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 익은 도토리가 너무 귀여워

새삼스러운

by 현재

지겨운 유산소 운동도 한 주에 한 번 이상 꼭 해야 하는 과제가 된 내 30대의 삶에서, 등산은 지겨움 탈피의 노력이자 새로운 도파민이었다.

운동할 때마다 '지겨워!'를 입에 달고 사는 나에게, 그냥 살기 위해 하는 운동이 아닌 진짜 즐거운 운동은 없을까 고민하다가 불쑥 생겨난 '아무렇게나 되라지'라는 마음.

이 마음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당근의 등산 모임 가입으로 이어진다.

아직 남은 벚꽃이 비처럼 쏟아지던 어느 봄날, 당이 떨어져 클라이밍 수준의 바위에 주저앉아버린 상황조차 즐거운 이야깃거리가 된 첫 등산지 마이산은 정말 새로운 자극점이었다.

시간이 흘러 한참 시원하던 봄날에 하영이와 나름 쉽게 올랐던 모악산으로의 일정이 올라온 날, 가벼운 마음으로 참여를 신청했다.

만만하게 보고 오른 초여름의 모악산은 마이산의 추억을 즈려 밟았다.

'아, 정말 알 수 없는 놈. 이 놈의 산.'

이 놈의 산은 계곡까지 흘러 예쁘긴 정말 예쁘고, 정상에서 보이는 뻥 뚫린 풍경은 마음까지 뚫어 놓아 시원하기까지 한데.

더위를 먹어 토할 것 같은 이 갑갑함은 도대체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 것인지.

아차, 이 놈의 산이 아니라 이 놈의 미약한 체력이 문제였다는 걸 깨닫는다.

그래, 산은 문제가 없다.

내가 문제다.


그렇게 여름의 산을 다시는 오르지 않겠다며 다짐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한여름을 맞이했다.

이 바다, 저 계곡, 물친자로서의 면모를 뽐내던 중 당근 모임에서는 여전히 여름 산행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고,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고 여기던 때였다.

한여름에서 입추로 넘어가는 길목에 찾아온, 예상치 못한 시원한 빗줄기가 나를 다시 여름의 산으로 유혹할 줄이야.

휴직 후 유혹에 굉장히 약한, 즉 굉장히 충동적인 생활을 하고 있던 난 '참여하기'부터 누르고 봤다.

상대적으로 다른 산보다 쉽고 낮은 '미륵산'이었던 점도 한 몫하지 않았을까?

신청까지 해 놓고선 전 날 밤까지 '비 때문에 진흙탕이지 않을까? 또 더위 먹고 발목 삐고 혼자 난리 치며 후회하면 어떡하지?' 고민하는 것조차 나다웠다.

칼을 뽑았으면 방울토마토라도 썰어야지라는 작은 반항심 같은 마음으로 결국 '진짜 참여'를 결정했다.


놀랍게도 맑은 하늘이었다.

촉촉하지만 밟기 좋은 폭신한 땅이 있었고.

밝고 건강한 일행들까지 모두 완벽하게 즐거웠던 산행이었다.

높은 곳에서 느리게 흘러가는 구름과 숨 틔이는 나무 그늘, 하늘에서 툭 떨어지는 덜 익은 도토리까지, 모든 여름의 요소가 반겨주는 기분.

힘들어서, 기쁘게 숨차서 돌아버리는 줄 알았다.

절대 빼먹을 수 없는 정상 인증까지 촬영한 난, 여름의 산과도 친해질 수 있었다.


'표정이 좋네.'

다시 돌아본 사진 속 나는 더워서 빨갛게 익은 얼굴은 가렸지만 상쾌한 기분만큼은 숨길 수 없다는 듯한 눈을 하고 있었다.

다시 내려오던 길, 또 툭하고 덜 익은 도토리가 반긴다.

새삼스럽게 너무 귀여운 도토리에 수차례 감탄한다.

물은 왜 이렇게 달콤한지.

가끔은 이렇게 별 거 아닌 다짐들을 뒤엎어볼까, 장난스러운 다짐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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