을 유르트(유르타)라고 한다. 몽골어로는 ‘게르’, 중국어로는 ‘파오’ 서구권에서는 튀르크어로 ‘유르트’라고 부른다. 키르기스스탄 국기에도 동그라미와 세 줄의 붉은 선이 교차되어 있는데 이것은 유르트 지붕 엮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유르트는 유목 생활을 하던 키르기스스탄 인들에게는 중요한 안식처였다.
우리가 묵은 곳은 20여 개 동이 있는 제법 큰 유르트 숙소였다. 일행은 네 개 동을 예약했는데 주인은 우리가 도착하고서야 난방을 시작했다. 해가 지자 바람이 불고 추워져서 가지고 있는 옷들을 모두 꺼내 반소매, 긴소매 구분 없이 마구 겹쳐 입었다. 6겹이나 겹쳐 입어도 한기가 스며들었다. 여름이라고 방심하고 얇은 패딩 하나 가져온 것이 후회스러웠다.
숙소가 따뜻해질 동안 주인은 자신들의 숙소를 내어주었다. 방안 가운데 있는 난로에 옹기종기 모여 몸을 녹였다. 잠시 후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했는데 감자와 다진 고기가 든 양배추쌈, 차, 땅콩과 말린 베리, 빵과 내가 좋아하는 보르소크가 있었다. 너무 추워서 먹고 싶은 생각이 없어 따뜻한 차로 저녁을 대신했다.
식당에서 숙소로 오는데 얼마나 추운지 이가 떨리고 입이 돌아갈 지경이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저절로 전속력으로 100m 달리기 하듯 각자의 유르트로 달렸다. 유르트 안에는 가운데 갈탄 난로를 중심으로 1인용 침대가 4개 놓여있었다. 화장도 대충 지우고 자려고 침대를 난로 가까이로 옮기려는 순간 그만 침대가 무너져 버렸다. ‘아니 이렇게 허술한 침대라니’ 난감한 순간이었다.
가이드를 통해 주인을 불렀더니 침대 프레임을 풀어서 바닥에 깔고 그 위에 매트리스를 올려놓더니 여기서 자라고 했다. 자주 있는 일이라 그런지 해결 방법은 간단했다. 그리고서 유르트 주인은 우리에게 무어라 말했다.
"이런 게 인생이지요. 너무 개의치 말고 즐기세요." 가이드가 통역을 해준다.
"이 상황을 즐기라고?" 전혀 미안해하지 않는 얼굴로 생각 밖의 대답을 들은 우린 서로 얼굴만 바라봤다.
‘유목 생활에 익숙한 사람들이 깨달은 지혜인가?’ ‘키르기스스탄 사람들 삶의 철학인가?’ 따질 상황이 아닌데 어쩌겠는가, 받아들일 수밖에.
주인이 나가면서 열린 문 사이로 별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너무 추워 나가지도 못하고 빼꼼 얼굴을 내밀어 하늘을 보니 밖은 온통 검은 하늘과 반짝이는 별들, 그것이 전부였다. 빌딩도 네온도 가로등도 없는 깜깜함 그 깜깜함이 신선했다. 우리 동네에는 없는 저 별들, 저 까만 하늘이 내 마음속으로 깊숙이 숨어들었다.
함께 간 언니가 굳이 부서진 내 침대에서 자겠다고 해서 침대를 바꿔 누웠는데 잠시 후 빗소리가 후드둑! 후드둑! 유르트 지붕을 두드렸다. 아뿔싸, 급기야 침대 이불 위로 비가 떨어지기 시작한다. 밤새 이불 위로 비가 떨어지면 이를 어찌할꼬? 지금도 너무 추운데. 비 젖은 이불로 밤새 동태가 될 것 같았다. 이것저것 방법을 찾다 이불 위에 우비를 펴서 비가 내려갈 길을 만들어 놓고 잠을 청했다. 그러나 주인장 말처럼 너무 개의치 않아도 될 일이었다. 한 시간쯤 지나자 다행히 후드둑 소리가 잦아들더니 이불로 떨어지던 비도 그쳤다.
새날이 밝았고 우린 어제 늦게 도착해서 못 본 송쿨호수로 향했다. 바로 코앞이라 걸어서 5분이면 도착이다. 어젯밤 같은 고산 증세는 덜 했다. 꽃 계절을 벗어난 시기라 꽃도 잡초도 없는 허허벌판을 지나니 드넓은 호수가 보인다. 끝이 안 보이는 광활한 호수는 수평선을 만들어 바다인 척하고 있었다. 감탄하는 일행들의 메아리가 잔잔한 물결 위에 넘실거린다.
먼지 뒤집어쓰며 험난한 길을 하루 종일 달려와 또 추위로 고생하며 침대 무너지는 황당함과 갑작스러운 비로 잠을 설쳤지만, 이 또한 지나가고 언제 그랬냐 하는 듯 아침 햇살은 따뜻하고 고요하다. 커피 한 잔만으로도 세상 부러운 것 없는 달콤한 아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