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행복이 뭐 별건가요?

모드와 모지스에게 배운 행복

by 향기나


‘행복이 무엇일까?’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는 실체 없는 행복을 늘 갈망한다.


어찌 보면 행복에 안달 난 것처럼 고급 호텔과 여행지를 돌아다니며 호화로운 일상을 SNS에 올려 과대 포장된 모습을 보이는 사람도 있다.


어떤 이는 달달한 디저트와 음료를 사진에 담아 카페에서의 소소한 행복을 공유하기도 한다.


자원봉사로 어려운 사람들에게 힘이 되는 일을 하며 보람을 느끼고 행복해하는 사람들도 있다.


모든 것을 다 가진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삶이 재미없다 하고 우울증에 걸려 아까운 생을 마감하기도 한다. 반면에 어떤 이는 가진 것이 없어도 사람들에게 베풀기 좋아하고 늘 웃으며, 사는 것이 즐겁다고 한다. 행복은 정답이 없는 것 같다.



퇴임 후 여유로워질 삶을 계획하면서 ‘나는 언제 행복했나?’,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거운 일은 무엇일까?’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한편으로는 ‘새로운 것을 시작하기에 너무 늦은 나이는 아닐까?’ ‘젊은 사람들처럼 잘 따라갈 수 있을까?’하는 두려움도 있었다. 고민은 늦출수록 눈덩이가 된다. 일단 시작해 보는 거다.


퇴임 후 첫 행복 찾기 시도는 그림 그리기였다. 꽃을 좋아하는 나는 몇 년 전 알게 된 안나 선생님을 떠올렸다. 안나 선생님은 유럽 생활 미술의 전문가다. 50이 넘은 나이에 호주에 가서 오랫동안 개인지도를 받은 열정이 넘치는 분이다. 지금은 강화에서 갤러리 겸 카페를 하시며 수강생들을 지도하신다. 갤러리 카페에는 그녀의 작품으로 채워져 찾는 이에게 눈 호강을 시킨다. 그동안 많은 포크아트 작품을 봤는데 그녀의 꽃 그림은 내 마음에 쏙 들어와 자리매김했다.


‘나도 배우고 싶다.’ 꿈틀거림을 다독이다가 퇴임과 동시에 꼭 안아주었다. 그림을 배우러 강화를 가려면 1시간 30분 넘게 걸렸지만, 매주 하루를 투자했다.

모드 루이스 실제 모습


나에게 그림 그리면 행복할 거라는 것을 미리 귀띔해 준 사람은 모드 루이스였다.


나는 그녀를 ‘내 사랑’이라는 영화에서 만났다. 몇 년 전 독립영화관에서 봤는데 넷플릭스에서 다시 봐도 감동이었다. 캐나다 민속 화가이며 장애가 있는 모드 루이스의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이다. 모드는 관절염으로 다리를 절고 외모는 볼품없지만 표정이 순박하고 따박따박 대꾸도 잘한다.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오빠가 부모님 집까지 팔아버려 갈 곳이 없게 된 모드는 숙모 집에 얹혀살면서 무시와 무관심의 대상이었다.


외로움에서 벗어나고자 마트에 붙어 있던 구인 메모를 보고 가정부가 되려고 숙모 집을 나온다. 다시 시작된 에버렛 집에서도 고난의 연속이었다. 생선 장사인 에버렛은 모드에게 자기가 기르는 개나 닭보다도 못한 대우를 했다.


시련과 어둠 속에서 그녀를 견디게 해 준 것은 붓과 물감이었다.

영화 "내 사랑'에서의 모드

정신없이 어질러졌건 살림이 모드의 서툰 솜씨로 정리가 되었고, 주인의 눈치를 보며 살금살금 그림을 그려 예쁜 색을 입히니 꽃이 피고 새가 날게 되었다. 게으른 남자가 혼자 살던 우중충했던 집안에 따사로운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어느 날 생선이 배달되지 않았다고 찾아온 산드라의 눈에 뜨여 그녀의 그림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신문과 방송에서 취재를 오고 유명해지자 그림이 잘 팔렸다. 그토록 원하던 결혼도 우여곡절 끝에 하게 된다. 그녀가 어렵게 얻어낸 에버렛의 가정부에서 아내가 되는 순간이었다.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반사회적 남자의 서툰 소통을 감내할 수 있었던 것은 좋아하는 그림이 곁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드는 외로웠지만 그림을 그리면서 자신만의 행복을 찾았다.


모지스 할머니 실제 모습

나이 들어 시작을 주저하는 나에게 ‘늦어도 괜찮아.’하며 용기를 준 사람은 미국인이 사랑하는 예술가 모지스 할머니이다.


그녀는 인생에서 너무 늦을 때란 없다는 것을 본인의 삶을 통해 증명해 주었다. 그림을 체계적으로 배운 적이 없던 그녀는 75세에 그림을 시작해 80세에 개인전을 열었고 101세 돌아가실 때까지 천여 점이 넘는 작품을 그렸다. 미국의 국민화가가 되어 타임지를 장식했다.


그녀는 말했다. “이제라도 그림을 그려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일흔 살이 넘어 선택한 새로운 삶이 그 후 30년간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줬으니까요.”


그녀는 삶을 늘 긍정적으로 대했다. 모지스는 12살 때 생활이 어려워 화이트사이드 집에서 식모살이를 했다. 그녀는 힘든 생활도 세상을 배울 기회라며 즐겼다. 관절염으로 바늘 잡기가 어렵게 되자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늦은 나이였지만 그림을 시작하며 작은 행복을 만들었다.



‘꽃순이’라는 별명을 가진 나는 그림 그리러 가는 날은 소풍 가는 것처럼 들떴다.


꽃 그림은 A4 크기의 검은 스케치북에 아크릴물감으로 그린다. 초급, 중급, 고급과정을 거치면서 데이지, 라벤더, 엉겅퀴, 장미, 수국, 들장미, 피요니, 블랙베리 등 여러 가지 꽃을 배웠다.

특강반에서는 더 어려운 꽃들과 삽화에 나오는 인형들을 그렸다. 처음엔 서툴렀지만, 점차 응용해서 옷이나 가방, 신발에도 꽃 그림을 그려 나만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 신기하고 재밌었다. 검은 스케치북은 이제 들꽃 가득한 나만의 정원이 되었다.

꽃피는 5월이면 갤러리 야외 정원에서 전시회를 했다. 정원에 핀 철쭉과 작약에 뽐내듯 그동안 배운 꽃들이 일상의 물건 속에서 피어나 웅성거리며 함박웃음을 짓는다. 식탁, 테이블보, 장화, 여행 가방, 항아리에 모두 들꽃 천지다. 낡아진 캐리어에 데이지 꽃을 피우니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캐리어가 되었다.


힘들고 먼 거리를 쉬지 않고 묵묵히 걸어오면 대견스러울 때가 있다. 그림 그리러 다니던 지난날을 뒤돌아보니 지금 내가 그렇다.


‘행복이 뭐 별건가요? 모드나 모지스처럼 그림 그리는 이 시간이 행복인걸요.’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