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을 주로 찍어본 사용기
얼마 전까지 나는 A7을 쓰고 있었다. 1년 반을 조금 넘게 썼던 것 같다. A7을 살 당시만 해도 나는 필름을 제외하면 모두 35mm 판형보다 작은 판형을 가진 카메라를 쓰고 있었다. 오두막이나 구박이가 그렇게 좋다는 말을 들어도 풀프레임 기기의 매우 비싼 가격에 함부로 기변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에 나는 이걸 초겨울 추운 날에 코엑스에서 밤을 새 가며 현장 판매분을 구입했고, 매우 잘 쓴 다음 지금 카메라를 사기 전에 팔았다.
처음으로 풀프레임 카메라를 써보고서, 이전과는 달리 배경 흐림에 좀 더 신경 쓰게 되었다. 기술이 발전하다 보니 iso 800 이상으로 올리는 것에 큰 두려움이 느껴지지 않았고. 상상을 초월하는 렌즈값에 이 렌즈 저 렌즈 샀다 팔았다 하며 돈과 시간을 많이 버렸다.
매우 좋은 화질에 틸트 모니터도 갖추고 있었지만, 앞쪽의 가느다란 물체를 잡지 못하는 멍청한 AF와 측거점 이동이 매우 불편었다. 그리고 미칠듯한 가후(...).
그래도 꽤 만족스럽게 쓰다가 팔았다.
그리고 나는 A7R2를 샀다. 원래는 5천만화소를 넘었을 때 카메라를 바꾸려 했지만, A7의 초고속 가후와 A7R2에서 AF 개선이 비약적으로 이루어졌다길래 그만 지르고 말았다.
내가 전문 리뷰어도 아니고, 이미 전문적인 데이터는 나올대로 나온 상황이므로, 내가 잡고 쓰면서 느낀 점들 위주로 적어보려 한다.
여러모로 이 카메라는 겉모습부터 이전의 교훈(...)에서 확실히 뭔가 더 많이 신경 쓴 모습을 보인다.
- 카메라를 정자세로 잡는 순간 셔터버튼이 드디어 정상화(...)되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아이레벨에서는 예전에 쓰던 카메라들의 그립감이 거의 그대로 느껴졌다. 새끼손가락 둘 곳이 여전히 애매했던 건 빼고.
- 특히 세로그립은 셔터버튼 위치부터 시작해서 기능버튼들도 모두 세로그립에 와있다. 이제 a700처럼 다이얼도 좀 오지...
- 드디어 C2버튼과 메뉴버튼을 누를 수 있다.
- 파인더가 예전 필카 느낌처럼 매우 넓고 아름답다. 안경을 쓰고 대충 대면 구석 부분이 다 안 보일 정도로.
- 가죽 핸드그립을 껴보면서 느낀 건데, 스트랩 고리가 조금만 더 넓었다면 좋지 않았을까...
- 늘 이벤트로 주던 추베와 충전기가 패키지에 기본으로 들어있다. 하지만 여전히 충전기는 1칸짜리다. 배터리 용량을 늘려 주든가, 2칸짜리 정품 충전기를 내주든가 하면 좋을 듯.
그리고 바깥에서 찍는 동안은 이런 느낌이다. 어떤 부분에선 최신 기술의(또는 호갱의 뒤늦은) 축복을 받는 느낌이고, 어떤 부분에선 이제야 예전의 니콘/소니 DSLR의 조작감을 조금이나마 찾아온 느낌이고, 어떤 부분은 여전히 그저 그렇다.
- 셔터음이 A7의 순수하게 기계만 작동하는 느낌보다 뭔가 모터소리나 전자음이 낀 느낌이다.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여태껏 잡아봤던 카메라와는 다른 독특한 셔터음이라 지금은 그러려니. 셔터 충격은 A7보다도 적다.
- 타사에는 이미 있다는 ISO 최소 셔터스피드 설정 기능이 매우 편하다. 수동으로 셔터스피드를 맞추거나 렌즈 화각별 5단계로 맞출 수 있는데, ISO도 범위로 맞추고 셔터스피드도 범위로 맞추면 대부분의 상황에서는 노출값 신경 안 쓰고 편하게 촬영할 수 있다. 대부분 A모드로 찍고 집중할 때 M모드로 돌리는 입장에선 큰 장점이다. 이걸 왜 진작 안 넣어주고...
- 바디 손떨방이 붙어서 다행이다. 비록 요즘 접사 위주로 찍다 보니 심지어 1/500에서도 흔들릴 때가 있지만, 그래도 손떨방 덕분에 건질 확률이 늘어나는 건 예전 a700 시절부터 느꼈던 거라 A7 쓰면서 바디손떨방 없는 것이 너무 아쉬웠다. 록시아 쓰면서 아쉬웠던 점이 손떨방이었으니. 1/500 에서도 손떨방이 작동한다고 뜨더라.
- AF는 드디어 앞쪽의 가느다란 물체를 잘 잡는다. 설령 놓치더라도 AF 속도가 워낙 빠르다 보니, 열 받아서 수동으로 초점을 맞출 일이 거의 없어졌다.
- 하지만 여전히 록시아렌즈를 제외한 AF 렌즈들은 초점 확대 화질이 별로다. 아무래도 렌즈 자체의 초점 확대 방식이 다른 모양이다.
- 픽쳐프로파일(pp)이 있다. 전반적인 색감이나 감마값(!)을 조정할 수 있다. 기존 마이스타일이나 dro처럼 카메라 상에서는 효과가 적용되어 있지만 역시나 raw까진 따라오지 않는 것 같다. 영상 찍을 땐 쓸만할듯.
- 셔터가 안움직이는 사일런트 셔터가 있다. 마크로 촬영 시 사용해봤는데 흔들릴 사진을 다 구해주는 구세주는 아닌듯. 마크로 촬영보단 삼각대에 마운트하거나 장노출 때 쓸만하지 않을까 싶다. 이걸 쓰면 픽쳐프로파일 적용이 안된다.
- 배터리 소모 속도는 A7과 비슷하거나 약간 빠르다. A7보다 티나게 배터리를 많이 잡아먹는다는 느낌은 딱히 받지 못했다. 센서 화소수가 늘고 손떨방이 들어갔음에도 전성비는 예전보다 올라간 느낌이다. 배터리 용량은 그대로라 오래 찍다 보면 좀 아쉽다.
- 마운트는 A7을 수리 맡겨서 보강받아온 정도의 느낌이다. la-ea3에 180마를 껴도 그다지 불안하지가 않다.
- la-ea4보다 가벼운 la-ea3로 알파마운트 렌즈에서 빠른 AF를 쓸 수 있다. 다만 렌즈에 모터가 없으면 la-ea3는 못쓰고, 서드파티 렌즈는 호환성 여부를 확인해야 한다. dpreview 같은 곳들을 찾다 보면 쓰고 싶은 렌즈의 호환 여부를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 대체 왜 나온 지 10년도 더 된 a700에선 세로로 잡으면 HUD도 돌아가던데 요즘 나온 이 카메라는 세로로 잡아도 HUD가 안 돌아가는지 의문이다.
- 여전히 측거점 옮기는 게 불편하다. A7 전에 썼던 카메라들은 다 후면 다이얼에 스틱이 있어서 측거점 옮기는 게 쉬웠는데.
- 모드 잠금버튼은 꼭 있어야 했나 싶다. A7 쓰면서 실수로 영상녹화버튼을 눌러본 적은 있지만 모드를 바꿔본 적은 없어서.
- 전/후면 조절 다이얼 디자인이 니콘이나 캐논 같은 얇은 스타일로 바뀌어서 더 빠르게 돌릴 수 있게 되었다. 대신 후면 조절 다이얼을 돌릴 땐 예전보다 더 불편한 느낌도 있다.
- 여전히 영상녹화버튼은 눌릴 듯 안 눌릴 듯 애매한 위치에 있다. 그리고 메모리카드 덮개는 약간 밑쪽으로 옮겨져서 잡다가 열려버리는 불상사는 없다.
- 4k 내부레코딩이 지원되니 영상에 관심이 생긴다. 하지만 마련해야 할 게 너무 많아서 아직은 시도해보지 못하고 있다.
- UHS-2 규격 메모리를 미리 사놓은 내가 바보였다... 고화소 카메라니 당연히 빠른 메모리를 지원하겠지 했는데 지원 안 한다... 다만 연사를 당기지 않는 이상 UHS-1 95mb/s급 메모리에서는 저장랙을 못 봤다.
- 이 카메라의 압축 RAW 크기는 대충 42메가 수준이다. 비압축이면 한 장당 84메가 정도 된다. 저용량 메모리를 쓴다면 비압축으로 찍다 보면 얼마 못 찍고 메모리가 꽉 차버리는 불상사가 일어날 수 있다. 나는 이참에 128기가짜리 메모리를 샀다.
마침내 촬영을 끝내고 집에 오면 이런 느낌을 받는다.
- 예전 A7 압축 RAW 24메가에서 거의 2~4배 수준으로 장당 용량이 올라버렸는데, 파일 전송 인터페이스는 USB 2.0이다. 복사를 시작한 다음, 씻고 밥 먹고 노닥거리고 편의점을 갔다 오고 설거지하고 빨래를 돌려도 여전히 파일은 복사 중이다.
굳이 바디에서 옮기지 말고 메모리를 빼서 USB 3.0 리더기로 옮기면 되지 않나 싶은데, A7 쓰면서 괜찮았던 점 중 하나가 MTP 모드에서 촬영일자별 자동 폴더 분류 기능인지라...
- 시간이 지날수록 하드 용량이 꽉 차간다. 결국 나는 나스를 질렀다.
- 이미지가 너무 크고 아름답다. 긴 축이 7000픽셀이 넘어간다. 내가 지금 QHD 모니터를 쓰는데, 긴 축 길이가 모니터 최대 해상도의 3배 가까이나 된다. 좁게 잘라내도 여전히 크고 아름답다. 4200만 화소도 이 정도인데 5000만 화소인 5Ds나 5Dsr은 어떨까.
이제는 모니터를 최소 4k나 5k로 바꿔야 할지 싶었다. 안중에도 없던 아이맥 5k나 UP2715K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다.
- 센서가 확실히 발전했다. A7때도 풀프레임 특유의 저노이즈에 감격했지만, 이제는 ISO 1600 따위가 노이즈냐 싶다. ISO 범위 설정도 100~1600으로 놓고 쓴다.
- A7때도 느꼈던 거지만, 다른 화소 센서에서 동일한 압축률과 동일한 크기로 리사이즈한 이미지는 디테일한 부분에서 차이를 보인다. 예전 a700 이전 사진들은 이제 너무 저화질로 보인다. 다만 잎이 작게 잡히는 풍경 구도에서는 너무 선명해서 질감이 거칠어지는 느낌이 좀 있다. 카메라를 사려고 55za를 팔았는데, 후회된다. 이 카메라에 55za 조합이면 대체 화질이 얼마나 미쳐 날뛸까.
- 내가 FPS게임 프레임 안 나올 때 이후로 오랜만에 컴퓨터 사양에서 좌절감을 느꼈다. 파일 용량이 워낙 크다 보니 옮기는 건 그렇다 치고, 편집이 문제다. 불러오기부터 저장하기까지 한세월 걸린다. 잡티 지우려고 점 하나 찍으면 랙이 걸려서 1초 후에 반응이 오고, 이펙트 좀 먹여보자 싶으면 적용까지 한세월이다. 특히 빛 관련 이펙트나 이미지 블렌딩 관련 이펙트를 적용하는 데 끝내주게 오래 걸린다.
참고로 지금 PC 사양이 i5-3570, 16기가 램이고, 편집 프로그램은 SSD에 있지만 이미지는 하드에서 불러오고 저장한다. 첫날 충격받고 다음날 바로 램을 8기가에서 16기가로 바꾸니 한결 낫긴 하지만 여전히 랙이 심하다. 최신 세대 i7 이상 CPU, DDR4 16~32기가 램, 고용량 SSD로 그날 사진만 SSD에서 불러오고 저장하면 속도가 많이 나아지지 않을까 싶다. 아무래도 PC를 바꿔야 할까 보다.
- A7때도 그랬지만, 장비탓을 하면 욕먹기 딱 좋은 수준의 카메라다. 내 사진이 장비탓으로 변명이 안되다 보니 더 열심히 찍게 되는 느낌도 있다. 물론 뭘 쥐어줘도 잘 찍으면 잘 찍는다지만 나는 아직 그 경지까진 아니라서...
현재까지 A7R2를 쓰면서 느낀 점을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다.
장점
- 내가 현존 최고 화질의 카메라를 쓰고 있습니다!
- 타사에는 이미 다 있었다지만 이제라도 겪어보니 너무 편한 ISO 최소 셔터스피드 설정
- 구세주 바디손떨방
- (렌즈마다 호환을 좀 타지만) 어댑터 끼고 타사 렌즈를 써도 빠른 AF
- 굉장히 넓고 아름다운 EVF
- 예전보다 좋아진 그립감
- 예전보다 좋아진 물리버튼 위치 : 특히 C2버튼과 메뉴버튼
- 여전히 로우레벨/하이레벨로 찍을 때 너무 편한 틸트모니터
- 드디어 제대로 달린 먼지떨이
때때로 느낄 수 있는 장점 혹은 단점
- 로우레벨에서 적응 안 되는 셔터버튼
- 여전히 조금 긴 것 같은 EVF/모니터 전환 인식거리
- 기능이 보강됐지만 후면 다이얼도 있으면 더 좋았을 세로그립
단점
- 화소 수와 파일 용량은 대빵 커졌는데 배터리 용량이나 전송 인터페이스는 구닥다리
- 여전히 속사케이스나 세로그립 안 끼면 새끼손가락 둘 곳이 애매한 높이
- 여전히 세로로 들면 자동 회전 안 되는 HUD
- (록시아 쓸 때를 제외하고) 여전히 뭔가 부족한 수동초점 지원
- 여전한 측거점 이동의 불편함
- 세로그립 + 핸드그립 조합 시 세로그립 C1버튼 간섭
- 뭔가 탄성이 부족해서 눌릴 것 같아 불안한 기본 아이피스
- 스트랩 고리가 조금만 더 넓었더라면
- 라면을 강제로 좋아하게 만드는 가격
- 컴퓨터가 별로라면 라면도 좋아할 수 없게 만드는 크고 아름다운 이미지
벌써 이 카메라로 1만컷 조금 안되게 찍었다.
요즘은 시간이 될 때마다 기쁘게 나가서 찍고, 압도적인 화질에 놀라며, 편집하고 올리면서도 뿌듯한 느낌이 든다. 열심히 나가고 좀 더 고민하면서 카메라 값 이상하는 이미지를 많이 뽑아내고 싶다.
LumaFonto Fotografio
빛, 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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