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nolta M-Rokkor 2/40 이종교배 이야기
예전에 누군가가 최근 유행하는 스타일의 어떤 사진에 대해, '이 사진은 그냥 노출 오버하고 옛날렌즈 쓰면 되는 거네'라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나도 가끔은 그렇게 생각했던 적이 있다. 사실 아닌데.
막상 쉽게 말할 수 있는 작업들 대부분은 미묘한 감을 요구하거나, 밥 로스 아저씨의 '참 쉽죠?'처럼 방법 자체는 간단한데 엄청난 숙련도를 요구하는 것들이더라.
모 커뮤니티에서 한동안 이종교배 열풍이 불었을 때, 나도 이종교배에 관심을 가지던 때가 있었다. 옛날 m42 마운트 렌즈들이나, 라이카/보이그랜더 m마운트 렌즈가 담아내는 이미지들이 그렇게 매력적으로 느껴지더라. 그걸 보고서는, '나도 수동렌즈 사서 쓰면 감성 돋는 자까님이 될 수 있겠지' 하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그래서 Summilux 35를 사려고 했으나 돈이 없었다. 대안을 찾아 여기 저기 둘러 보다가, 마침 매물이 나온 M-Rokkor 2/40 렌즈를 샀다.
일단 마운트가 다르니 어댑터가 필요하다. M마운트 렌즈들 중 마크로 제외하면 최소 초점거리가 짧은 것이 없으니 헬리코이드 기능이 있는 어댑터를 구해서 썼다. 이것 저것 하고 나니 돈이 좀 깨졌다.
이 렌즈로 말할 것 같으면, 7~80년대에 나온 렌즈고, 동시대에 나온 라이카 Summicron-C 2/40과 설계가 동일하다. 코팅만 차이 난다고. 게다가 이 렌즈 M마운트다. 이 때 당시에는 이걸 시작으로 라이카로 넘어가야지 했었다.
이 렌즈를 몇 달 써보면서 느낀 장점은 이렇다.
초점링에 튀어나온 부분이 있는데, 손가락 하나만으로 초점링을 조작할 때의 그 부드러운 느낌이 좋았다. 요즘 렌즈들의 전자식 초점링을 돌릴 때와는 확실히 기분이 천지차이였고, 진짜 필름 카메라 쓰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렌즈를 쓰면 쓸수록 색감보다 다른 것이 눈에 더 들어왔다.
담아낸 이미지의 질감은 현행렌즈와는 사뭇 달랐다.
이 렌즈로 담은 사진은 가볍고 건조하면서도,굉장히 섬세한 느낌이었다. 마치 세련된 종이공예품같은 느낌. 그느낌에 적응이 안돼서 렌즈 적응기에는 보정할 때 일부러 대비값을 평소보다 더 높여서 썼다.
그리고 옛날렌즈라 화질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는데, 의외로 화질이 괜찮아서 놀랬다.
40mm화각이 의외로 편리했던 것 역시 기억에 남는다. 이거 좀 괜찮다 싶어서 한동안 이 렌즈만 계속 들고 나갔다.
하지만 나는 몇 가지 이유 때문에 이 렌즈를 팔아버렸다.
내가 이걸로 사진을 찍었는데, 어떻게 찍었는 지가 기억나질 않는다. 내가 조리개를 어떻게 썼는 지를 모른다. 수동렌즈도 exif 정보를 주는 21세기인데!
삼양렌즈도 여러 개 가지고 있었는데, 이 이유 때문에 지금은 전부 팔아버렸다.
내 카메라에는 MF 모드에서 사용할 수 있는 몇 가지 보조기능이 있다. 근데 이걸 모니터나 파인더로 그냥 보려니, 액정 화질로는 확대 없이 볼 땐 도저히 얘가 초점이 맞은 건지 구분이 안 간다. 초점 확대 기능을 켜기 위해 한 컷 찍을 때마다 일일이 버튼을 눌러가며 확인해야 한다.
필름카메라 시절에는 그나마 스플릿 스크린이나 이중상 합치 같은 방식이라도 있었는데, 이건 그런 기능도 없고.
M마운트 렌즈라 각오하고 산 부분인데, 써보니 적응이 안된다. 요즘 시대에 망원도 아닌 것이 최소초점거리가 근 1미터다. 물론 이것 때문에 헬리코이드 어댑터를 샀는데... 최소초점거리를 당겨 보니 역시나 심도가 지나치게 얕아진다.
이 렌즈를 팔아버린 뒤로, 이 렌즈의 색감을 프리셋화해 놓으면 어떨까 생각했다. 색상값을 이리저리 건들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렌즈를 사려고 여기 저기 뒤져봤을 때, 가장 많이 본 글은 이 렌즈의 색감에 대해 칭찬하는 글이었다. 사서 써보니 색감이 확실히 현행 렌즈와 비교했을 때 특이했다. 그렇지만 내가 이 렌즈에서 받았던 가장 큰 느낌은 렌즈의 질감 표현이었는데...
안타깝게도 두 렌즈의 사용 시기가 달라서 완벽히 통제된 상황은 아니지만 비교용 사진.
위/아래 사진은 거의 비슷한 시기에 다른 렌즈로 찍었다. 화밸과 노출 값은 거의 동일하게 맞췄고, 색상값과 대비 값은 모두 동일하다. 내가 컬러리스트가 아니라 100%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두 렌즈의 색감을 비슷하게 맞춰 보았다. 아래 렌즈가 내가 느끼기엔 아주 약간 가볍고 섬세한 느낌이라 생각했는데, 위 렌즈가 그것보다 훨씬 더 가볍고 섬세한 느낌이다.
사진의 색상값을 건드리며 '내 색감'에 대한 고민을 시작하면서, 이제 나는 더 이상 바디와 렌즈의 색감에 대한 얘기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예전부터 'ㅇㅇ회사 색감', 'ㅇㅇ렌즈 색감'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어봤다. 뭐 어느 회사는 발색이 괜찮다느니, 어느 회사는 인물 색감이 시체색감(...) 이라느니 하는 말들이 보정을 거치면 의미가 없어지는 것 같다.
하지만 여러 개 섞어놓고 쪽지시험 치듯 물어보면 틀리는 건 함정 ㅋ
대신, 그 렌즈가 만들어 내는 질감 표현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색감은 보정으로 대체가 되는데 질감은 그게 쉽지 않은 것 같다.
이 렌즈는 정말 괜찮은 렌즈였다. 요즘은 MF렌즈도 포커스 링 돌리면 자동으로 초점 확대 기능 켜주고, exif 정보도 뽑아 주는 21세기인데, 비록 불편하더라도 저 렌즈만의 섬세한 표현이 그립다.
이 렌즈는 단순히 조작감이나 표현 외에도 여러모로 기억에 남는 렌즈다. 이 렌즈로 찍은 사진으로 500px Popular에 처음 올라가봤고, 내게 '내 색감'에 대한 고민을 하게 만들어준 계기가 된 렌즈다. 이 렌즈 전/후로 내 사진이 본격적으로 달라지기 시작했는데 어떻게 잊을 수가.
그래도 21세기가 된 이상 이 렌즈를 다시 사지는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