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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샘 Mar 24. 2017

디지털과 필름

필름카메라를 다시 샀다

나는 예전에 필름카메라를 사지 않기로 했다는 글을 쓴 적이 있었다. 어쩌다가 내가 필름카메라를 사지 않겠다고 생각했는지에 대한 생각들을 써봤는데, 주제넘게도 꽤 뜨거운 반응을 받아서 다소 부끄럽더라. 잘 쓰지도 않은 글이 지속적으로 조회수나 공유수가 늘었다는 알림을 받으면서, 내 글이 대단한 글도 망언도 아닌데 왜 이렇게 조회수나 공유수가 올라갈까 했었다.





그때는 저 글처럼 생각했는데, 지금 내게는 필름카메라가 두 대나 있다. 





정신을 차려보니... 는 아니고 어쩌다가 나는 필름카메라를 두 대나 가지게 되었을까에 대한 이야기를 써보려 한다. 이 글은 내가 어떤 생각으로 필름카메라를 샀는지에 대한 것과, 꽤 오랫동안 디지털카메라로만 사진을 찍다가 필름을 다뤘을 때의 느낌에 대한 이야기다. 






작년 여름부터 나는 인물사진을 찍고 있다. 안 찍던 인물을 찍겠다고 여러 가지 개인적이고 이상한 이유를 붙여가며 시작했지만, 당장의 현실적인 목표라면 '예쁜 정원과 숲에서 예쁜 사람을 예쁜 사진으로 남기는 것'이다. 이걸 위해 보정법도 바꿔보고, 스튜디오 조명을 쓰는 법도 아주 간단하게 배워보고 여러 가지 시도를 했었다. 많은 것을 찾아보다가 이런 생각들을 하게 되었다.   



색다른 느낌을 줄 수 있다면

그래서 사람을 예쁘게 담으려면 어떻게 찍어야 할지를 고민하며 인물사진을 찍는 다른 작가들의 사진을 둘러보다가, 필름으로 작업하는 분들의 사진을 봤다. 이전에 보던 것과는 꽤 색다른 느낌이 났다. 이런 것도 괜찮아 보이더라. 마침 내 동선들 근처를 유심히 뒤져보다 중형 필름까지 현상/스캔해주는 사진관을 찾았다.



좀 가볍게 다니고 싶다

나는 보통 디지털로 촬영한다 치면 정원에선 렌즈 1-3개, 인물을 촬영한다면 여기에 스트로보랑 노트북을 챙긴다. 렌즈는 준망원과 표준, 스트로보는 개인적으로 잘 안 쓰지만 혹시나 해서, 노트북은 촬영 후에 모델 분과 그날 찍은 사진을 확인하기 위해 챙긴다. 

지금 쓰는 디지털카메라는 미러리스지만, F1.4짜리 렌즈를 하나만 챙겨도 부피와 무게가 제법 상당하다. 노트북도 그나마 1kg 미만의 가벼운 노트북으로 바꾸고 구매 초기라 어댑터도 안 가지고 다니지만 결국 이것저것 추가하면 짐이 제법 많다. 내가 가진 제일 가벼운 조합이 록시아 렌즈인데, 인물사진을 찍을 때는 거의 쓰지 않다 보니 항상 짐이 무거웠다. 



결국은 허세

예전에 사진 수업을 들을 때, 디지털이든 필름이든 수동 노출 조절이 가능한 카메라를 가져오라길래 예전에 숭례문 상가에서 샀던 카메라를 들고 왔다. 디지털도 가능하다는 말에 누구는 디지털카메라를 들고 오기도 했고, 사진 수업을 한다고 부랴부랴 필름카메라를 따로 사는 애들도 있었다. 그 수업을 들었던 사람들 중 장롱에 있던 카메라를 가져온 사람도 제법 있었는데, 교수님도 이게 집에 있냐고 감탄하던 것부터 시작해서 장롱에서 라이카를 꺼내오는 사람도 있더라. 

필름카메라를 살까 말까 생각하다가 저 때 기억이 떠오르면서 '나도 장롱에 카메라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어'나,  '사진 좀 한다 치면 필카도 있어야지'하는 생각이 들더라. 



간을 좀 보겠다고 본격적으로 필름카메라를 알아보기 전 1회용 필름카메라를 사봤는데, 이런 느낌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모델 : HR



중형 첫 롤. 카메라가 잘 작동하는지를 확인하는 데 돈이 들어가는 마술같은 매직






이것저것 보다가 필름카메라를 다시 사기로 했는데, 이런 생각들을 했다.   


조리개우선 모드와 수동 노출 조정이 가능했으면

솔직히 수동모드는 학교에서 과제할 때나, 조명을 쓸 때, 노출계와 내 생각이 많은 차이가 있는 것 같을 때 빼고는 써본 적이 전혀 없다. 보통 사진을 찍을 때 가장 자주 쓰는 기능이라면 반셔터로 초점을 잡거나, 노출이 안 바뀌게 고정하거나, 초점링을 돌리거나 조리개 수치를 변경하는 정도였다. 

예전에 써본 수동카메라들처럼 노출을 일일이 조리개링이랑 셔터스피드 다이얼 돌려가며 파인더 안에서 점이 가운데 오는지 안 오는지를 확인하기에는 인내심이 많이 없어져서, 필름도 조리개우선 모드가 되면 좋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완전 자동카메라는 성능이 좀 의심되든가, 납득이 안 가는 가격대를 형성하고 있어서 수동 기능이 있는 카메라를 찾아보았다. 그리고 노출계는 필수에, 이왕이면 필름감기는 좀 자동으로 되면 더 좋고.



내 허영심을 충족시켜 줄만한 것

카메라를 중고로 팔든 사든 그 과정이 여간 귀찮은 게 아니다. 더군다나 거래가 활발하게 되는 게 아니라면 대충 필름만 넣고 사진이 제대로 담기면 그만은 아니고, 내 허영심을 충족시켜줄 만한 것을 구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개인적으로 아니다 싶은 회사의 모델들을 제외하고, 몇몇 카메라들로 장터 눈팅 범위를 좁혀가기 시작했다.



가급적 최근에 나온 가벼운 모델로

현재까지 필름카메라를 생산하는 곳이 거의 없다 보니, 산다면 무조건 중고로 단종된 모델을 사야만 했다. 그러니 가급적 최근에 나온 모델이고, 유명한 결함이 적거나 있더라도 촬영에는 지장이 없어야 하고, 고장 나도 고칠 곳이 명확히 있는 모델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필름을 쓴다면 필름카메라만 덜렁 들고나갈 생각이어서, 가급적 작은 모델을 찾아보았다. 


대충 후보를 M7, Zeiss Ikon RF, Rolleiflex F~FX까지 좁히다가, 기회비용이나 장터 매물 상황을 고려해서 요렇게 장만했다. 






Contax Aria + C/Y Zeiss Planar 1.7/50

장터를 열심히 눈팅하다가 매물이 하나 뜨길래 덥석 물었다. 

조리개우선 되고 스팟측광까지 된다. 필름통에 이상한 사각형 패턴이 나름의 의미가 있었다는 걸 이 카메라를 사고서야 깨달았다. iso값을 자동으로 인식하더라고. 같이 딸려온 렌즈는 1.7짜리라 배경흐림도 어느 정도는 챙길 수 있고, 수동이지만 스플릿스크린이 있으니 초점 맞추는 데 큰 문제는 없겠다 생각했다. 정원사진을 찍을 때 가장 자주 쓰는 렌즈가 수동렌즈기도 했고. 데이터백이 달린 매물을 사서 촬영정보 기록이 되더라.





Fujifilm GA645

아리아를 쓰면서 대체 중형필름은 어떻길래 아직까지 필름이 팔리고 현상/스캔을 해주는 사진관이 있을까를 계속 궁금해했었다. 마침 상태가 멀쩡한 매물이 뜨길래, 중형허세도 부리고 싼 값에 중형필름에 대한 궁금함을 채워보려고 집어왔다.  

중형이라는데 의외로 가볍다. 얘도 조리개우선 되고 심지어 AF가 된다. 645포맷이라 가로사진을 찍으려면 세로사진 찍을 때처럼 카메라를 돌려야 하는 게 조금 익숙하진 않더라. 감긴 필름을 봉인할 때 침을 발라서 봉인지를 붙이는 게 꽤 충격이었다. 후드도 달려 있었는데, 저거 끼워진 상태에서 앞캡 열고 닫는 게 너무나도 불편하다. 



 





그렇게 필름카메라를 사서 작업을 해보니 이런 느낌을 받았다. 



사진관 스캐너 표 자동 톤 + 필름 고유의 느낌 프리셋의 색다름 

처음 필름을 맡겨서 사진을 받아보니, 그냥 이거 VSCO Film 프리셋 기반으로 누군가의 깊은 고민 끝에 미묘하게 조정된 프리셋이 입혀졌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VSCO Film 프리셋이 생각보다 많은 고민 끝에 정교하게 만들어졌다는 생각도 들더라. 그리고 사진관에서 스캐너를 돌릴 때 어느 정도 자동 톤 옵션을 켜고 스캔해주시는 것 같더라. 이거 뭔가 유료 프리셋 하나 비싼 돈 주고 산 건 아닌가 싶었다. 



필름이라고 색상과 명암 보정을 아예 안하는 건 안되겠더라.  |  모델 : HY



저화질이라 유리한 점들

디지털은 비교적 최근에 나온 마운트의 렌즈들을 쓰다 보니, 렌즈도 다 최근에 나온 것들을 쓰게 되었다. 분명 마크로렌즈가 아닌데 막상 초점이 맞은 부분을 보면 마크로렌즈급 해상력이 나오더라. 모델분을 찍고 사진을 보정하다 보면 내가 지금 피부과 진찰 중인지 사진 보정 중인지 헷갈릴 때가 많았다. 

필름으로 사진을 찍어보니, 스캔을 큰 사이즈로 비싼 돈을 내고 받아도 지금 디지털카메라의 사진에 비하면 화질이 턱없이 부족하다. 어찌 보면 실망스럽지만, 다르게 생각해보니 유리한 점도 있었다. 디지털사진에선 눈에 띄어서 거슬렸던 작은 부분들이 필름사진에서는 눈에 띄질 않더라. 덕분에 가뜩이나 디지털카메라에서 내가 직접 만지던 부분을 사진관에서 대신 만져주는 느낌이라 보정할 일이 디지털에 비하면 크게 없었는데, 이런 점으로 인해 보정 단계가 조금 더 줄었다. 

그리고 까짓 거 초점 안 맞든 빛샘(...)이 일어나든 플레어가 쩔어주든 아무렴 어떤가 싶다. 필름 초반에는 일부러 빛샘효과를 넣기도 했었고. 



 빛샘을 일부러 먹이다니  |  모델 : 나며니



저는 노출이 뭔지 모릅니다!

아리아에 스팟측광이 있고, 필름이 관대하다고는 하지만 의도치 않게 노출을 틀리는 순간들이 많았다. 디지털은 라이브뷰에서 보고 내가 알아서 조정하든가 아니면 후보정할 때 살펴보면 되는데, 필름은 그게 아니라서. 특히 대비가 극명하거나 역광에서 찍은 사진들이 문제가 많이 생겼다. 

내가 자주 가는 사진관에는 tif파일로 스캔을 받을 수 있다. raw파일의 관대함을 기대하고 대충 3 롤에 7기가나 먹는 tif파일로 스캔을 받았는데, 나중에 jpg로 스캔을 받아보니 관용도가 유의미한 차이가 없었다. 노출 잘못 맞추면 그냥 끝이구나 생각이 들더라. 디지털로 많이 찍어봐서 대충 이게 언더다 오버다 하는 감은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난 한참 멀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나도 빛을 잘 이해할 수 있는 날이 올까.



내가 누구냐고? 알 필요 없다!  |  모델 : HY



스플릿스크린에 대한 환상

예전부터 록시아렌즈를 썼을 때, 초점이 맞았는지를 확인하려면 액정이 확대되는 방식이 매우 불편했다. 아예 윤곽선을 맞추는 예전 방식이면 더 정확하게 맞출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었는데... 막상 필름카메라를 조금 다뤄보니 스플릿스크린 별 거 없더라. 물론 디지털로는 덜 움직이는 것들을 찍지만, 더 큰 화면에서 확대된 모습을 보는 게 낫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분명 찍을 땐 초점을 제대로 맞췄다고 생각했는데...  |  모델 : HR



결국은 돈으로 색다름과 기대감을 사는 느낌

디카도 당연히 돈이 들어가지만, 최소한 장비를 갖추고 나면 찍은 이미지를 갖는 데에는 돈이 필요하진 않다. 하지만 필름은 현상/스캔을 맡기면 돈이 든다. 내가 아직까지 도전해보지 못한 자가현상은 계속 미지의 영역으로 남겨두기로 하고, 스캐너를 살까 하는 생각은 집에는 공간이 없고 통장에는 돈이 없어서 접기로 했다. 어차피 필름사진도 보정을 하는데, 이미지를 받아볼 때마다 돈이 들어간다는 게 은근 뼈아프더라. 

그래도 필름작업이라면 은근히 나도 모델분도 '이게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데 아마 예쁠 거야'라는 기대감도 있고, 진짜 사진이 나오면 디지털과 다른 느낌은 있긴 해서 돈으로 색다름과 기대감을 사는 느낌이 들었다.  



모델 : Ellie
초점이 나가도 나간 나름대로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  모델 : MJ
디지털과 다른 점은 없진 않은듯.  |  모델 : 쥬쥬






결국 허세와 물욕으로 인해 필름카메라를 사고, 나름대로 인물촬영할 때 색다름과 재미를 찾고 있는 중이다. 진지하게 임하거나 수시로 확인이 필요할 때를 제외하고, 필름으로 기분 전환 겸 색다른 느낌을 내고, 수시로 확인이 불가능함에서 생기는 기대감을 노린다. 때로는 아무 사진 대잔치 컨셉으로 욕심내서 온갖 장비로 다 담아보고 싶거나 할 때도 필름을 꺼내오게 된다. 색다름과 재미를 찾는 과정에서 결국 내가 재밌다고 느끼고, 같이 작업하는 모델분도 재밌어하신다면 그걸로 됐다 싶더라. 


그런데, 나는 아직까진 필름으로 자연물을 찍진 않는다. 깊고 많은 고민을 하면서 여러 컷을 찍고 비교하며, 더 가깝거나 더 높게 보는 데 있어서, 필름은 너무 기회가 적고 불편하며 화질마저 별로다. 





LumaFonto Fotografio

빛나는 샘, 빛샘의 정원사진


SteloFonto, LumaFonto Portreto

별샘, 빛샘의 인물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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