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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림 Aug 19. 2019

나의 무채색 고양이들

번외 편 2

초코를 처음 만난 건 서른 살의 겨울이다. 그때 나는 바흐만의 '삼십세'처럼 지독한 성숙통을 겪고 있었다. 자신만만하게 달려오던 이십 대를 지나 삼십세에 접어들며 모든 게 바뀌었다. 결혼 후 달라진 생활터전, 변화된 관계와 역할 속에 때로는 허망하고 때로는 암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고양이를 한번 키워보지 않을래?"

고양이가 내게 위로가 되려나. 고양이를 좋아하던 친구의 말에 이끌려 이태원의 허름한 골목을 찾아갔다. 고양이 분양가게의 주인은 짧은 콧수염을 기른 남자다. 그는 조그만 지하실 방 한 칸에 고양이들을 풀어놓고,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PC자판을 두드리고 있었다. 이제 태어난 지 두세 달 된 고양이들이 한데 뒤엉켜 장난을 치다가, 내가 들어간 순간 일제히 얼음이 되었다. 그때 나와 눈을 딱 마주친 검은 고양이 한 마리.

"한번 안아봐도 되나요?"

쑥 들어서 팔에 앉히자, 내 패딩점퍼 소매에 몸을 척하니 늘어뜨린 채 그르릉거렸다. 친구가 말했다.

"야, 이 고양이는 완전히 네 고양이다."     


어두컴컴한 지하실 입구에 보이지 않던 인기척이 느껴졌다. 창살에 갇힌 고양이들. 어둠 속에 반짝이는 눈동자가 공포영화처럼 후두둑 지나갔다. 그 눈빛의 두려움과 슬픔이 뒤이어 전해졌다. 안고 있던 고양이를 두고 돌아서 나오는데 고개가 자꾸 뒤로 젖혀진다. 잠시나마 소매에 머물던 온기가 아직 따스했다.    


다른 곳에서 몇 마리의 고양이를 더 봤지만, 결국 눈가에 아른거리는 검은 고양이를 다시 찾아갔다. 주인은 다시 돌아온 우리에게 높은 가격을 불렀다. 남편이 선뜻 돈을 지불하니 그는 친절한 웃음을 흉내내며 고양이를 넘겨줬다. 내가 고양이를 키우게 되다니... 그건 초코에게도 나에게도 일종의 '탈출'이었다.       


초코는 우리 집에 와서 조금씩 자유를 찾아갔다. 위축된 몸짓이 제법 과감해졌다. 낚싯대로 사냥놀이를 시킬 때면 본능적으로 엉덩이를 씰룩거리다가 총알처럼 튀어나갔다. 푸석푸석했던 털에 윤기가 돌면서 중후한 포스를 내뿜었다. 하지만 멍 때리기를 좋아하고, 한 박자씩 반응이 느린 성품은 어딜 가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짠하고 정이 가는지도 모른다.

살아있는 생명체를 두려워하던 나는 고양이를 키우며 정감에 푹 빠졌다. 어느샌가 다가와 나른하게 드러누워 있고, 하품을 쩍하며 스트레칭하는 조그만 털복숭이. 함께 있는 것만으로 마음의 평화를 찾아갔다. 고양이란 건 이렇게 아름답고 매력적인 존재였나. 저 멀리서 꼬리를 세우고 스윽 다가와 내 다리에 꼬리를 슬쩍 훑고 지나간다. 한쪽 발로 내 발을 꾹 밟기라도 하면 발끝에서부터 귀여움이 진동한다.

초코가 오고 두어 달 뒤 제시카가 우리 집에 왔다. 제시카는 초코를 한번씩 데리고 가는 동물병원에서 키우던 은회색 페르시안이다. 초코가 수더분한 냥이라면 제시카는 요물이다. 행동이 빠르고 영리하며, 늘 애정과 먹이를 갈구한다. 그리고 사람과의 대화를 꾸준히 시도하고 있다. 시끄럽게 냥냥거리는 걸 질색해하는 나와 달리, 남편은 번번이 제시카의 영특한 애교에 무너졌다. 퇴근하고 돌아오면 현관 바닥에 앉아 식빵을 구우며 충성스럽게 기다려주는 것도 초코가 아닌 제시카였다.

"제시카, 잘 있었어? 나도 잘 다녀왔어."

그 끈끈한 시절을 보낸 제시카를 내가 미워하려야 미워할 수 없는 이유다.      

미국에 갈 때 다른 건 아무래도 괜찮았다. 네 살배기 아이보다 냥이들을 데리고 가는 게 더 큰 과제였다. 냥이들을 무사히 데려갈 방법이 없다면, 나는 냥이들과 한국에 남을 작정까지 했을 정도다. 고양이들을 다른 곳에 맡겨두고 갈 궁리도 해봤다. 하지만 남편은 극구 반대했다.

"그래도 우리 식구인데 떨어져 지낼 수 없지. 다 같이 갈 방법을 만들어보자."     

고양이를 위한 비행기 좌석부터 잡았다. 우리가 예약할 당시, 델타항공은 5킬로그램 이하 소형동물을 비행기에 데리고 탈 수 있었다. 비행기마다 네 마리만 탑승이 가능했다. 동물병원을 다니며 동물 등록칩을 삽입하고, 각종 접종을 맞힌 뒤 검역서류를 준비했다. 미국에 갈 때는 물론, 다시 한국에 돌아올 때 꼭 필요한 서류다.


이제 비행 당일 하루 종일 굶는 고생만 견디면 미국 땅에 도달할 수 있을 것 같다. 문제는 집이었다. 미국은 반려동물의 천국이지만, 우리처럼 1~2년 머무는 사람들이 반려동물을 데리고 가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한국 사람들이 거래하는 카페에서 집을 구하려다 열 번 넘게 퇴짜를 맞았다. 반려동물을 환영하는 집주인은 아무도 없었다.      

직접 미국 부동산 사이트를 뒤져서 어렵사리 집을 구했다. 대개 보증금과 월세를 더 내면 반려동물을 키울 수 있다. 확실한 계약이다. 집주인은 한 번씩 집수리를 위해 우리 집을 자주 드나들면서도 고양이를 보고 한 번도 눈치를 주거나 제재를 가한 적이 없다.      


그렇게 구한 미국집에서 고양이들은 잘 적응했고 또 그 공간을 좋아했다. 높은 곳을 좋아하는 냥이들에게 이층 집은 거대한 캣타워였다. 제시카는 이층 난간 꼭대기에 올라가서 우리를 내려다보는 '고양이 짓'을 즐겼다. 뒤뜰로 나있는 큰 창문을 열어두면 둘이 나란히 앉아 창밖을 바라봤다. 이름 모를 새들이 지저귀며 날아들거나 다람쥐가 나무에 오르는 모습은 냥이들에게 아주 재미난 구경거리였다.      

한 번은 고양이들이 밤중에 하악질을 하며 소란스럽게 굴길래 밖을 내다봤다. 이름 모를 고양이가 우리 집 주변에 어슬렁거리고 있는 게 아닌가. 뒷집 고양이였다. 집안에서 곱게 자란 초코와 제시카와 달리, 미국에는 집밖에서 씩씩하게 지내는 고양이들이 많았다. 때아닌 불청객이 된 뒷집 고양이는 한두번 더 찾아오다가 발길을 끊었다.

고양이를 데리고 여행을 갈 때도 고민을 많이 했다. 이 아이들을 어떻게 데려갈까? 냥이들은 과연 캠핑카 여행을 좋아할까? 잘 견딜 수 있을까? 고양이들은 본래 낯선 곳을 싫어한다. 하지만 미국에서 고양이를 데리고 다니는 사람들을 심심찮게 보며,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겨났다. 냥이들을 케이지에 넣고 긴 여행을 떠났다.


속시원히 말을 못 나눠봐서 모르지만, 캠핑카에서 냥이들은 생각보다 잘 지낸 것 같다. 바깥세상을 좋아하는 제시카는 캠핑카 안에서도 훨훨 날아다녔다. 창문에 딱 붙어서 지나가는 경치를 바라봤다. 운전하는 남편 옆 조수석은 내 자리가 아닌 제시카의 자리였다. 나는 테이블에서 지호와 마주보고 앉았고 초코는 내 옆에 딱 붙어서 그릉그릉거렸다. 아이에게도 냥이들이 우리 식구라는 걸 단단히 각인시킨 여행이 되었다.      

따스한 아침이면 캠핑카의 철문을 열고 방충망만 남겨둔다. 그러면 조심성 많은 냥이들은 귀를 쫑긋 세우고 문 앞에 나란히 앉아 구경하곤 했다. 냥이들과 캠핑카 밖에서 쨍한 햇살을 맞던 날을 잊을 수 없다. 냥이들은 처음에는 몸을 낮추고 긴장한 기세가 역력했지만, 서서히 여유를 되찾았다. 언젠가 눈이 펑펑 내린 다음날 집 앞에 데리고 나갔을 때도 그러했다. 내게 안긴 초코는 큰 눈을 가만히 꿈뻑이며 너른 세상을 바라봤다.      

미국 생활을 무사히 마치고 다시 한국의 아파트로 돌아왔다. 더 이상 높은 계단과 초록이 보이는 창문, 창밖에 움직이는 사냥감(?)이 없다. 이렇게 심심하게 어찌 살까 싶으면서도 느긋하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어느덧 고양이들과 삼십 대를 흘려보냈고, 그들은 우리보다 더 빠른 세월을 겪으며 사람으로 치면 칠순의 나이에 접어들었다. 처음에는 아기였다가, 친구가 되어줬다가, 이제는 부모처럼 늙어가는 모습이 안쓰러운 내 가족들이다.


세상에 내가 해보지 못한 수많은 경험들이 있겠지만, 고양이와 함께 사는 것은 가장 근사한 경험이다. 내가 계속 무언가를 해줘야 하고 나를 늘 시험에 들게 만드는 육아와는 또 다르다. 아이가 내게 기쁨과 환희와 함께 고통과 좌절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만드는 존재라면, 고양이는 평온한 힐링 그 자체다.  해질녘 노을을 바라보며 하울링하는 초코의 고운 실루엣. 우리의 시간도 그렇게 지나가겠지. 언제나 지금이 가장 소중하고 사랑스럽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냥이들을 오늘도 쓰담쓰담하며 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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