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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림 Aug 16. 2019

은하수가 흐르는 밤의 캐니언에서

그랜드, 자이언, 브라이스 캐니언

거친 암석과 절벽, 깊게 파인 붉은 협곡. 광활한 대지에 깊게 굴곡진 캐니언은 파란 하늘 아래 더욱 강인한 열기를 뿜어낸다. 그 장관을 보고 있노라면 지구라는 행성 안에 있다는 사실에 전율을 느낀다. 그렇다면 해가 지고 난 뒤의 캐니언은 어떤 모습일까. 작렬하는 태양을 벗어나 상상할 수 없었던 밤의 캐니언을 목격한 날, 나는 미국 서부여행의 진수를 맛본 것이나 다름없다.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시작해 그랜드 캐니언을 한 바퀴 돌아보는 골든 서클은 한국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코스 중 하나다. 미국 서부의 대자연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을에 라스베이거스에서 캠핑카를 빌려서 서부의 캐니언들을 둘러보고 뉴멕시코까지 내려가는 일정을 짰다. 이번 여행의 핵심은 미국의 3대 캐니언인 그랜드, 브라이스, 자이언 캐니언을 둘러보는 일. 어떤 놀라운 경관이 눈앞에 나타날지 기대하며 캠핑 짐을 챙겼다.


비행기를 타고 라스베이거스에 내려서 캠핑카를 찾았다. 마트에서 장을 가득 본 뒤, 여행의 출발점인 자이언 캐니언으로 향했다. 첫날은 자이언 캐니언 국립공원 바로 앞에 있는 캠핑장에서 묵기로 했다. 쨍한 햇볕에 저절로 눈이 감긴다. 반팔과 반바지를 입었지만 더위에 후끈후끈하다. 캠핑장 앞 다운타운에 들어왔다. 작은 시내가 사람들로 북적인다. 멀리서 깎아지른 듯한 캐니언의 사암 바위가 나타났다. 커다란 계곡을 끼고 있는 돌 산 같다. 이국적인 배경 속에 사람들이 오가는 모습을 바라보니, 마치 서부영화 속 세트장에 들어온 기분이다.

캠핑장에서 하루 묵고 맞이한 아침. 햇볕은 강렬하고 하늘은 새파랗다. 멀리 보이는 산은 층층이 고운 색을 띠고 있다. 길가에는 샛노란 들꽃이 생기발랄하게 피어있다. 캐니언을 향해 가는 길에 차를 세우고 사진을 찍었다. 모든 것이 포스터물감으로 그려놓은 것처럼 번짐없이 뚜렷하다. 이제 막 시작된 로드 트립에 두근두근 가슴이 벅차올랐다.

"지호야, 등산을 좀 해야 하는데 할 수 있겠어?"

"응, 할 수 있어!"

자이언 캐니언에는 18개의 공식 트래킹 코스가 있다, 우리는 아이를 데리고 1.6킬로미터의 캐니언 오버룩 트레일에 도전했다. 쉬운 코스인 줄 알고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힘겹게 산을 올라야 했다. 다행히 아이는 힘든 산길도 지치지 않고 씩씩하게 걸어 올라갔다.


이십여분쯤 걸었을까. 숨이 점차 가빠지며 걸음이 무거워진다. 주위를 둘러봤다. 엄청난 절경이 눈에 들어온다. 붉고 거대한 암벽 사이로 난 좁은 흙길. 군데군데 키가 크고 이파리가 거칠게 뒤엉켜있는 고목이 보인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세계로 들어가는 느낌이다. 모자와 선글라스로도 가려지지 않는 뜨거운 햇볕이 계속 내리쬔다. 때마침 더위를 식혀줄 그늘이 나타났다. 커다란 바위가 만든 너른 그늘 아래에 앉아 차가운 생수로 목을 축였다.

"우와, 이제 다 올라온 거야? 엄청 높아 보여."

드디어 정상에 도착하자, 아이는 머리 꼭대기에 있는 햇살만큼 환하게 웃었다. 발아래 까마득한 협곡이 내려다 보인다. 이 광경을 보기 위해 한 시간 가량 땀을 흘리고 올라온 보람이 있다. 둥글둥글하고 평평한 바위에 앉아 화려한 자이언 캐니언의 경치를 만끽했다. 바위산을 배경으로 셔터를 눌렀다. 카메라 각도를 바꿀 때마다 계속해서 새로운 프레임이 만들어졌다.  

우리가 만난 자이언 캐니언이 한낮의 뜨거운 태양이었다면, 그랜드 캐니언은 중후한 석양을 닮았다. 그랜드 캐니언으로 가는 길에 콜로라도 강이 굽이쳐 흐르는 호스슈 밴드에 들렀다.

"지호야, 저게 뭐 같아 보여?"

"잘 모르겠어."

말발굽처럼 생겼대. 그래서 이름이 ‘호스슈’야."

강물이 말발굽 형태로 흘러 ‘호스슈 밴드’라는 이름을 얻었다. 300미터 절벽 아래를 내려다봤다. 눈앞이 아찔하다. 역동적인 모습에 숨이 턱 막힌다. 호수처럼 짙은 파란 강물 가운데 떠있는 기암절벽이 도장처럼 선명하게 찍혀 있다.

파란 콜로라도 강은 그랜드 캐니언으로 이어져 전 세계인이 찾아오는 절경을 만들어냈다. 그랜드 캐니언은 매년 600만 명 이상이 방문하는 미국 서부의 대표적인 관광지다. 그만큼 사람이 많고 붐빈다. 우리가 갔을 때도 입구부터 자동차들이 뒤엉키고, 관광객들로 시끌벅적했다.

“사람들이 너무 많고 붐비네.”

사람 많은 곳을 질색해하는 남편은 실망스러움을 내비쳤다. 자연 그대로의 경관을 한가로이 볼 수 있는 그런 관광지와는 거리가 멀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관광객들로 혼잡한 틈바구니를 비집고 국립공원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인상 깊게 본 곳 중 하나는 데저트 뷰 와치 타워다. 둥근 성처럼 생긴 아담한 건물이다. 그 안은 이국적인 느낌으로 가득했다. 아이는 계단을 올라가며 벽에 그려진 인디언 원주민의 상형문자 벽화를 신기한 듯 바라봤다. 4층 꼭대기에 올라 전망대로 나왔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멀리 그랜드 캐니언의 협곡과 산맥이 겹쳐져 보인다. 태초부터 이어진 지질작용의 오랜 역사만큼 짐작할 수 없이 거대한 공간이 느껴졌다.  

"와... 이렇게 크고 깊을 줄이야."

전망대에서 내려와 적당한 기슭에 아이 손을 잡고 털썩 앉았다. 눈앞의 그랜드 캐니언이 너무 거대해서 실감이 안 났다. 자연이 만든 예술품이라기보다는 건축물이라는 표현이 더 적합해 보인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슬며시 났다. 그 순간만큼은 세상사 따위가 다 잊혀지는 듯했다.

해질녘이 되어 야바 파이 포인트로 이동했다. 그랜드 캐년의 굴곡을 따라 석양이 물드는 곳이다. 관광객들로 북적이던 국립공원 안이 조용해졌다. 멀리서 보이는 각양각색의 암석에 붉은 노을이 스며든다.

"그랜드 캐니언의 석양은 또 새롭네."

고요해진 그랜드 캐니언에 남편도 마음을 열었다. 해가 떨어진다. 지구의 역사가 일단락되는 듯한 장엄한 일몰이 지나간다. 그곳의 모든 동식물들이 멈춰 서서 해가 지는 장관을 지켜보는 듯하다.

캐니언들을 돌아보는 동안 여러 날이 지났다. 매일 다른 캠핑장에서 머물며 서부영화 속 투어가 이어졌다. 한낮에는 강한 햇볕에 차 안 온도가 급격히 올라갔고, 밤에는 선선한 날씨로 바뀌었다. 아이는 캠핑카 테이블에서 그림을 그리며 지루함을 달랬다. 나는 조그마한 블루투스 스피커를 꺼내 음악을 들었다. 창밖으로 믿어지지 않는 광경이 한번씩 지나갈 때마다 미국 서부를 달리고 있다는 게 실감이 났다.

브라이스 캐니언은 가장 독특하고 매력적이었다. 국립공원에 도착하자마자 패딩 점퍼를 꺼내 입었다. 자이언 캐니언에서 불과 두어 시간 떨어진 거리에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기온차가 심했다. 브라이스 캐니언은 오밀조밀한 원형의 분지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움푹 팬 골짜기에 뾰족뾰족한 수많은 돌기둥이 서 있다.

이 돌기둥들은 ‘후두(Hoodoo)’라고 불린다. 오랜 시간 바람에 깎이고 침식되어 수백만 개의 돌기둥이 만들어졌다. 마치 커다란 콜로세움 극장에 모인 관중처럼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경사로를 따라 조금 걸어내려 갔다. 길이 잘 닦여 있어 조금만 걸으면 바로 캐니언의 한 복판에 들어가 볼 수 있다. 가까이서 보니 붉고 하얀 자연의 조각품들이 더욱 신비롭다.

해가 넘어가며 날씨가 더욱 쌀쌀해진다. 아이의 패딩 지퍼를 목까지 끌어올렸다. 주위에는 신비로운 암석들이 핑크빛으로 물들어간다. 브라이스 캐니언 너머까지 내려다보이는 전망대에서 석양을 바라봤다. 고운 파스텔 톤으로 하늘빛이 바뀌더니 이내 후두들의 실루엣만 아련하게 남았다. 브라이스 캐니언에서 가까운 캠핑장으로 갔다.


“별 보러 다시 가볼까?”

밤 10시가 넘은 시각. 캠핑의자에 앉아 모닥불을 지피던 남편이 말했다. 두 귀가 쫑긋해졌다. 브라이스 캐니언은 본래 별을 보는 곳으로 유명하다. 밤하늘에 별을 관측할 수 있는 곳이 미국 각지에 있지만, 그중에서도 브라이스 캐니언은 하늘을 뒤덮은 수많은 별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공원 내에서 야간 별자리 관람 행사도 열고 있다. "그래. 가보자!" 캠핑카의 시동을 켜고 낮에 봤던 브라이스 캐니언으로 무작정 향했다. 야생동물이 튀어나올지 모를 어두운 밤길을 조심조심 운전해서 캐니언에 도착했다.      

깜깜한 길가에 캠핑카를 세웠다. 남편에게 잠든 아이를 맡기고 홀로 카메라를 들고 내렸다. 차에서 십여 미터 걸어갔다. 뒤돌아보니 캠핑카에서 불빛이 새어나온다. 앞은 깜깜해서 무엇이 있는지 잘 보이지 않는다. 카메라를 받칠만한 둔턱을 발견하고 카메라를 앉혔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검은 도화지에 하얀 페인트를 흩뿌린 듯 무수히 많은 별이 빛나고 있다.


"와, 이게 브라이스 캐니언의 밤하늘이구나."

벌브 셔터를 누른 채 수초 간 기다렸다. LCD창을 보니 깜깜해서 보이지 않던 눈앞에 바위들의 능선이 나타났다. 그 위로 별빛이 촘촘하다. 프레임을 잡고 계속해서 셔터를 눌렀다. 고개를 드니 두 눈에 별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휘황찬란한 인공의 빛은 사라지고, 오직 별빛만으로 가득 찬 밤하늘을 경이롭게 바라봤다. 캐니언을 한낮의 강렬함으로만 떠올리던 것도 내 편견이었나 보다. 밤에 올라가지 않았으면 몰랐을 캐니언의 또 다른 모습을 엿본 기분이다. 오랜 세월 거친 물살을 견뎌온 단단한 협곡은 밤이 되면 은하수가 흘러내리는 아름다운 골짜기로 바뀐다. 문득 주위를 둘러봤다. 나는 누군가의 부드러운 내면을 모르고 지나치지는 않았던가. 나 역시 나약한 밤을 드러내기 힘들었던 시간들. 그 이면을 마주하는 건 두렵지 않은 아름다운 여정이라고 믿는다. 평화로운 우주의 밤과 조우한 낭만적인 시간을 떠올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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