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샌즈 White Sands National Monument
"화이트샌즈? 하얀 사막이라고 뭐 다를까..."
남편이 한번 가보고 싶다는 하얀 사막의 이야기를 듣고 처음에는 무척 시큰둥해했다. 언제나 여기저기 뒤져보며 여행의 ‘뽐뿌’를 불러일으키는 건 그의 몫. 이번에는 또 얼마나 먼 곳에 가자는 건지, 부담스럽고 귀찮은 마음부터 앞섰다. 사막이면 다 같은 사막 아닌가. 바닷가에도 한번 들어갔다 나오면 사흘은 옷에서 모래가 부스럭거리는데, 좁은 캠핑카를 타고 다니며 사막에 가자니... 아이가 모래 속으로 뛰어들면 일주일은 모래알이 입안에 서걱서걱 씹힐 게 뻔했다.
그럼에도 어느샌가 열심히 짐을 싸고 있고, 머지않아 그곳에 도착해서 열심히 셔터를 눌러대는 나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이번에도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 같다. 사실 나는 다른 어떤 곳보다 사막을 무척 좋아하는 이가 아니던가. 사막만큼 이국적이고 매력적인 풍광이 없다. 오래전 한국에서 사막을 닮은 곳이 있다고 해서 신두리 해변에 모래 사구를 보러 간 적이 있다. 회사에서 카타르에 출장 갔을 때는 지프차를 타고 사막의 능선을 내달리며 신나게 환호성을 질렀다.
미국에 와서도 사막을 찾아 여러 곳을 다녔다. 가까운 아우터뱅크스 바닷가에 있는 황금 사구는 전형적인 모래사막이었다. 파란 하늘 아래 눈부시게 빛나는 금빛 언덕. 바람이 지나간 자취가 부드러운 곡선으로 일렁이고, 걸을 때마다 발자국이 뒤따라오는... 어떤 복잡한 세상도 하늘과 땅으로 이분할 해버리고 마는 강렬함에 흠뻑 반하고 왔다. 유타의 붉은 사막, 데스밸리의 지저분한 사막도 인상적이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독특하고 잊을 수 없는 사막은 신비로운 화이트샌즈의 하얀 사막이었다. 세상의 끝이 있다면 그런 풍경이 아닐까. 화이트샌즈를 직접 발로 밟아보기 전까지는 어떤 곳일지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았다.
“지호야, 사막에 가서 모래놀이도 하고, 썰매도 타보자. 재미있겠지?”
“와아, 신난다!”
놀 수만 있다면 아이에게 모래 색깔 따위가 뭐가 중요하랴. 사막은 바다 다음으로 아이가 재미있어하는 여행지다. 10월에 떠난 캠핑카 여행은 라스베이거스에서 시작해 그랜드 캐니언을 돌아보고 뉴멕시코까지 내려오며 중반을 넘어섰다. 서서히 지루해질 법한 여정 끝에 사막에 간다니 아이는 금세 기대에 부풀었다. 화이트샌즈는 뉴멕시코 주에서도 한참 내려간 국경지대에 있는 국립 보존지역이다. 공군 미사일 발사 실험기지가 위치한 곳이기도 하다. 화이트샌즈로 가는 길에 출입 통제여부를 알리는 표지판이 곳곳에서 보였다.
화이트샌즈 국립공원에 가까이 다가가자 흰 모래 언덕이 나타났다. 일차선의 검은 아스팔트 도로 가장자리까지 하얀 모래가 파고들었다. 미끄러운 눈 사이로 빠져나가는 듯 아슬아슬하다. 멍 때리는 게 취미인 초코처럼 창밖을 빤히 바라보다가 점차 창문 쪽으로 다가갔다. 도로를 에워싼 새하얀 모래 언덕이 거대해지며 순식간에 눈앞의 풍경이 바뀌었다. '지금이 몇 월이었더라...'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현실로 나타난다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반팔을 입고 바라보는 풍경은 마치 한 여름에 눈이 가득 쌓인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한여름의 겨울왕국처럼 보이는 하얀 나라로 진입했다. 피크닉을 할 수 있는 넓은 공터에 도착했다. 지붕이 있는 조그마한 테이블이 여러 개 마련돼 있다. 시간이 정지된 듯한 신비로운 풍경. 하늘에는 깃털 같은 구름 사이로 파스텔톤 빛이 새어 나왔다.
“우와, 엄마 여기가 사막이야? 빨리 나가고 싶다.”
밖으로 나갈 채비를 했다. 그래도 사막인데 덥지는 않을까? 라스베이거스에서 강렬한 햇살을 받으며 남쪽으로 한참을 달려 도달한 곳이 아닌가. 해가 꺾이는 오후였지만 혹시나 싶어 선크림과 선글라스를 챙겼다.
“맨발로 내려와도 될 것 같아.”
캠핑카 문이 열렸다. 눈앞의 하얀 모래를 보니 눈송이와는 다른 입자가 낯설게 느껴진다. 더 뽀얗고 조밀하다. 달에 첫발을 내디딘 닐 암스트롱처럼, 미지의 세계에 먼저 다다른 남편이 캠핑카 밖에서 손을 내밀었다. 그의 말에 따라 계단을 하나씩 내려가는데 코끝에 닿는 공기가 생각보다 산뜻하다. 발가락에 단단한 모래 언덕이 느껴지더니 이내 발바닥이 스르륵 들어간다. 지호도 슬리퍼를 벗고 맨발을 내밀었다.
“모래가 뜨겁지 않고 시원해.”
“어떻게 촉감이 이렇지?”
화이트샌즈의 모래를 손바닥에 쥐어봤다. 손가락 사이로 차분하게 빠져나간다. 수분을 머금은 소금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곳은 본래 2억 5천만 년 전 바다였다. 고원이 되었다가 호수가 되었다가를 반복하며 물속에 고여 있던 석회질이 모래가 됐다. 그래서 일반 모래에 비해 더 부드럽고 촉촉하다. 무엇보다 흩날림이 적다. 옷에 들러붙어도 툭툭 털면 그만이다. 처음 우려했던 것처럼 입에 들어가서 서걱거릴 걱정이 싹 사라졌다.
“이렇게 '쾌적'한 모래는 처음이야!”
마침 해가 살짝 기울어 기온도 적당해졌다. 여름의 끝 같은 서늘한 바람이 불어온다. 언덕 위로 올라오니 눈앞에 펼쳐진 광활한 사막이 아름답게 빛난다. 아이는 이미 내 손을 뿌리친 지 오래다. 하얀 눈밭 같은 모래 위를 뛰어다니며 발자국을 새기고 있다. 오늘을 위해 지호는 모처럼 예쁜 원피스를 챙겨 입었다. 하늘을 향해 동그랗게 팔을 모았다. 빙그르르 돌다가 다리를 뒤로 뻗으며 각양각색의 포즈를 취하기 시작했다.
“지호야 잠깐만 그러고 있어.”
하얀 모래 위에서 춤추는 아이의 모습이 마치 핑크색 꽃 한 송이 같다. 그 장면들을 놓칠세라 뷰파인더에 담아 찰칵찰칵 셔터를 바삐 눌렀다.
아이는 이내 모래 바닥에 누워서 팔다리를 대자로 뻗어 날갯짓을 했다. 누구보다 자유로운 몸짓으로 화이트샌즈를 품에 안았다. 아이를 따라서 모래 위에 누워봤다. 새로운 앵글이 나타났다. 누워서 본 화이트샌즈에는 하늘과 모래의 경계가 없다. 잠시 누워서 또 다른 세상을 바라봤다. 밤이 되면 저 하늘에 고운 모래처럼 무수히 많은 별이 쏟아지겠지.
그곳에서 맞이하는 석양은 비단결같이 부드러웠다. 하늘이 붉게 물들며 하얀 모래가 아이의 원피스처럼 분홍빛이 되었다. 해가 넘어가자 금세 제시카의 털빛처럼 회색으로 변해간다. 해가 지면 칠흑 같은 어둠에 갇힐지도 모른다. 서둘러 돌아갈 채비를 했다.
"이렇게 떠나려니 너무 아쉽다."
"내일 또 올까?"
우리는 과감히 일정을 변경했다. 다른 곳을 구경하기로 한 반나절의 일정을 포기하고 한 번 더 이곳에 오기로 했다. 한낮의 쨍쨍한 하늘 아래 화이트샌즈는 또 어떤 느낌일까 궁금해졌다.
가까운 캠핑장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 날 아침, 설레는 마음으로 화이트샌즈에 돌아왔다. 전날과 달리 내리쬐는 햇살이 제법 뜨겁다. 하늘은 새파랗고 모래는 눈부시게 하얗다. 포토샵으로 조절한 듯 채도와 대비가 한층 올라갔다. 모래 속은 여전히 시원하고 촉촉하다. “자, 신나게 놀아볼까?” 모래놀이를 좋아하는 아이를 위해 캠핑카에서 플라스틱 컵과 숟가락을 챙겨서 갖고 나왔다. 촉촉한 모래가 가득한 화이트샌즈는 아이에게 천연 놀이터나 다름없다. 하얀 모래는 조그만 손 안에서 주물럭주물럭 뭉쳐지고 부서지며 지루할 새 없이 다양한 형태로 바뀌어 갔다.
모래놀이를 하다가 비지터센터에서 썰매를 빌려왔다. 7달러를 내면 동그란 접시 모양의 플라스틱 썰매를 빌릴 수 있다. 이미 경사면에 자리를 잡고 썰매를 타는 몇몇 가족이 보였다. 아이 없이 온 중년의 관광객들도 동심으로 돌아가 천진난만하게 썰매를 즐기는 중이다.
썰매를 끌고 적당히 경사가 가파르고 길이 잘 닦인 지점을 찾았다. 남편이 아이를 데리고 썰매에 앉았다. 꺅~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내려오며 터져 나오는 웃음. 지호는 혼자서 타보겠다며 경사를 걸어 올라갔다. 그렇게 열댓 번을 넘게 오르락내리락거렸다. "엄마도 한번 타보자." 아이를 따라 썰매를 갖고 올라갔다. 조금 올라온 것 같은데 경사면이 아찔하다. 에라 모르겠다. 미끄러져 내려오니 순식간이다. 불어오는 바람과 쨍한 햇살, 짜릿한 스릴이 더해져 역시나 기분 좋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한참을 놀다 보니 서서히 갈증이 났다. 잊고 있었지만 그곳은 사막이 아닌가. 캠핑카 냉장고에서 차가운 맥주를 한 병 꺼냈다. 아이에게는 아이스바를 하나 꺼내 줬다. 월마트에서 파는 평범한 맥주가 오아시스처럼 청량해지는 마법. 하얀 땅과 파란 하늘을 보며 삼키는 탄산이 어느 때보다 시원하게 목을 타고 넘어간다. 다음 여정을 위해 떠날 시간이 다가오는 게 아쉽기만 하다.
"이제 슬슬 정리해야겠어."
운전대를 정비하는 남편도 이 곳을 떠나는 게 못내 아쉬운 눈치다. 실컷 놀고 일어서는 아이 옷을 툭툭 털어내니 모래알이 스르륵 흩어져 내린다. 너무나도 빠르게 사라지는 이곳의 시간처럼... 그 시간을 좀 더 붙잡아두고 싶어서 작은 유리병에 하얀 모래를 한 줌 담았다. 캠핑카 창밖으로 멀어지는 화이트샌즈를 오랫동안 바라봤다. 다른 계절, 다른 세상에 와있는 듯한 신비로운 착각을 좀 더 누리고 싶었다.
노스캐롤라이나에 돌아와서 식탁 앞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유리병을 올려놨다. 한 번씩 지호는 유리병을 열고 조심스레 모래를 만지작거렸다. 언제라도 투명한 유리에 담긴 모래를 만지면 그때의 촉감이 되살아나는 듯했다. 어느덧 집 주위가 화이트샌즈처럼 하얀색으로 가득 덮인 계절이 되었다. 식탁에는 따스한 찻잔의 온기가 은은하게 퍼지고 있다. 유리병에 분홍빛 햇살이 스며들었다. 희고 고운 모래알이 빛난다. 세상의 끝에서 만난 가장 황홀하고 아름다웠던 우리의 추억도 함께 반짝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