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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덕사의 두 여인

나혜석과 일엽스님

by 향기나


예산 사는 사촌 언니 집에 놀러 갈 때마다 언니와 같이 자주 가는 곳이 있다. 언니 집 근처에 있어 산책 삼아 걸어서 갈 수 있는 곳 수덕사이다. 수덕사는 백제 고찰의 하나로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녀 불자가 아닌 사람들도 많이 찾는다. 사찰 입장료가 없어진 이후 사람들이 더 많아졌다.


산사의 가을은 찬바람이 풀어놓은 쓸쓸한 고요함을 느끼게 하는 매력이 있다. 낙엽 떨구는 나무들의 춤사위와 떨어져 나뒹구는 낙엽들의 행렬은 쓸쓸함을 더해 특히 늦가을에 수덕사에 가는 것을 좋아한다.


수덕사 입구에서 좀 오르면 왼쪽에 수덕여관이 보인다. '여관'은 숙박시설의 하나인데 요즘 사람들에게 낯선 단어가 되었다. 규모가 작고 값이 싼 여인숙과 서양식 고급 여관인 호텔의 중간 정도 급이 여관이다. 먼 곳에서 수덕사를 찾아온 사람들이 머물던 수덕여관은 초가집 여관 중 유일하게 원형이 보존되어 충남기념물로 지정될 만큼 가치 있는 건물이 되었다.


‘절 근처에 웬 여관?’ 의문이 생겼다. 수덕여관은 고암 이응노 선생이 한때 머물며 작품활동을 했던 사적지였다. 1944년 이응노가 구입하고 부인이 운영하였는데 그녀가 세상을 떠나자, 수덕사가 사들인 것을 예산군에서 관리하고 있다.



수덕여관은 나혜석(1896~1948)이 이혼 후 상처를 달래려고 친구인 일엽스님(1896~1971)을 만나러 와서 몇 년간 지낸 곳이다. 나혜석은 최초라는 수식어가 많이 붙는 신여성이었다. 최초의 여성 서양 화가, 최초의 여성 소설가, 최초 전시회 개최, 독립운동가, 여성운동가, 여성잡지 창간 및 발행 등 독특한 이력을 가졌다. 보수적인 집안이었으나 자녀에게 신교육을 받게 한 아버지 덕분에 일본에서 미술을 공부하였다.


온전하고 평등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어 여성의 권리 신장에 맞섰다. 사회적인 비난과 억압에서도 <여자도 사람이외다>, <이혼 고백서>, <모(母)된 감상기>라는 책을 쓰며 여성에게 불리한 관습과 구속에 저항했다. 하지만 파격적인 책의 출판은 그녀에게 커다란 비난의 화살이 되었다.



김우영과 결혼 후 유럽, 미주로 부부 동반 세계 일주를 하면서 그의 생각과 행동은 자아와 자유를 향해 더 과감해졌다. 김우영이 독일로 유학을 가며 파리에 남은 나혜석을 선배 최린에게 부탁했는데 둘은 금방 사랑에 빠졌다. 김우영에게 이 소식이 닿았고 나혜석은 양육권도 없이 빈털터리로 이혼을 당했다. 이혼 후 사회적인 냉대와 논란으로 전시회도 관심을 받지 못하자 작품활동을 접고 수덕사와 해인사를 전전하게 되었다.



나혜석의 불교 입문에 도움을 준 이는 일엽스님이다. 나혜석이 머리를 깎겠다고 수덕사를 찾아왔을 때 주지인 만공스님은 자격이 없다며 거절하였고 일엽스님 또한 만류하여 비구니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불교의 형식보다는 마음의 깨달음을 얻는 비승비속의 삶을 살았기에 나혜석이 고행을 감내하기는 어렵다고 느꼈을 것이다.


스님이 되기를 포기한 나혜석은 수덕여관에서 아이들에게 그림을 가르치고, 여관 주인 이응노 화백에게도 서양화를 가르쳤다. 수덕여관을 나온 후 나혜석은 병마와 가난에 시달리다가 행려병자로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수덕여관에서 나와 환희대로 들어서면 일엽스님을 기리고자 만든 원통보전이 나온다. 원통보전 앞마당에 오래된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다. 수덕사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공간이다. 언니와 나는 느티나무 옆 원두막에 앉아 말없이 명상하는 시간을 보낸다.


머릿속을 비우면 시선이 유도하는 곳으로 마음도 따라간다. 바람 느슨한 날 고목들은 단풍 든 나뭇잎들의 조잘거림을 음악 삼아 우아한 자태로 춤을 춘다. 느린 춤 선과 겹겹 세월과 연륜이 묻어나는 몸놀림이 고혹적이다. 불평과 불안으로 출렁이던 내 마음속에도 고요가 찾아든다. 자연이 주는 평온함이 치유이다.


‘주체할 수 없는 욕망과 번뇌로 힘들었던 나혜석도 이곳에서 평온을 얻고 마음 치료를 하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


평온함이 주는 치유를 매일 느꼈을 또 하나의 여인은 일엽스님(김원주)이다. 나혜석과 김원주는 나이도 같고, 사상적으로나 사생활 면에서도 비슷한 점이 많았다. 신여성 운동을 이끈 여성운동가, 페미니스트이며 예술적 감성이 풍부했던 여성들이다. 두 사람은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현 경기여고) 동창으로 학생 시절 알고 지내다가 일본 유학 중 가까워졌다.


둘 다 자유연애와 여성의 성적 해방을 추구하다 보니 ‘논쟁거리 야기자(Issue Maker)’라 불리며 잦은 연애와 동거로 소문을 달고 살았고 이혼 경험이 있다. 김원주는 끝없이 사랑을 찾다가 외면당하고 평범한 결혼을 했지만 오래가진 못했다. 김원주에게 ‘일엽’이라는 필명을 지어준 사람은 그녀의 문학적 재능을 인정한 춘원 이광수이다. 이광수와도 연애 소문이 있었다.



아버지가 목사였던 일엽스님은 동생의 죽음, 여러 실연과 시련을 겪으면서 33세 되던 해 부처님 품에 안긴다. 비구니들의 수도처였던 수덕사에서 출가했다. 일엽스님은 고된 수행을 통해 인생의 해답을 찾았다. 문학적 재능을 다시 살려 자신의 인생을 담은 <청춘을 불사르고> 등을 저술하였다. 수덕사는 파란만장한 격정적인 삶을 살았던 여인들이 부처님의 깨달음을 얻고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었던 수행의 터였다.



대웅전을 품고 있는 덕숭산에도 가을이 깊게 내려앉았다. 고즈넉한 풍경 사이로 울긋불긋 단풍과 한층 차분해진 햇살은 바쁜 일상에 지친 사람들에게 사색의 시간을 내어주고 있었다. 청련당 툇마루에 앉아 대웅전 앞뜰의 풍경을 즐기는 느긋해진 이들의 어깨 위로 포근한 햇살이 감싸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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