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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림 Aug 05. 2019

회한의 임프로비제이션

뉴올리언스 New Orleans

“첫 장거리 여행이라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할 거야.”

미국에서 맞이한 첫 번째 연말에 우리는 집이 아닌 길 위에서 보내는 로드 트립을 계획했다. 노스캐롤라이나 주에서 텍사스 주까지 장장 4000km가 넘는 거리를 직접 자동차를 몰고 가는 여정이다. 꼼꼼한 남편은 일주일 간 밤잠을 아껴가며 인터넷을 검색해 일정을 세웠다. 숙소를 미리 예약하고 모든 동선을 구글로 확인한 뒤, 최종 정비된 일정을 내게 보냈다. 구글에서 가져온 여행 정보를 편집한 리스트가 내 눈에는 투박해 보였지만, 남편의 머릿속에는 이미 지도가 그려진 듯했다. 어딜 가든 한번 와본 사람처럼 지리와 상황을 파악하는 건 언제나 그의 몫. 여행하는 동안에는 ‘삼식이’ 남편으로서 더욱 당당한 그였다.      


장거리 여행에 필요한 짐을 싸기 시작했다. 텐트와 캠핑의자 등 기본 캠핑 장비만으로도 자동차 트렁크가 꽉 찼다. 옷과 히터, 아이가 쓰는 키높이 발판, 운동화와 슬리퍼 등등 집안 살림살이를 여행 가방과 커다란 장바구니에 담아 차로 옮겨 실었다. 미니밴에 세 사람이 앉을 자리를 제외하고 짐으로 꽉꽉 채워졌다.

“혹시 모르니까, 최대한 넉넉히 싣고 가자.”

“이렇게 짐을 많이 갖고 가다니, 우리 미국사람(?) 다 됐나 봐.”     


날씨가 춥고 이동거리가 길기 때문에 고양이들은 불가피하게 집에 두고 가기로 했다. 사료와 물, 화장실을 봐달라고 이웃에게 부탁했다. 우리가 없는 동안 냥이들이 잘 지낼 수 있을까? 냥이들도 우리도, 처음 맞는 미국에서의 장거리 이별이었다. 제법 쌀쌀해진 겨울 날씨 속에 아이를 차에 태우고 노스캐롤라이나를 떠났다. 그때만 해도 그해 겨울이 그렇게 길고 추울 줄 몰랐다.      


테네시 주와 미시시피 주를 지나 뉴올리언스에 도착한 날, 미시시피 강변에는 비가 그치고 뿌연 안개가 올라오고 있었다. 마치 아스라이 다가오는 뉴올리언스란 도시처럼, 모든 게 희미했다. 사람들이 많은 프렌치 쿼터 거리로 다가가니 기념품을 파는 가게들이 있었다. 큼지막한 그림이 그려진 티셔츠나 컵, 인형, 장식물을 판매하는 가게들이다. 아이는 새로운 여행지를 갈 때마다 새롭게 발견되는 물건들이 신기한지 신나게 구경을 했다. 가끔 인형을 사달라고 조르기도 했지만, 냉장고에 붙이는 자석 한두개 고르는 걸로도 만족해 했다.

밤에 도착한 뉴올리언스의 미시시피강

가게를 돌아보다가 허기를 채우기 위해 야외 식당에 자리를 잡았다. 마침 라이브 공연을 하는 곳이다. 기타와 드럼, 키보드의 3인조 밴드다. 한국에서도 보기 힘든 재즈 공연을 미국에 와서 꼭 한 번 보고 싶었다. 내가 원하는 묵직한 정통 재즈는 아닐지라도, 편안한 분위기에서 즉흥 연주를 듣는 것만으로도 위시리스트가 반쯤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흥겨운 라이브 연주를 듣고 아이와 함께 팁 박스에 달러를 보탰다.

뉴올리언스에 가는 목적 중 하나가 재즈라면 다른 하나는 ‘먹방’이다. 뉴올리언스에는 해산물이 풍부해서 검보 스프, 해산물 포 보이, 굴 요리, 악어 고기까지 다양한 요리로 유명하다. 뉴올리언스에서만 맛볼 수 있는 카페 드몽드의 베이그넷도 빼놓을 수 없다. 베이그넷은 일종의 밀가루 튀김인데 하얀 설탕 가루 속에 파묻혀 있어 달달하면서도 쫀득하다. 진한 카페라테 한 잔, 거기에 달콤한 베이그넷을 한 입 베어 물면 머리가 핑 돌 정도로 그 맛이 환상적이다. 그렇게 뜨거운 커피와 따끈한 베이그넷을 먹으니 쌀쌀하게 느껴지던 뉴올리언스의 겨울도 훈훈해졌다.

뉴올리언스에서 먹은 굴요리, 검보 스프, 베이그넷.

뉴올리언스에 가서 먹는 데는 어느 정도 투자를 했지만, 숙소는 여비를 절약하기 위해 텐트 캠핑을 택했다. 뉴올리언스 숙소는 시내에 근접한 곳이 대부분 한화로 20만 원을 호가했다. 대체로 낡고 시내에 있어서 번잡한 소음도 감내해야 한다. 우리는 50달러(한화 약 6만원) 안팎의 캠핑장을 선택하고 자동차로 직접 시내를 오가기로 했다. 시내의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면 하루 종일 머물러도 10~20달러면 충분하다. 캠핑의 장점은 아무래도 저렴한 것. 저렴하면서 접근성이 편하다면 더할 나위 없다. 뉴올리언스뿐 아니라 다른 도시를 여행할 때도 종종 비슷한 전략을 짰다.

      

캠핑장에 와서 텐트를 펼쳤다. 혹여 기온이 더 떨어질세라, 방한 장비를 하나둘 꺼내 무장했다. 첫 번째는 전기장판. 한국에서 이고 지고 온 한국식 전기장판을 캠핑 매트 위에 깔았다. 한국식 전기장판을 갖고 왔다는 것은 돌덩어리처럼 무거운 변압기를 함께 갖고 왔다는 뜻이다. 물과 전기를 마음껏 쓸 수 있는 미국 캠핑장에서 변압기 정도 돌리는 건 아무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역시나 한국에서 가져온 방한텐트를 꺼냈다. 우리가 사용하는 텐트는 4인용 작은 텐트였는데 방한텐트를 욱여넣으니 그럭저럭 겹쳐졌다.      

텐트 안에 또 텐트가 겹쳐져 있고, 아래에서는 따스한 온기가 올라오니 거짓말 조금 보태서 안방 아랫목만큼 따뜻하고 아늑했다. 나중에 전기식 히터까지 캠핑 목록에 추가됐다. 전기장판과 히터, 방한텐트만 있으면 북극에서 텐트를 치고 자라고 해도 자신이 있다. 단, 전기 콘센트가 설치된 캠핑장이어야 한다.   

 

바람불고 쌀쌀한 밤이었지만 만반의 준비를 한 덕에 그럭저럭 보낸 듯하다. 우리 텐트 옆자리에는 밤새 텐트 대신에 커다란 밴이 한 대 서 있었다. 두 아이를 데리고 시카고에서 뉴올리언스까지, 미국 중북부에서 남쪽까지 내려온 가족이다. 남편은 독일계 백인, 아내는 베트남계 동양인이었다. 차를 개조해 매트리스를 깔아놓고 잠을 자길래 텐트보다는 따뜻할까 궁금했다. 아침밥을 준비하며 물었다.

“차에서 자서 덜 춥나요?”

사람 좋아 보이는 아이 아빠가 웃으며 말했다.

“It’s just a Car(그래 봤자 그냥 차예요).”

“시카고 추위에 비하면 여기는 추운 것도 아니에요”란 말도 덧붙였다.       


그 집 큰 딸인 커레인은 지호보다 한참 위인 초등학생 언니였다. 지호는 커레인을 따라서 매트 깔린 자동차에도 들어가 보고, 우리 텐트로도 안내하며 캠핑장 안을 즐거운 놀이터로 만들었다. 커레인의 동생은 이제 막 걸음마를 하는 아기다. 지호는 동생이 귀엽다며 쓰담쓰담 해줬다. 미국에서는 어린아이를 데리고 캠핑에 나서는 풍경이 흔하다. 캠핑장에서나 놀이터에서 엄마들은 태연하게 갓난아이를 흙바닥에 앉혀서 놀게 한다. 그 모습이 꽤 자연스럽다. 커레인의 동생도 흙바닥에 앉아 나뭇가지와 돌을 만지며 기분이 좋은지 팔을 위아래로 신나게 흔들어댔다.      

커레인의 가족은 그날 아침 다른 곳으로 또 여행을 떠난다고 했다. 잠깐이었지만 아이와 놀아준 게 고맙기도 하고, 또 이렇게 만난 게 반가워서 가족사진을 찍어줬다. 우리와 헤어지고 가는 길에 SNS로 사진을 보내주니 고맙다는 답변이 왔다. 시카고에 오면 꼭 놀러오라는 말도 덧붙였다. 왠지 같은 이방인이자 캠핑족으로서 보이지 않는 동질감이 느껴졌다. 그 이후로도 지호는 한참 동안 커레인 언니를 보고 싶어 했다.      


낮에 다시 방문한 뉴올리언스의 번화가는 두 눈에 새롭게 들어왔다. 미국 한가운데서 프랑스를 물씬 느끼게끔 하는 프렌치식 건물들이 고풍스러웠다. 한편으로는 매우 파격적이다. 대낮부터 투명한 플라스틱 컵에 술 한 잔씩 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보였다. 군데군데 동성애를 상징하는 레인보우 깃발도 눈에 띄었다. 사람들이 제일 많이 모여드는 거리로 나가니 쿵짝거리는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재즈 하면 브라스지. 한국에서는 주로 피아노가 리드를 많이 하는데 미국에서는 트럼펫이나 트럼본 같은 금관악기가 주름잡는다. 클래식을 연주하는 오케스트라에서도 금관악기는 매우 중요하지만 매끄러운 소리를 내기가 쉽지 않은 악기다. 그런데 뉴올리언스에서는 골목마다 울려퍼지는 트럼펫, 트럼본 악기 소리가 범상치 않다. 거리에서 본 한 흑인 청년은 허름한 청바지를 입고 앉아 커다란 트럼본을 목에 걸고 연주하고 있었다. 굵은 트럼본의 파이프를 따라 기대 이상의 아름다운 소리가 나왔다. 젊은 청년들이 악기 하나씩을 쥐고 거리를 활보하며 공연하는 모습도 봤다. 재즈뿐 아니라 실험적인 음악과 퍼포먼스를 하는 팀도 많다. 그들은 팁 박스를 들고 골목마다 다니며 연주를 이어갔다. 거리에서 만나는 연주자들은 대개 팁이 주 수입이다.           

거리 공연을 감상하며 발걸음을 이어갔다. 주말에 연말이 더해져 거리에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2륜 전동 휠 세그웨이를 타고 다니는 단체 관광객들도 보였다. 관광객을 태운 마차를 지나고 그림을 파는 노점들을 지나 세인트루이스 성당까지 도달했다. 인증샷을 찍고 나니 서서히 해가 넘어갔다. 더 늦기 전에 제대로 된 재즈 공연을 보기 위해 재즈홀로 향했다.

세인트루인스 성당 앞

우리가 선택한 곳은 프리저베이션 홀. 1960년대부터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는 유서 깊은 재즈홀이다. 재즈에 문외한인 남편이 인터넷을 검색해 발견한 곳인데 워낙 유명한 공연장이라 줄이 길다. 한 시간 가량 줄을 섰는데도 아슬아슬하게 공연장에 발을 들였다. 이미 50여 명 규모의 객석이 꽉 차 있었고, 우리는 입석이라도 기쁘게 공연을 봐야 할 상황이다.    


홀 안에 들어가니 그곳만 시간이 멈춘 듯, 오래된 건물에 낡은 액자들이 걸려 있었다. 하지만 뿌연 담배 연기와 술잔이 오가는 전형적인 재즈 바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관객들은 좁고 긴 나무의자에 다닥다닥 앉아 오로지 공연에만 집중할 준비를 하고 있다. 나는 아이를 등에 업고 공연장 옆 복도에 섰다. 창문 너머 무대를 바라봤다. 멤버들이 하나둘 나와서 무대에 자리를 잡았다.      

프리저베이션 홀의 내부

드럼, 피아노, 트럼펫, 트럼본, 클라리넷의 구성이다. 다들 60~70대 노인이다. 한 사람 빼고 모두 흑인이었는데 생각보다 풍채가 작고 수수한 양복 차림이었다. 빵모자로 멋을 낸 이도 있었다. 동네 할아버지들이 모여서 연주하듯, 정겹고 따뜻한 이미지가 그려졌다. 마지막에 리더처럼 보이는 최고 연장자가 입장했다. 드럼 스틱이 하나 둘 셋 하며 박자를 세자 좁은 공간에서 악기 소리가 터져 나왔다. 거리에서 들었던 쿵쾅거리는 재즈가 아닌 담백하면서도 꽉 짜인 연주가 시작됐다.      


그들의 악기 소리는 오십 년은 갈고닦은 듯 미려했다. 한 곡 한 곡이 흘러가는 게 아쉽게만 느껴졌다. 빠른 곡들이 지나고 블루스풍의 곡이 달려가던 템포를 붙잡았다. 느린 재즈가 시작되자 마음이 녹아내렸다. 여유로운 리듬에 익숙해질 즈음 트럼펫 연주자가 일어나서 즉흥으로 노래를 하기 시작했다. 노래와 랩의 중간처럼 무언가를 이야기하는 모습은 흥에 넘쳤지만, 보는 마음이 괜스레 찡해왔다. 옆에서 함께 듣던 남편을 돌아보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나 또한 눈시울이 붉어졌다.      


“판소리를 듣는 것 같았어.”

그렇게 한 시간의 공연이 끝나고 나오며 남편은 말했다. 왠지 모를 그들의 한이 느껴져서 눈물이 났단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재즈를 듣고 눈물 흘릴 줄이야. 미국 재즈의 정수에서 한국의 정서를 공감한 건 뜻밖이었다. 재즈로 약자의 삶을 토로했던 그들의 방식이 우리네 한풀이와 다를 게 없었다. 아이도 등에 업힌 내내 편하지는 않았겠지만, 함께 있어서 다행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연주를 듣는 일은 평생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한 경험일테니.

     

재즈 홀 밖, 어느새 해가 지고 난 뒤 뉴올리언스는 거대한 클럽으로 바뀌어 있었다. 밤의 뉴올리언스에는 유모차가 어울리지 않았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거나 흥에 취해 거리를 점령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가게들은 문을 활짝 열고 볼륨을 높여 손님을 끌고, 거리의 연주는 조금 더 끈적끈적해졌다. 프리저베이션 홀의 세련된 연주를 듣다가 밖으로 나오니 모든 게 소음으로 느껴졌다. 빠른 걸음으로 유모차를 밀며 프렌치 쿼터를 빠져나왔다.      


다음날 뉴올리언스를 떠나는 길에 오크앨리 플랜테이션을 방문했다. 사탕수수 농장을 지닌 대 부호가 살던 저택이다. 우리는 30달러의 값비싼 입장료를 냈지만, 관광객들로 바글바글한 저택까지 진입하지 못하고 정원에서만 머물렀다. 넓디넓은 정원에는 아름드리 오크나무가 멋지게 자라나 있었다. 초록 잔디밭과 굵은 나무 뒤로 넘어가는 태양이 세밑의 햇살답지 않게 따사로웠다.


너른 정원 한 켠에는 흑인 노예들이 생활하던 집이 몇 채 남아 있다.

“아빠, 여기는 누가 살던 곳이야?”

궁금해하는 아이에게 설명해주기도 힘들 만큼 초라한 거처였다. 화려한 경관 뒤에 고스란히 보존된 남부 노예제도의 역사를 보며, 전 날의 신나고도 구슬펐던 재즈 가락이 오버랩됐다.     

오크앨리 플랜테이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마존’ 쇼핑몰을 검색해 프리저베이션 홀의 밴드가 연주한 CD를 장바구니에 담았다. 그날의 재즈를 오랫동안 간직하고 싶어서다. 프리저베이션 홀의 밴드 구성은 시기마다 바뀐다. CD에 담긴 연주는 그날 공연을 본 팀의 연주는 아니었지만, 역시나 수준급이었다. 메인 테마를 연주한 뒤, 각 악기마다 즉흥적인 변주인 임프로비제이션을 진행한다. 그리고 다시 만난 악기들이 하나가 되어 내달릴 때 심장박동이 따라서 치솟는다. 그 음악을 들을 때면 뉴올리언스에서 재즈의 정수를 맛봤던 짜릿함과 왠지 모를 찡한 감동이 밀려온다. 미국에서 중고로 구입한 CD플레이어가 고장 나기 전까지 참 열심히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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