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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림 Aug 09. 2019

여행사진을 찍는다는 것

번외 편

“아니 왜, 셔터를 좀 더 팍팍 누르지 않고...”

“로우앵글 말고 하이앵글이 더 잘 나오는데...”     


여행을 다니며 한 번씩 내 전속 사진사(?)인 남편에게 투덜대던 두 가지다. 물론 대체로 내 마음에 쏙 드는 보물 같은 장면들을 포착해줘서 고맙게 여긴다. 하지만 한 번씩 과한 의욕을 보일 때가 있다. 굳이 배경과 함께 담아보겠다며 카메라를 아래에서 위로 향하는 '굴욕 모드'로 찍어주니 어느 와이프가 좋아하랴. 이제는 그가 카메라를 쥐고 몸을 아래로 숙이기 시작하면 입가에 미소를 유지한 채 쿨하게 생각한다. 그래, 이 사진은 '포기 각'이구나.  

    

사실 그 보다 더 불만인 건 셔터를 아끼는 그의 습성이다. 셔터를 펑펑 눌러도 한 장 건질까 말까 한데 매우 신중하게 한 컷씩 사진을 찍는다. 어쩌면 그런 그의 모습이 나 자신을 보는 듯해서 답답한 건지도 모른다. 언젠가 지인으로부터 자유분방하게 움직이는 아이 사진을 찍으려면 셔터를 C(연사) 모드로 찍는 게 좋다는 조언을 들었다. 하지만 나는 아이 사진뿐 아니라 그 어떤 사진도 연사로 찍은 적이 없다. 셔터를 낭비하면 안 된다는 생각과 함께, 한 컷의 셔터로도 포착해내야 한다는 아날로그적 사명(?)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나는 필름 세대다. 고등학교 때부터 사진 동아리에서 수동 카메라를 만지기 시작했고 흑백사진의 암실 작업을 배웠다. 사진을 좋아하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카메라는 내게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대학에 가서는 학보사에서 사진기자로 일했다. 사진이라는 매체와 암실, 현장의 에너지, 사진을 함께 찍는 사람들과의 관계는 내 전부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중 한 사람인 남편을 만나 지금의 인연에 이르렀으니 말이다.


그 당시만 해도 사진은 오랜 기다림의 대가이자 값비싼 은 화합물이었다. 필름 한 롤의 컷 수는 많아야 30여 컷. 다 찍은 사진은 암실에서 직접 현상하고 인화해야 했으니 한 컷도 낭비할 수 없었다. 앙리 까르티에 브레송이 말한 '결정적 순간'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셔터를 누르는 게 미덕이었다. 나에게 결정적 순간은 빛과 표정이 살아있는 순간이다. 어둠을 뚫고 나오는 화사한 빛의 공간감이 느껴지고, 피사체의 눈동자에 영혼이 비치는 찰나를 사랑한다.

노스캐롤라이나

"남는 건 사진뿐이지.”

미국에 갈 때, 카메라 두 대를 직접 배낭에 지고 비행기에 올랐다. 그리고 미국 곳곳으로 여행을 갈 때마다 나의 분신(이라고 쓰고 ‘돌덩이’라고 읽는다) 같은 카메라를 손수 챙겼다. 여행이 무르익으면 나서서 카메라를 메고 다니는 남편도 사진이 여행의 일부라는 데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다. 때로는 재미없는 인증샷만 급하게 찍고 지나가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여행에서 사진을 빼놓는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아이슬란드

나에게 사진은 '여행을 기억하는 방법'이다. 여행은 집으로 돌아온 순간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마법 같다. 그것이 허상이 아닌 진짜 우리의 과거였음을 증명하기 위해, 카메라의 광학적 시선을 빌려 내가 보는 장면을 충실히 기록해둔다.

라스베이거스

그리고 사진 찍는 일은 흥미로운 여정의 일부다. 카메라를 이고 지고 다니다가, 기어코 꺼내서 프레임을 잡아보고, 미간을 찡그리며 초점을 맞추고, 마침내 손가락으로 셔터 버튼을 누르는 수고를 한 끝에 만난 한 컷의 완벽한 사진! 그 번거로움과 희열이 동시에 각인되며 셔터막이 지나간 125분의 1초가 더 또렷해진다.

마뉴멘트 밸리

나는 아직도 마뉴멘트 밸리에서 한밤중 별의 궤적을 바라보던 시간과 아이슬란드의 오로라를 기다리며 차가운 손에 입김을 불어대던 시간을 기억한다. 캠핑카에서 슬리퍼만 구겨신고 나가서 마주친 수많은 풍경과 냥이들이 창밖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기던 모습까지도... 나는 셔터를 눌러 CCD에 인식시킴과 동시에 내 뇌리 속 깊숙이 저장하는 데 성공했다.    

세도나

사진에는 때로 시각뿐 아니라 다른 감각의 정보들도 함께 새겨진다. 뉴올리언스의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카메라 뷰파인더에 한쪽 눈을 갖다 댄 순간 귓가에 울리던 묵직한 브라스 연주가 재생된다. 발에 닿는 화이트 샌드의 시원한 촉감, 뿌연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옐로스톤의 온기, 루트 66을 횡단하며 만난 캐딜락 랜치의 격한 바람까지... 모든 것이 사진 속에 생생히 사로잡혀 있다.

화이트샌드

사진은 비단 '찍는' 사람만의 인상적인 체험이 아니다. 카메라를 바라보며 한 번 더 미소 짓고, 멋진 포즈로 사진 찍히려 애쓰던 아이에게도 남다른 시간으로 남을 것이다. 낯설지만 새로운 배경에서 엄마 아빠와 카메라를 사이에 두고 깔깔대던 추억은 쉽게 잊히지 않으리라 믿는다.


사진을 찍고 찍히던 우리의 모습은 3*5인치 인화지를 벗어나 더 크고 아름다운 프레임 속에 머문다. 그런 이유로 나는 여행 가방을 꺼낼 때면 늘 카메라부터 챙긴다. 그리고 한 컷 한 컷 소중하게 셔터를 누른다. 한 컷은 나를 위해, 한 컷은 지금 이 순간을 위해.

산타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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