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시간은 어떤 시간이었을까
- 다만 나에게는 '삶을 증언하는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다. 그냥 사는 것만으로는 삶을 증언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나는 이미 깨닫고 있었다. - '모든 요일의 여행/김민철 지음'
책을 펼치고 21페이지에 도달한 그 잠깐의 순간.
'역시 카피라이터! 문장이 머리를 탁 때리네.'같은 조금 웃기고 맞긴 한 생각을 하며 그 페이지에 잠시 머물렀다.
얼마 전 날개로 뒤통수를 치고 간 까치(진실이다) 보다 더 충격이었다.
알람을 듣고 일어나 '월요일 싫어.' 노래를 부르고, 실눈을 뜬 채 화장실 불빛에 적응하며 씻고 출근을 준비하는 그 똑같은 과정을 그냥 '사는 것'이라 생각해 보자.
그럼 나는 그 외에, 어떤 행위로 삶을 증언하고 있었을까?
보통의 직장인이라면 방금 내가 떠올린, 서로 비슷한, 퇴근 후나 주말에 즐길 수 있는 취미 생활들을 떠올리고 있지 않을까 싶다.
집 근처 필라테스, 간간히 다니는 수영, 독서, 좋아하는 카페와 여행.
나의 취미 생활은 뭐 이 정도?
이제 질문을 해본다.
보통의 직장 생활과 그 외의 여가 시간.
'어떤 시간 속에서 나의 삶을 증언하고 있는가? 애초에 나의 삶은 무엇이고, 그 목표는 무엇이기에 어떤 순간에 증언하고 있다 말할 수 있는가.'
고등학생 때의 나에게 삶의 목표는 성적이었다.
내가 노력하여 올릴 수 있는 유일한 것.
그다음 목표는 모른 채, 적어도 새로운 목표를 선택할 수는 있게끔 하고 싶다며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는 쉬는 시간, 점심 시간 할 것 없이 미친 속도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늦게 시작한 공부는 더 큰 꿈을 꾸기에는 버거웠으나, 덕분에 사범대학에 합격하여 어렸을 때의 막연한 꿈이었던 교사는 될 수 있었으니 나쁘지 않은 삶의 목표였고, 필사적으로 '나'를 증언한 10대의 좋은 마무리라고 생각한다.
20대와 30대의 난 착실하게 세운 '교사'라는 역할에 '나'를 끼워 넣고 모양에 맞춰질 때까지 반죽하는 삶을 살았다.
'내 할 일을 하고 안정적으로 행복하게 사는 것'이라는 다소 긴 삶의 목표를 갖고 있었다.
학부모와 학생의 긍정적 변화를 조금이라도 이끌어내면, 그마저도 어려울 땐 나랑 같이 있는 시간을 즐겨주는 것만으로도 내 삶의 목표를 잘 이루고 있다 생각했고, '나'라는 사람을 증언하는 과정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행복했는가? 내가 누구인지는 찾았는가?
답은 당연히 '아니다.'
진짜 내 삶의 목표를 찾았다면 이렇게 헤매고 있진 않을 것이라 본다.
적어도 무너지지는 않았겠지.
불과 몇 달 전까지는 여기까지 생각을 마치고, 다시 익숙한 우울에 빠져 두더지처럼 소파나 파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 '모든 요일의 여행'을 읽은 오늘의 나는 그렇지 않다.
아직 다음 장을 넘기지 않았으니 작가가 말하는 '그냥 사는 것'과 '삶의 증언'에 어떤 차이가 있을 진 모르겠지만(작가의 말을 기대 중이다.) 최근의 내가 남긴 답은 다음과 같다.
'모든 것이 삶의 목표였고 나를 증언하는 과정이 맞았다.'
하늘로 뻗치며 자라는 가지 중, 썩지 않고 버티는 가지가 몇이나 있을까?
쭉쭉 뻗어나가다가 큰 바람에 가지가 꺾이고 갑작스러운 호우에 뿌리가 썩어 내 삶이 죽은 줄 았았을 뿐, 멀쩡히 숨 쉬고 있다.
죽었다기엔 야무지게 단골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책을 읽을 정도로 살아 있다.(물론 이조차도 못하던 때를 지나왔지만.)
꺾인 가지와 썩은 뿌리는 내 삶을 증언하던 과정에 일으킨 시행착오일 뿐, 무엇 하나 그냥 자란 것은 없었다.
적어도 지금 생각은 그렇다.
그러니 꼼꼼하게 가지치기를 하고 새로운 뿌리를 내리며 다시 내 삶이 무엇인지 증언해 나갈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다시 '월요일 싫어.'노래를 부르고, 화장실 조명에서부터 찌푸린 표정으로 출근하는 과정까지도 그냥 흐르듯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을 증언하는 과정으로 만들 것이다.
그렇게 이 우울증을 끝내겠다는 멋진 포부를 남겨본다.
이제 다시 작가의 삶을 구경하러 갈 시간이다.
'내일의 나야. 다시 우울해하고 있다면 이 글을 읽어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