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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림 Jul 29. 2019

달빛 아래 피리 부는 코코펠리의 미스터리

애리조나 Arizona

살다 보면 그럴 때가 있다. 문득 주저앉아 지나가는 시간을 막연히 흘려보내고 싶을 때. 의미 없는 생각을 하고 의미 없는 공간에 머물고 싶을 때가 있다. 애리조나는 그럴 때 생각나는 곳이다. 가도 가도 똑같은 황무지의 척박한 땅. 무의미한 풍경이 계속해서 지나간다. 그런데 그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다 보니 위로가 되는 듯하다. 언제까지고 초점 없이 바라봐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그런 곳이다.      

애리조나에 간 건 시월의 어느 날이다. 달리는 캠핑카에서 생활한 지 벌써 일주일째. 라스베이거스에서 출발해 캐니언들을 둘러보고 애리조나로 접어들었다. 식구들도 이제 적응을 해간다. 남편은 하루에 대여섯 시간씩 캠핑카의 커다란 핸들을 꽉 쥐고 운전을 한다. 장거리 운전이 은근히 체질에 맞는다며 재미를 붙이고 있다. 아이는 달리는 차 안에서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리고, 냥이들은 흔들리는 진동 속에서도 그릉그릉 낮잠을 잤다.

      

창밖을 내다봤다. 끝도 없이 펼쳐진 황무지가 눈에 들어왔다. 누런 땅에 선명히 대조되던 파란 하늘. 한참을 내달려도 계속해서 똑같은 풍경이 지나갔다. 가다 보면 뭔가 나올까? 갈수록 지평선은 더 뚜렷해지고... 허허벌판 위에 우리의 목적지가 나타났다. 우주에서 운석이 떨어져 만들어졌다는 거대한 운석 분화구가 남아있는 미티오 크레이터(Meteor Crater) 박물관이다.       

미티오 크레이터(Meteor Crater) 박물관

박물관 안은 생각보다 규모가 꽤 컸지만 인적이 뜸했다. 간혹 노부부들만이 와서 18달러라는 적지 않은 입장료를 내고 구경을 하고 갔다. 티켓을 끊고 들어가며 발걸음을 주춤거렸다. “우리 잘못 온 거 아니겠지?” “어째 좀 불안하다.” 이런 황무지에 운석이 떨어졌고 우리가 오게 되다니, 우연인지 필연인지 알 수가 없다.     

 

박물관에 들어가자마자 극장에서 짧은 영상을 봤다. 그동안 지구에 떨어졌던 운석들을 나열하며 애리조나에 떨어진 운석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영상이다. 이곳에 약 5만년 전 지름 50미터 크기의 운석이 떨어졌다. 당시 운석의 속도는 초속 12킬로미터, 뉴욕에서 LA까지 5분만에 날아갈 엄청난 빠르기였다. 영화는 마치 추억의 X파일 시리즈처럼, 혹여 존재할지 모를 외계인에 대한 거대한 음모론까지 이끌어냈다.       


짧지만 강렬했던 영상을 다 보고 나오니 단순한 박물관이 아닌 미지의 세계에 발을 들인 기분이 든다. 박물관 입구에 전시해놓은 운석의 일부가 더 특별해 보였다. 지구에 떨어지며 조각난 운석 중 가장 큰 파편인데 무게가 600kg이 넘는다. 구멍이 뽕뽕 뚫려 있고 자력을 지닌 신비로운 돌이다. 운석을 실제로 만져보니 자기장도 느껴지고 매끈한 촉감이 새롭다. 이 운석은 우주 어느 곳에서부터 날아와 여기에 떨어졌을까? 우주 어딘가에 정말 생명체가 살아가고 있을까?       

박물관에 전시된 운석

운석이 떨어진 구덩이를 확인하러 밖으로 나갔다. 계단을 한 층 올라가야 전체 규모가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크기가 어마어마하다. 풋볼 경기장 20개가 들어갈 만한 공간이다. 이곳에 달 탐사팀이 와서 훈련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와 엄청 넓다.” “지호야, 저 끝이 보이니?” 내가 셔터를 누르는 동안 남편은 아이를 들어 망원경을 보여줬다. 운석이 푹 팬 흔적 뒤로 황량한 대지가 끝도 없이 이어졌다.      

운석이 떨어진 구덩이

미국 여행을 다녀보면 우주와 외계 생명체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뉴멕시코 주에 있는 VLA(Very Large Array)에 들렀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가도 가도 황무지뿐인 소코로란 도시를 한참 달리다 보니, 멀리서 접시모양의 흰색 물체들이 보였다. 미국의 국립 우주전파천문대에서 운영하는 위성 안테나들이다. 얼핏 보면 크기가 짐작이 안 가는데, 지름이 무려 25m나 된다. 그런 안테나가 27개나 줄지어 서 있다.     

VLA(Very Large Array) 안테나 기지

이곳은 조디 포스터가 주연한 영화 콘택트의 촬영 기지로 유명하다. 박물관 안에서는 위성 안테나의 기능과 구조, 우주의 신비에 대해 설명하는 조디 포스터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밖으로 나가서 안테나에 가까이 다가갔다. 동그랗고 거대한 안테나에서 삐비비 하는 신호음이 약하게 들려왔다. 하루 종일 우주와 전파로 교신하고 있는 것.


아이는 귀에 손을 대고 안테나에 잡히는 소리를 들으려 집중했다.

“지호야 무슨 소리가 들리니?”

“응. 삐삐뽀뽀가 이야기하는 것 같아.”

“그래? 뭐라고 하던?”

“우리가 와서 반갑대. 나도 반가워 얘들아~”

삐삐와 뽀뽀는 뽀로로 만화에 나오는 귀여운 외계인 친구들이다. 아이는 깔깔깔 웃으며 우주와 교신하는 흉내를 냈다.     

운석 박물관을 빠져나와, 다시 황량한 애리조나를 달렸다. 이런 곳이라면 외계인은 몰라도 ‘코코펠리’는 나타날지도 모르겠다. 애리조나에 와서 코코펠리라는 신기한 존재를 알게 됐다. 애리조나에 들어와서 한 주유소에 들렀을 때다. 남편이 주유를 하는 동안, 옆에 딸린 조그만 상점에 들어갔다. 자석, 열쇠고리, 머그컵, 인형 등 주유소에 있는 가게 치고는 기념품이 제법 다양하게 있다.     

 

가게 구경하기 좋아하는 아이와 함께 조그만 기념품들을 하나씩 찬찬히 구경을 했다. 애리조나의 기념품 자석을 하나 사려고 고르다 보니 피리를 불고 있는 요상한 생명체가 눈에 들어온다. 바코드를 찍고 있던 할머니에게 물었다.

“이 사람은 누구인가요? 인디언인가요?”  

“아뇨. ‘그것’은 코코펠리예요. 전설 속에 나오는 요정이죠.”     

플루트를 연주하는 나에게 코코펠리는 호기심을 물씬 자아내게 만들었다. 주유소를 떠나 차를 타고 이동하는 길에 데이터가 아까운 줄 모르고 폭풍 검색했다. 코코펠리는 아주 오래 전부터 미국 남서부 지역에서 내려오는 전설에 등장하는 신이다. 머리카락은 바깥으로 뻗어있고, 등은 활처럼 휘었다. 손에서 피리를 놓지 않는다. 밤이 되면 사막에 모닥불을 펴고 피리를 불며 축제를 벌인다. 코코펠리는 다산과 풍요의 상징이기도 하다.      


사막에서 코코펠리가 신나게 뛰어노는 배경에는 꼭 초록 선인장이 있다. 애리조나는 만화에서나 한 번씩 보던 키 큰 선인장이 자라는 곳이다. 키 큰 선인장을 볼 수 있는 애리조나의 사와로 국립공원(Saguaro National Park)을 찾아갔다. 가는 길에 사막의 뜨거운 볕이 캠핑카로 쏟아졌다. 기온이 섭씨 30도를 찍었다. 창밖에 선인장이 삐죽삐죽 나타나기 시작했다. 비포장도로에 접어들며 흙먼지가 일었다. 그렇게 한참을 덜컹거린 끝에 사와로 국립공원에 도착했다.     

사와로 국립공원(Saguaro National Park)

캠핑카를 공원 입구에 세웠다. 내리기 전에 불볕더위를 막아줄 모자와 선글라스를 챙겼다. 아이의 얼굴에 선크림을 꼼꼼히 바르고, 캠핑카의 냉장고에서 아이스 바를 하나 꺼내 쥐어줬다. 차에서 내리니 먼지가 폴폴 나는 마른 흙에서 뜨끈한 열기가 올라온다. 잠깐 걸었는데도 피부가 따갑다. 듬성듬성한 풀 무더기 위에 높이가 십여 미터가 넘는 큰 선인장들이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뻗고 있다. 가까이에서 올려다보니 자연스레 눈이 찡그려진다. 강렬한 햇볕이 선인장 끝에 걸려 십자로 갈라졌다.      

애리조나의 선인장들은 200년까지도 살아간다. 지호는 아이스 바를 쪽쪽 빨면서 제 키만 한 선인장 앞에서 사진을 찍겠다고 했다. 두 팔을 뻗기 전의 ‘아기’ 선인장도 수십 년은 족히 자랐을 터다. 선인장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다니 오랜 세월 살아낸 강인한 생명력이 느껴진다. 선인장 하면 휑한 사막에 으레 등장하는 하나의 요소로만 여겼던 날들이 왠지 미안해질 정도다.      


풍경을 더 감상하기 위해 선인장들이 줄지어 꽂혀 있는 낮은 산등성이를 올랐다. 타들어가는 햇볕에도 서늘한 바람이 분다. 저 멀리까지 빽빽이 선인장이 보인다. 어떤 선인장은 줄기가 하나뿐이고, 어떤 선인장은 두세 개 이상의 줄기들이 솟아나 있다. 줄기가 기이한 모습으로 엮인 선인장도 종종 있다. 어떤 형태로든 태양을 향해 꼿꼿함을 지키는 모습에 반할 수밖에 없었다.      

신기한 것은 꼿꼿한 선인장만 홀로 사막을 견뎌온 게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이런 선인장이 자라는 곳에는 부엉이, 늑대, 도마뱀 등 크고 작은 새와 동물들이 함께 살아간다고 한다. 메마른 우리에게도 늘 누군가가 필요했듯이... 아이에게 겉으로 삐죽이 드러난 선인장을 보여주기 보다는, 함께 살아가는 신비로운 생태계를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더 컸던 것 같다.      


다시 캠핑카를 타고 사와로 국립공원을 빠져나오는 길, 낮 동안 뜨거웠던 대지의 열기가 차분히 가라앉고 있다. 붉은 석양을 배경으로 선인장들의 실루엣이 그림처럼 펼쳐졌다. 어둠이 짙어지고 선인장에 은은한 달빛이 비치면 코코펠리가 나타나겠지? 코코펠리도 어쩌면 머나먼 과거에 지구로 불시착한 외계인은 아니었을까? 터무니없는 생각이 끝도 없이 떠올랐다. 그래도 괜찮다. 애리조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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