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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샘 Jul 25. 2015

필름카메라를 사지 않기로 했다

낯 뜨거운 사진과 함께하는 지름신 쫓는 이야기

최근?이라고 하기엔 좀 됐으니 비교적 최근, 필름카메라가 왠지 모르게 잘 나가는 힙스터들의 머스트 해브 아이템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인스타그램이라든가, 인스타그램이라든가, 인스타그램에서. 


지금은 다들 폰카, 디지털똑딱이, DSLR, 미러리스 들고 다니는 21세기인데. 디지털 이미지가 넘쳐나는 상황에서 뜬금없이 아날로그 감성이라니 뭔가 있어 보이고 막 그렇다. 인스타그램이나 VSCOcam 등등 여러 사진 업로드가 가능한 서비스나 이미지 편집 관련 앱들이 마켓에서 순위권에 오르내리고 있었다. 이런 앱들에서 최근 유행하는 필터는 대체로 필카 특유의 물 빠진/빛 바랜 색감이나, 고대비, 높은 그레인, 베이징 미세먼지 수준으로 페이드값을 올려주는 것들이더라. 심지어 스냅시드 같은 앱은 필카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빛샘(...), 필름이 덜 감긴 사고 등을 필터로 넣어놨다.


하루에도 억대의 디지털 이미지가 생성되고 인터넷에 흩날리는 21세기에, 왜 뜬금없이 아날로그 감성일까 궁금했다. 막 사진 올리는 데 #필름사진 #film 따위 태그를 넣으면 뭔가 있어 보이고 잘 나가는 것 같고 그렇다. 요즘 다들 DSLR이나 미러리스 쓰는데 저런 태그가 달린 사진을 보면, 너희들 지금 꼼짝 말고 있어 내가 지금 라이카를 끌고 가서... 가 아니라 왠지 허세력으로 막 이겨버리고 싶고 그렇다. 


꽤 오랜 기간 동안 간헐적으로, 나는 각종 서비스에 올라오는 필름카메라로 찍은 사진들을 어떻게 허세력으로 이겨버릴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내가 뭐 대단하다고 주제넘게 남의 작업물에 대해 지적질이겠냐만, 흔한 필름카메라로 찍었다는 사진들을 보면 왠지 모르게 성에 차지 않았다. 대부분 보면 구도는 이상하고, 초점은 피사체가 아니라 전후 공기에 맞추고, 의도하지 않게 노출 안 맞는 사진들이 필카로 찍었다고, 그것도 무슨 좋고 유명한 필름카메라도 아닌 현행 시절에도 그저 그랬던 필름카메라로 찍은 사진들이 많은 like와 fav를 받으며 잘 나가는 것에 어지간히 샘이 났나 보다. 


하... 이게 뭐라고 나도 참 쓸데없다. 


이렇게 된 이상 청와ㄷ... 가 아닌 라이카를 사야 하나 싶기도 했고, 까짓 거 나도 필카 사면 될 거 아냐 하면서 필름카메라를 알아보거나, 그래 이종교배다 하면서 2세대 35lux를 찾아 다녔는데. 


결국 나는 필름카메라를 사지 않기로 했다. 


왜? 왜죠 왜때문에




내가 처음 필름카메라를 다뤘던 때는,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은 시절이었다. 


어느 날, 어떤 분이 내게 잠깐 찍어보라며 필름카메라를 건네 주셨다. 위는 은색이요 밑은 검은색이고, 무게는 벽돌만한 것이, 팔뚝만한 렌즈에는 온갖 숫자와 선이 마치 메소포타미아 쐐기문자마냥 빼곡히 새겨져 있었다. 초점을 어떻게 맞추는지, 적정노출은 어떻게 확인하는지만 듣고 그냥 대충 갈겼다. 

어째 이 때도 그냥 찍은 게 풀이었다.

이게 라이카 R6에 APO-macro-elmarit-R 100mm 렌즈였다고. 필름은 아마 리얼라200이었을거다. 인화지 스캔함.


당시의 난 마크로렌즈가 뭘 하는 렌즈인지 전혀 몰랐다. 왜 윗 사진에 보케가 생기는지도 몰랐고, 왜 아래 사진에 잎 일부분이 하얗게 타버렸는지도 몰랐다. 라이카가 어떤 회사 인지도 몰랐고, 저 렌즈가 필름용 3대 마크로렌즈 중 하나라는 것도  검색해보기 전까진 몰랐다. 저 때 저 장비의 가격을 알았다면, 난 아마 손에 땀이 차서 들지도 못했겠지. 지금 사기도 힘든 라이카로 저런 사진이나 찍어놨다니 하... 


사실 라이카의 명성은 M마운트 얘기고 R마운트는 버렸다고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그래도 내가 라이카를 처음 잡아봤다니 새삼 놀라웠다. 


이 뒤로 여러 회사 카메라를 써보게 되었지만, 나는 이 때의 기억이 아직도 남아서 라이카가 갖고 싶다. 내게 라이카는 마음의 고향, 선악과를 먹고(...라고 쓰고 돈이 없어서) 쫓겨나 못가는 에덴동산 같은 존재다. 





그리고 저 일 뒤로 시간이 흘러, 첫 필카로 미놀타 X700을 샀다. 사진 강의를 듣기 위해 샀다. 미놀타의 기술력이나 명성 등은 이 때도 역시 잘 몰랐다. 그냥 친구들과 같이 숭례문 카메라샵에 가서 아무 카메라나 샀다. 사진 강의를 들으려면 FM2를 사야 하지 않을까 하다가 기능 똑같다길래 그냥 이걸로 삼. 흔한 조합인 수동필카 + 50미리 쩜사렌즈 조합으로 샀는데, 렌즈가 신기하게 삼성렌즈였다. 


이 카메라는 노출계 배터리를 제외하면 모든 기능이 기계식이다. 필름을 넣고, 1번까지 감고, 초점을 맞추고 조리개를 돌리며 노출을 재고, 셔터를 누른 후 필름레버를 감고, 다 찍고 필름을 되감고 빼내는 모든 과정이 수동이었다. 한 땀 한 땀 장인정신... 은 아니고, 그 때는 사진을 배우려면 이렇게 배우는 게 당연한 건 줄 알았다. 


x700 + MD 1.4/50 _ 슈퍼리아100, 인화지스캔

이게 내 첫 필카로 찍은 첫 롤이다. 


사진 강의를 듣기 전까지 이것저것 찍기 시작했다. 필름을 찍고 현상소에 찾아가서 맡기고, 필름 현상해서 인화해서 학교 스캐너로 인화지를 스캔했다. 필름 스캔이 가능함을 알고서는, 인화와 함께 필름 스캔도 의뢰해서 스캔된 이미지를 CD로 받았다. 



노출과 심도에 대한 개념을 잡고, 구도에 대해 이것저것 고민... 하긴 했는데, 결과물을 돌아보니 전혀 고민 안 한 것 같다. 



그때는 잘 몰랐는데, 여러 카메라를 거치고 나서야 이 카메라의 광활한 파인더와 부드러운 초점링, 스플릿스크린의 편리함이 기억나더라. 필름레버를 당겨 한 샷 한 샷 장전해서 찍는 그 느낌이 아직도 생생하다. 막 장비병 걸려서 28미리 광각렌즈와 70-210 망원렌즈를 구해서는, 친구들과 모터쇼도 가고 거리스냅도 찍고 풍경도 찍고 그랬다. 


한 끼 밥값 따위 너끈히 뛰어넘는 비싼 필름을 써보고 싶어서 한두 푼 모아다가 사고, 과제로 인화하는 데 왠지 킹왕짱 고퀄로 뽑아야 할 것 같아서 충무로도 들러보고 그랬다. 지금 생각하면 좀 많이 낯부끄러운 사진들인데 그래도 사진 잘 찍는 사람이란 소리가 듣고 싶어서 부단히 노력했더란다. 


그리고 나는 이 카메라를 군대 가기 전에 팔아버리고 갔다. 렌즈는 끝까지 안 팔려서 결국 샵에다 헐값에 팔아버림. 




x700을 팔아버린 뒤로, 나는 지금까지 필카를 산 적이 없다. 사려면 살 수 있었겠지만, 사고 싶었지만 결국은 돈을 쓸까 말까 정하는 순간에 나는 필카를 사지 않았다. 



고장에 대한 두려움

예전에 한창 신나게 필카를 쓰다가, 이런 증상들을 겪어봤다. 


한창 잘 찍고 나서 인화/스캔을 맡기고 찾아왔더니, 이런 이미지들이 만들어져 있었다. 당황하며 인터넷에 물어보니, 셔터막에 이상이 있는 것 같다고 하더라. 이 카메라 셔터막은 가로주행 방식인데, 문제가 있으니 이미지 오른쪽이 이상해진 거라며. 여기저기 게시판을 뒤져 을지로에 가서 3만원에 고쳤다. 무슨 이 카메라 특유의 유전병 같은 문제라고. 


그 때는 좀 많이 당황했지만, 그래도 싼 값에 쉽게 고칠 수 있었다. 하지만 필카를 사겠다고 여기저기 중고장터를 뒤지는 동안, '이 부분은 부품이 없어서 못 고쳤습니다', '이건 잘 안되지만 사용엔 지장 없습니다', '이건 이래서 요런 상황에선 쓰시기 힘드실 겁니다' 따위 멘트가 들어간 판매글을 너무나도 많이 봐왔다. 디카는 그나마 많은 사람이 쓰고, 고장 나면 고칠 곳이 천지에 널려 있지만 필카는 그렇진 않은 것 같더라. 뒤져보면 있긴 하지만, 진짜 이거 고장나면 못고치는 것 아닌가 하고 걱정이 들었다. 


예전에 소니 서비스센터에 옛날 미놀타 MF/AF렌즈에 대한 수리/청소 문의를 해본 적이 있었는데, 일단 가져는 와보는데 될지 안될지 모르겠으니 기대하진 말라는 투의 시원찮은 대답을 들었다. 그 뒤에 미놀타 AF렌즈를 복각한 소니렌즈에 대한 얘기를 던져보니, 수리/청소 당연히 가능하다네? 하. 이 말을 듣고 나는 갖고 있던 미놀타렌즈를 정리했다.


물론 21세기에도 현행 필름바디를 내놓는 몇몇 회사라면 이런 걱정이 없겠지만, 이런 회사들 제품은 거의 가격대가 비싼 것들 뿐이다. 대부분 우리가 만만하게 보고 구할 수 있는 시세의 제품들은 다 단종된 제품들 뿐이다. 부품이나 수리점이 남아 있으면 다행이고, 이제는 부품용 바디를 못 구하면 수리조차 불가능한 현실이더라. 연식도 다들 오래되다 보니 마치 만컷오디처럼 언제 고장날지 모르는 조마조마한 느낌이다. 




유지비와 과정의 귀찮음

사실 필카를 포기한 가장 큰 이유는 이것 때문이다. 


코닥도 망한 21세기에 대체 필름은 어디 가서 사냐 싶었다. 필카를 사기 위해 인터넷을 뒤지다 보니, 인터넷에서 충분히 필름을 구할 수 있었다. 요즘도 필름 만든다! 35mm 포맷은 당연하고, 6x6 필름도 잘만 나오더라. 내가 좋다고 쓰던 포트라나 델타 같은 필름도 당연히 나오고 있었다. 유통기한도 충분하고! 헌데 필름을 구하는 건 쉽지만, 필름값이 예전에 비해 너무나도 많이 비싸졌다. 어떤 건 2배 넘게도 올랐고. 예전에는 버려버려~ 하던 싸구려 필름이 지금은 귀하신 몸이 되어 있더라. 


필름이야 쉽게 살 수 있으니 그렇다 치고, 현상은 어디 가서 하냐는 것도 문제다. 인터넷으로 보내서 현상할 수도 있고, 하다못해 아직  남아있는 동네 사진관에 간혹 필름을 취급할 수도 있겠더라. 그런데 내 주변 동선에 필름을 취급해주는 곳이 없다. 게다가 롤라이플렉스 같은 중형카메라를 산다면, 필름 현상하려면 충무로까지 가야 하나 싶더라. 이 과정이 너무나도 귀찮을 것 같았다. 인터넷으로 맡기기엔 기다리는 시간과 과정이 너무나 귀찮고. 


그리고 요즘 사진의 끝은 인화지가 아니라 스마트폰 스크린인데, 이런 데 보이려면 이미지를 스캔해서 파일로 만들어야 한다. 예전 필름 스캔 결과물을 보니 2850x1915 사이즈로 스캔되어 있더라. 예전에 쓰던 200만 화소짜리 D1H 로우이미지가 2000x1312인데 그것과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다. 2400만 화소짜리 지금 내 카메라 원본 이미지 사이즈가 6000x4000이다. 1200만 화소 카메라로 찍은 사진과, 2400만 화소 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똑같은 서비스에 올렸을 때, 강제로 줄어드는 크기는 동일해도 이미지 퀄리티 자체는 다르더라. 


물론 현상이나 스캔도 잘 찾아보면 크고 아름답게 빨리 잘 해주는 곳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내 주변엔 없더라. 





내가 원한 건 이런 이미지가 아니었는데

간혹 이런 사고들이 생긴다.  

어이쿠 손이 미끄러져 필름이 덜 감겼네
어이쿠 필름이 손상됐네

내가 의도한 게 아닌데 이런 이미지를 받아 들고 나면 대략 정신이 멍해진다. 물론 이것도 우연적인 효과로 즐길 수도 있고, 뭔가 미묘한 느낌도 들고, 이런 게 아날로그 감성이라지만, 모든 순간에 마음에 들진 않더라.





당연히 보는 건데 볼 수 없는 정보들

디카에 모니터가 없다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다. 모 회사는 21세기에 실제로 그런 모델을 만들기도 했지만(...)

내가 찍을 것이 이렇게 나올 거고, 내가 찍은 것이 이렇게 나왔다는 것을 촬영 직전/직후에 바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이제는 너무 당연한 것 같다. 하지만 필카는 그게 안된다. 찍기 전에는 심도나 초점만 겨우 확인할 수 있고, 찍은 뒤에는 지금 롤을 다 찍고 현상하기 전까지 이게 어떻게 나올지 쉽게 예측하기 힘들다. 

크킄...흑화한다...

요즘은 당연한 EXIF 정보도 볼 수 없다. 요즘 카메라에는 EXIF에 위치도, 저작권자 서명도 넣을 수 있는데. 가끔 예전 사진들의 화각과 조리개값을 뒤져볼 때가 있는데, 필름사진이나 수동렌즈 중 접점이 없는 렌즈로 찍은 사진들은 예전의 기억을 떠올려야 한다. 기억 안 나면 알 길이 없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접점이 없는 수동렌즈를 쓰지 않는다. 





디카로 담은 이미지도 충분히 감성적일 수 있다

분명 근 10년 전에 필카를 쓸 땐, 필름 하면 색감이 촌스럽고 MF라 불편하다는 반응 일색이었다. 그 때는 마침 DSLR이 폭풍처럼 유행하던 시기였었고. 그리고 얼마 전부터 갑자기 주변에서 필름카메라가 많이 보이기 시작한다. 색감이나 분위기가 감성적이라나? 물론 그 특유의 양감이나 색감은 충분히 감성적이다. 


근데 진짜 필카 아니면 이런 느낌을 낼 수 없을까?


물향기수목원 // A7 + loxia biogon 2/35 _ 무보정 RAW
VSCO Film 00 _ Kodak gold 100 + Soft Highs
VSCO Film 00 _ Kodak TRI-X (2) -

VSCO Film이라는 프리셋이 있다. 2015년 7월 현재 00~07까지 있는데, 이 중 00은 공짜로 받아서 쓸 수 있다. 00 팩에는 코닥 골드100과 트라이X 필름 효과가 들어 있다. 어디 성계 외계인을 고문했는지 대비, 색상은 물론 그레인마저도 재현해 놨다. 딸랑 프리셋 필름 당 하나만 들어있는 건 아니고, 같은 필름 내에서도 +/-등 다양한 바리에이션이 존재한다. 필카와 비교하면 디카가 담아내는 이미지의 느낌은 한없이 가볍고 박한데, 이걸 쓰면 필름의 느낌을 재현해낼 수 있다. 


요즘 필름 색감이 유행인데, 보정법 조금만 익히거나 무료 프리셋을 구하든 유료 프리셋을 사든 방법만 동원하면 충분히 아날로그 감성을 고화질 디지털 이미지로 표현할 수 있다. 




위의 모든 것들을 극복한다고 해도 결국 고화소 디카로 찍고 후보정한 사진에 비해 모든 면에서 성에 차지 않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이제 필카를 사지 않기로 했다. 


다만, 많은 시간이 흘러 그 때도 필름을 팔고 현상하고 스캔해주는 곳이 남아 있다면 아예 노출계조차 없는 완전 기계식 카메라를 사보고 싶긴 하다. 물론 이 생각도 조금만 지나면 '그래도 21세기 싸이버시대엔 역시 디지털이지!' 하며 없어지겠지만. 


난 결국 라이카를 사더라도 디지털바디를 사지 않을까 싶다. 

라이카Q가 그렇게 잘 나왔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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