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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림 Aug 14. 2019

그들의 크루즈는 신데렐라의 호박마차였을까

바하마 크루즈 Bahama Cruise

미국에 와서 여름을 넘기고 가을을 거의 떠나보낼 무렵이었다. 원피스를 한 벌 사기 위해 백화점의 클리어런스 세일 코너를 열심히 뒤졌다. 쇼핑의 천국 미국에 왔지만 그리 속 시원한 쇼핑을 못하고 있던 터다. 한국에서 1만원은 그리 큰 돈이 아닌데 미국에서 10달러는 왠지 크게 느껴진다. 아무래도 남편이 회사에 꼬박꼬박 다닐 때와는 사정이 다르고, 그마저도 여행에 생활비를 올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다가 백화점에 가도 세일 코너만 서성이고 있다. 미국 어딜 가나  백화점 의류 매장에는 옷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처치곤란일 정도로 넘쳐나는 상품들. 가격표만 떼지 않았지 깨끗한 ‘쓰레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 안에서 파격 세일하는 옷가지나 신발 등을 잘 고르면 운이 좋은 것이다. 열심히 골라서 가격 대비 무난한 회색 원피스와 플랫슈즈를 하나씩 골랐다. 그리고 트렁크 가방을 열어 차곡차곡 넣었다. 매번 티셔츠나 점퍼, 운동화로만 채우던 가방이 새롭게 보인다.      


그렇게 싼 가방을 차에 싣고 생애 최초의 크루즈 여행을 가기 위해 떠났다. 크루즈 여행이라니 럭셔리한 여행의 결정판 아닌가. 누구나 한 번쯤 동경하는 여행일 것이다. 그동안 여행비를 아끼려 화장실이 붙어있지 않은 깡통 캐빈이나 텐트칠 자리만 알아보던 우리에게 이런 사치가 없다. 남편은 오랫동안 인터넷을 서핑 끝에 최저가 카니발 크루즈 티켓을 잡았다. 4박5일간 숙소, 식사, 공연 등 모든 게 포함된 가격이 일인당 250달러(한화 약 30만 원)라니 무척 저렴하게 느껴졌다. 플로리다 주에서 출발해 바하마까지 다녀오는 일정이다. 바하마는 대서양 연안, 쿠바보다 조금 더 북동쪽에 위치한 작은 섬나라다. 크루즈를 타고 외국의 아름다운 섬나라까지 가본다니 기대가 더욱 커졌다.      


크루즈가 출발하기 전날 조지아 주 서바나에서 하루 묵고 다음날 일찌감치 플로리다로 향했다. 플로리다에는 첫 방문이다. 입구의 휴게소에 잠시 들렀다. 가을 끝자락에도 산뜻하고 훈훈한 공기가 이마를 스친다. 휴게소 앞에는 오렌지색 돌고래상이 예쁘게 서있다.

“아, 따뜻해. 이게 말로만 듣던 플로리다의 공기로구나.”

휴게소에서 무료로 플로리다산 오렌지 주스를 나눠주고 있었다. 주스를 따라주는 직원의 미소처럼 상큼하고, 톡톡 튀는 새콤한 맛이 났다. 휴게소에서 한껏 기분이 고조되어 크루즈가 기다리는 잭슨빌 항구로 갔다.  

플로리다 휴게소

주차장에 차를 대고 트렁크 가방과 유모차를 밀며 나섰다. 커다란 컨테이너 같은 건물에 사람들이 고불고불하게 줄을 서서 출국심사를 받고 있다. 분위기가 어째 심상치 않다. 두 시간쯤 지났을까. 그렇게 오랜 시간 출국심사를 기다린 건 처음이었다. 플로리다산 오렌지 주스로 섭취한 비타민C가 떨어져갈 즈음, 함께 줄을 서있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둘러보니 기다리는 사람의 반 이상이 흑인들이었다. 가족이나 친구끼리 너댓명씩 온 팀이 많았다. 그들은 레게머리를 주렁주렁 늘어뜨리고 엉덩이가 다 보이는 힙합바지 차림으로 수다를 떨었다. 들뜬 기분을 못 감추는 그들의 높은 억양과 왁자지껄한 웃음소리에 고막이 찌릿찌릿했다.      


“엄마, 우리 저 배 타는 거야? 엄청 크다.”

인고의 수속 절차를 마치고 드디어 크루즈에 올라탈 시간. 아이도 지루한 시간을 지나 드디어 배에 올라타며 폴짝폴짝 뛰었다. 오후 두 시가 넘어 배가 출발했다. 크루즈가 서서히 항구를 떠났다. 앞으로 바다 위에서 나흘 밤을 보내야 한다니 기분이 묘했다.      

짐을 풀고 본격적으로 크루즈 시설을 돌아봤다. 커다란 빌딩을 통째로 배 위에 얹은 모습이다. 엘리베이터가 다니는 중앙 통로에는 호텔처럼 화려한 샹들리에가 걸려있다. 그 통로를 중심으로 카지노와 공연장 등을 오갈 수 있다. 가장 위층 옥상에는 야외 수영장이 있다. 벌써 선베드를 한 자리씩 차지하고 누워 선탠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점심때가 한참 지나서야 승선을 했기에 출출했다. 1층 메인 레스토랑에 갔다. 파스타, 햄버거, 피자, 치킨, 각종 튀김, 샐러드, 빵, 과일 등 다양한 음식이 뷔페로 깔려있다. 이 모든 음식이 크루즈 비용에 포함되어 있다니! 칼로리 따위는 잊은 채 크루즈의 첫 끼를 즐겼다. 객실은 창문이 없는 가장 저렴한 방을 골랐다. 크루즈에서는 돌아다니며 여러 가지 시설을 이용할수록 남는 것이기 때문에 객실의 조건이 큰 의미가 없다. 직접 와보니 좁은 방에는 침대만 빽빽이 있고, 볕이 안 드는 지하실처럼 답답하다. 틈틈이 나가서 햇빛을 보고 광합성을 해야겠구나 생각했다.      


“어떡하지, 나 속이 너무 안 좋은 것 같아.”

"아니, 평소에 배를 그렇게 잘 타면서 왜 그럴까..."

고대하던 크루즈 여행이 이제 막 시작되었는데,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남편이 멀미를 못 이기고 침대에 뻗어버린 것이다. 지방에서 기자생활을 하는 남편은 평소 취재를 하러 이곳 저곳 다니는 편이다. 해안 지역을 취재할 때는 일주일에 사나흘도 배를 탄다. 기자인지 뱃사람인지 정체가 혼란스러울 정도로 배를 자주 타고 또 멀쩡했던 그가, 이렇게 커다란 배를 타고 멀미를 앓다니 전혀 예상치 못했다. 이제 막 배가 떠났는데 배에서 내릴 수도 없고 이를 어쩐다. 예민한 나도 크루즈가 물결을 따라 출렁이는 게 조금씩 느껴졌다. 생각보다 속이 울렁울렁했다. 다행히 남편처럼 심한 수준은 아니었다.

  

대신에 나는 추위에 떨었다. 11월에 탄 크루즈는 생각보다 쌀쌀했다. 얇은 옷가지들과 야심차게 준비해온 원피스는 옷장에 가지런히 걸려있는 채 그대로다. 칙칙한 점퍼와 후줄근한 긴 바지를 벗을 수가 없었다. 우리가 멀미와 추위에 움츠러든 사이, 함께 수속했던 흑인들은 헐리우드 배우처럼 엘레강스한 이브닝드레스를 입고 나타났다. 같은 객실에서 문을 열고 나온 게 맞나 싶게 무척 화려한 모습이다. 긴 속눈썹을 붙이고 화사한 풀메이크업으로 한껏 치장한 얼굴에는 시종일관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그들은 세련된 헤어스타일과 반짝거리는 주얼리를 자랑하며 크루즈 안을 시끌벅적하게 누볐다.      


남편이 좁은 객실에서 골골대며 육지를 그리워하는 동안, 나는 아이에 이끌려 추레한 차림으로 크루즈 안을 탐색했다. 아이와 대낮에 즐길 거라고는 레스토랑과 수영장뿐이다. 수영장도 볕이 세고 바람은 쌀쌀해서 한두번 밖에 못 갔다. 기름진 미국 음식에 서서히 물려간다. 저녁이 되면 매일 클럽에서 파티가 열리지만, 우리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그럼에도 시간은 빠르게 지나가고... 드디어 바하마에 다다르는 날이 되었다. 바하마의 수도인 나소에 정박한 날. 크루즈 밖으로 보이는 바다가 진한 옥색을 띠며 이국적으로 빛났다.

“와, 바다 색깔이 너무 예쁘다.”

크루즈에서 내려 사흘 만에 육지를 밟았다. 거리의 나무 건물들은 은은한 파스텔톤이다. 함께 배에 있던 사람들도 거리에 쏟아져 나왔다. 그들은 쨍한 나소의 햇빛을 눈부시게 반사시키는 흰색 정장을 위아래로 빼입고 값비싼 명품거리를 거닐었다. 우리는 카메라만 달랑 들고 바닷가에 나가 돗자리를 펴고 놀았다. 에메랄드빛 바다에서 파도가 잔잔하게 부서지는 모습을 보며 남편의 얼굴도 모처럼 환해졌다.  

바하마 나소

그날 크루즈에서는 정장을 입고 오라는 드레스코드를 안내했다. 준비해온 원피스를 드디어 꺼내 입고 레스토랑에 입장했다. 드레스와 턱시도 차림의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를 채웠다. 멀쩡하게 차려입고 메뉴판 윗줄부터 맨 아랫줄까지 마음대로 메뉴를 주문하며 갑자기 행복지수가 상승했다. 그때 레스토랑에 흘러나오던 음악의 볼륨이 커졌다. 사람들이 일제히 무릎을 감싸던 냅킨을 펼쳐 흔들기 시작했다. 우리는 영문을 모르고 두리번거렸다. 알고 보니 크루즈의 일정 중 가장 특별한 밤이 시작됨을 알리는 신호였다.      


이윽고 비트가 빠른 음악으로 바뀌었다. 싸이의 <강남 스타일>이다. 서빙하던 직원들이 하나둘 테이블 옆으로 나와서 말춤을 추기 시작했다. 우리 테이블을 담당하는 다부진 체격의 멕시코계 직원은 아이들을 데리고 나와 춤을 췄다. 지호는 엉겁결에 댄스파티에 동참해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비로소 크루즈에 타고 있다는 실감이 났다.      

내친김에 그날 밤 크루즈의 파티장을 한 바퀴 돌기로 했다. 지호는 크루즈 내 아이를 돌봐주는 키즈클럽에 잠시 맡겨 놨다. 미국에 와서 처음 남편과 단둘이 다니는 길이 즐겁기보다는 어색했다. 쭈뼛거리며 피아노 바에 들어갔다. 은발이 멋스러운 노신사가 파란 조명을 받으며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다. 한국에서 왔다는 우리를 무척 반갑게 맞아줬다.      


오늘의 레퍼토리는 흘러간 팝송 메들리다. 드레스와 정장을 입은 사람들은 피아노를 빙 둘러싸고 떼창을 했다. 이런 게 미국 감성일까. 우리나라의 7080 가요였으면 신나서 목청을 높였을텐데, 그들의 흥에 동참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또 다른 공연장에서는 록 뮤지컬 공연이 열렸다.

“노래를 썩 잘하는지 모르겠네.”

역시나 2%쯤 촌스러운 그들의 노래. 듣는 귀가 제법 까다로운 남편의 촌평을 들으니 더 이상 감상할 맛이 떨어졌다. 그래도 크루즈에 와서 오늘에야 제대로 구경을 한 게 어딘가. 만족스러운 파티 투어를 마치고 아이를 찾으러 갔다.      


“지호야, 뭐했어? 재미있었어?”

“엄마, 왜 이제 왔어. 보고 싶었잖아. 엉엉”

키즈클럽에서 나오며 아이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나와 남편은 영문을 모르고 화들짝 놀랐다.

“아니, 왜? 무슨 일 있었어?”

아이의 말인즉슨, 애니메이션 영화만 틀어줘서 재미가 없었단다. 엄마 아빠가 보고 싶었지만 아직 영어가 서툴고 낯설다 보니 말도 못 하고 울먹울먹 기다리기만 했던 것이다. 다 같이 재미있자고 크루즈 여행에 온 건데... 아이에게도 미안하고 이내 씁쓸해졌다.      


다음 날은 항구에 정박하지 않고 처음 떠났던 잭슨빌까지 부지런히 돌아오는 여정이다. 그날도 남편은 너른 캠핑장을 그리워하며 잠수함 같은 방 안에서 웅크리고 있었다.

“오늘이 마지막 날인데 방에만 그러고 있을 거야?

"미안해. 힘들어서 도저히 못 일어나겠어."

"에잇, 우리끼리라도 나가자.”

나는 답답한 마음에 아이를 데리고 나갔다. 수영장에 올라가서 선베드에 누웠다. 아이와 함께 탁 트인 하늘을 바라봤다. 해가 저물어간다. 날이 맑아서 더 진하고 선명한 노을. 매일 이렇게 아름다운 석양이 지고 있었구나. 바다 위에서 지호와 진한 주홍빛 일몰을 본 것만으로도 이번 크루즈 여행에서 하나는 건진 것 같다.      

어느새 나흘 밤이 지나고 드디어 육지에 도착했을 때, 남편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 이제 좀 살 것 같네.”

처음 크루즈에 탈 때처럼 고된 기다림은 아니었지만, 또 한 번 미국으로의 입국 수속이 남았다. 그런데 처음 기다릴 때와는 분위기가 180도 달라졌다. 왁자지껄한 웃음 대신 차분히 가라앉은 공기. 주위를 보니 크루즈에 함께 있던 사람들이 온데 간데없다. 화려한 드레스와 우아한 헤어 컬, 진한 아이라인이 사라지고, 다 늘어난 티셔츠와 허름한 청바지를 입은 이들이 트렁크 가방을 끌고 있는 게 아닌가. 마치 신데렐라의 마법이 풀리기라도 한 듯 말이다.      


도저히 같은 사람들이라고 믿기 힘들만큼 수수한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그런 모습이 왠지 더 눈에 익숙하다. 동네 마트에서 바코드를 찍고 진열대를 정리하던, 쉬는 시간에 삼삼오오 모여서 수다 떨던 점원들의 모습과 닮았다. 크루즈에서는 한껏 화려한 파티를 만끽한 뒤,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온 그들. 넉넉하지는 않지만 늘 새로운 기회를 만들고 그때마다 최선을 다해 즐기는 것이 그들만의 힘이 아닐까.      


그들은 하고 나는 못한 것, 과연 무얼까? 집으로 돌아오며 생각했다. 다시 한번 크루즈를 탈 기회가 생기면 좋겠다고. 다시 크루즈를 탄다면 나도 그들처럼 일상을 던져놓고 신나게 놀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기회는 쉽게 또 오지 않았다. 그로부터 일 년 뒤, 지호는 프리스쿨을 다니며 미국 친구들과 이야기하는 게 꽤 익숙해졌다. 미국인 틈에서도 더 이상 낯설어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남편도 한국에서부터 경직되었던 긴장감을 조금은 내려놓고 미국생활을 즐기기 시작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집앞 뜰을 가꾸고, 캠핑장을 검색하며 새로운 여행을 고민하는 여유를 누렸다.       


나는 그때 크루즈에서 봤던 이들을 기억하며 항상 생각한다. 한번뿐인 시간을 아깝게 보내지 않으리라. 비록 크루즈 여행은 한번뿐이었지만, 평범한 미국인들이 인생을 즐기는 방식을 조금은 엿보고 온 것 같아 다행이다. 지치고 반복되는 날들을 과감하게 떨쳐낼 새로운 이벤트를 늘 찾고 만들고 충실히 즐기는... 그리고 아직 파티는 끝나지 않았다. 미국을 누비며 신나게 즐긴 우리만의 파티는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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