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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림 Aug 21. 2019

냥이들과 4000킬로미터 미국 횡단 대장정

루트 66 Route 66

“여기 어디쯤인데……. 아, 여기 있다!”

시카고에 갔을 때다. 남편이 길을 지나가다가 골목 어귀에서 무언가를 찾았다. 그가 찾은 건 다름 아닌 루트66 표지판. 루트66의 시작점이 바로 시카고에 있다. 남편은 아이처럼 천진한 모습으로 루트66 표지판이 붙은 길쭉한 봉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나 보고도 붙잡아보라기에 ‘내가 왜?’하며 정색을 했다. 도대체 왜 루트66 표지판이 그렇게나 좋고 반가웠던 걸까? 그 사진은 이듬해 루트66 대장정의 시작이 되었고, 4000킬로미터를 달리고 나서야 비로소 그 해답을 얻었다.         

시카고에서 영문을 모르고 붙잡았던 루트66 표지판

“루트66을 한번 달려보자.” 여행 계획을 주도하는 남편이 강력하게 말했다.

“루트66이 어딘데?”

“시카고에서 서부까지 미국을 횡단하는 거야.”

“그럼 며칠이나 걸리는데?”

“날짜는 잡아봐야 하지.”

“냥이들은 어쩌고?”

“이번에는 데리고 가자.”

“정말? 그럴 수 있을까?”

미국에서 40개 주가 넘는 곳을 다녔지만, 루트66은 최장거리이자 최장기 여행이 될 코스였다. 나는 ‘루트66’이란 것을 어렴풋이 들어봤어도 왜 우리가 그 길을 달려야 하는지 이유를 찾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그리 깊게 고민하지 않았다. 루트66을 지나면 내가 가보고 싶던 캔자스와 중서부 지역을 거쳐 갈 수 있으니까. 매번 그랬듯이 일단 떠나고 보기로 했다.      


이번 여행은 고양이들도 데려갈 준비를 했다. 우리 집 고양이는 두 마리다. 내 소울메이트 초코는 검은색 스코티시폴드다. 성격이 엄청 온순한 순둥이다. 둘째 제시카는 페르시안 냥이다. 식탐이 많지만 말귀를 쏙쏙 알아들을 만큼 영특하다. 제시카는 초코에 비해 낯가림이 적기에 바깥 여행을 감당할 수도 있겠지만 내성적인 초코는 조금 걱정이 됐다. 하지만 미국에 오니 강아지는 당연하고 고양이까지 데리고 장거리 여행을 떠나는 경우를 종종 목격했다. 그들을 곁에서 보며 용기를 얻었다. 그래. 이번에는 다 같이 가보자.       


다행히 방금 공장에서 뽑은 5인승 새 캠핑카를 타고 가기 때문에 냥이들과 쾌적하게 다닐 수 있을 것만 같다. 남편이 캠핑카 렌트 사이트를 매일 들어가서 클릭한 끝에 운 좋게 렌트했다. 새 차인데 하루 렌트비가 50불 정도로 저렴하다. 시카고 공장에서 막 나온 따끈따끈한 차량을 전국 각지로 운송해주는 대가로 가격 할인을 해주는 특가 프로그램을 이용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빌린 캠핑카를 시카고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정해진 기간 내에 타고 가면 된다. 벌써 세 번째 캠핑카 여행인데도 기대되기는 마찬가지다.     


국내선 비행기를 타고 시카고로 갔다가 올 때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돌아오기로 했다. 초코와 제시카는 국내선 좌석을 예약할 때 미리 전화해서 자리를 잡았다. 반려동물은 케이지에 담아서 비행기 앞좌석 아래 빈 공간에 넣고 가면 된다. 비행기마다 기내 반입 가능한 반려동물 수가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예약은 필수다. 예약을 완료하면, 출발 당일 공향에서 탑승 요금을 결제하면 된다. 국내선이니 검역과 같은 번거로운 절차는 전혀 필요 없다. 미국 공항에는 강아지 목줄을 끌고 비행기를 타러 온 승객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반려동물에 관대하고 자유로운 환경이다.


드디어 출발하는 날. 냥이들을 데리고 일찌감치 집을 나섰다. 3월말 날씨가 아직 쌀쌀했다. 티켓팅을 하는데 승무원이 케이지 속 냥이들에게 눈을 맞추며 인사를 해준다. 한 마리당 150달러(한화 약 20만원)의 티켓을 결제했다. 공항 검색대 앞에서는 냥이들을 하나씩 케이지에서 꺼내 안고 통과했다. 초코 제시카에게는 미국에 온 뒤 오랜만에 겪는 비행이다. 4시간가량의 비행을 마치고 마침내 시카고 공항에 도착했다.     

미국 횡단 여행길의 엄청난 짐

시카고 공항은 무척 복잡했다. 냥이들을 넣은 케이지와 트렁크를 이고 지고, 지호의 유모차를 밀며 공항을 힘겹게 빠져나왔다. 캠핑카 렌트 사무실까지 우버를 타고 가서 짐을 줄줄이 늘어놓고 기다렸다. 우리가 빌린 크루즈 아메리카 캠핑카를 간단히 소개하자면, 5인용 기본 스타일이다. 침대, 싱크대, 가스레인지, 전자레인지, 냉장고, 테이블, 세면대 등이 있다. 화장실에는 샤워시설과 변기가 있다. 세 식구가 사용하기에 무척 넉넉한 환경이다.      

우리가 빌린 캠핑카 내부

캠핑장에 도착하면 남편은 캠핑카에 물 호스와 전기 케이블을 연결했다. 그러면 전기와 물을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다. 그리고 떠나기 전에는 호스와 케이블을 빼고, 배수관을 꽂아 오물과 하수를 처리하는 게 일이다. 이동할 때는 전기선을 꽂지 않더라도, 프로판가스가 공급되기 때문에 냉장고가 계속 가동한다. 차를 정차하면 가스레인지와 온수도 사용할 수 있다. 에어컨과 히터가 기본적으로 장착되어 있다. 캠핑카를 인수할 때 온수와 냉난방시설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꼭 점검하는 게 필요하다.


캠핑카 바닥에 냥이 화장실과 물그릇을 놔줬다. 고양이들이 맨발로 다니기 때문에 바닥을 쓸고 닦을 빗자루를 하나 마련했다. 차가 움직일 때는 물그릇을 치워야 한다. 냥이들도 차가 움직일 때는 꼼짝 않고 의자에 앉아 있거나 케이지 속에 쏙 들어가 앉았다. 여행 중반 이후부터는 제시카도 서서히 바깥 구경에 맛 들려서 보조석에 앉기를 즐겼다. 창문 옆에 딱 붙어서 루트66의 낭만적인 경치를 함께 즐겼다.      

캠핑장에 자리를 잡고 난 뒤

시카고에서 출발해 본격적으로 루트66 길에 올랐다. 루트66은 미국의 일리노이 주 시카고에서 캘리포니아 주 LA의 산타모니카를 잇는 길이 3945킬로미터의 국도다. 일리노이에서 출발해 미주리-캔자스-오클라호마-텍사스-뉴멕시코-애리조나-캘리포니아까지 자그마치 8개의 주를 통과한다. 우리는 약 보름간의 일정을 계획했으니, 한 주를 하루 이틀밖에 머무르지 못한다. 매일 대여섯 시간씩 달려야 하는 코스다. 그런 빡빡한 일정 때문에 남편과의 적잖은 충돌이 예상되었다.


미국인에게 루트66이 로망인 이유는 그 길만의 향수어린 풍경 때문이다. 동부에서 서부를 관통하는 최초의 길. 서부개척시대에 수많은 사람들이 부푼 꿈을 갖고 이 길을 지났다. 하지만 더 넓고 빠른 고속도로가 닦이면서 루트66은 버려진 길이 되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사람들이 이 길을 찾는 이유는 낡고 느리지만, 흥망성쇠를 모두 겪어낸 이 길이 주는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조금 낯설더라도, 루트66은 미국의 로드트립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성지다. 루트66을 따라 달리다보면 곳곳에서 루트66을 상징하는 명소들을 구경할 수 있다. 첫 번째로 루트66을 발견한 곳은 일리노이 주의 윌밍턴에 있는 자이언트 제미니다. 로켓을 들고 있는 거대한 사람 형상의 동상이 있다. 이제 이 길을 가다 보면 어딜 가든 '루트66'의 표시를 발견할 수 있겠구나. 갑자기 흥미로워졌다.

자이언트 제미니

링컨 묘소를 지나 마트에서 장을 봤다. 캠핑카 안의 미니 냉장고는 얼음이 유지될 정도로 성능이 좋다. 한인마트에서 김치와 삼겹살, 고추장을 사고, 일반 마트에서 식빵, 베이컨, 계란, 로메인 상추, 맥주, 생수를 담았다. 장거리 여행을 가야 하니 아이가 갖고 놀 장난감을 챙기는 것도 일이다. 평소에 좋아하는 인형, 로봇, 자동차, 태블릿PC 등을 집에서 가져왔다. 이번에는 캠핑카 테이블에서 쓸 수 있는 스케치북과 색연필 세트도 준비했다. 여행하면서 스케치북에 그림도 그리고 일기도 쓰기로 했다.      


이튿날 미주리 주로 들어갔다. 버드와이저 공장을 지나 세인트루이스로 향했다. 미주리 대학과 세인트루이스의 거대한 게이트웨이 아치를 구경했다. 게이트웨이 아치는 미시시피강 앞에 있는 국립기념비다. 192미터의 높이로 무척 높다. 루트66 여행객들에게 게이트웨이 아치는 서부로 향하는 관문이라는 의미가 있다. 내내 날이 궃더니 비가 내렸다. 생각보다 기온이 싸늘하다. 밤새 기온이 영하로 떨어져 얼음이 얼었다. 지호는 캠핑카 바퀴에 붙은 차가운 고드름을 만져보며 신기해했다.      

게이트웨이 아치

캔자스시티로 접어들며 비가 눈으로 바뀌어 갔다. 캔자스시티는 미주리 주와 캔자스 주에 걸쳐 있다. 아마도 미국의 널찍한 지도 한가운데쯤에 도달한 것 같다. 캔자스시티는 재즈로 유명하다. 재즈공연을 하는 브런치 바가 있어서 찾아갔다. 피닉스 바라는 곳이다. 일요일 아침, 조용한 시내에 캠핑카를 주차했다. 진눈깨비가 내린다. 옷을 툭툭 털며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늑한 공간에 중장년대의 부부들이 자리에 앉아서 공연을 감상 중이다. 앞쪽에서 백인 남성 피아니스트와 흑인 여성 보컬의 공연이 펼쳐지고 있다. 보컬의 소리는 소울이 느껴지면서도 세련된 감성이 살아있다. 대중적인 재즈이지만 충분히 그 공력이 느껴진다. 접시 한 가득 푸짐하게 와플과 샌드위치가 나왔다.      

캔자스시티 피닉스 바

따뜻한 브런치를 먹고 문을 열고 나서니 다시 온도 차이가 확연히 난다. 촉촉했던 눈송이가 포슬포슬하게 바뀌었다. 넬슨아킨스 박물관으로 갔다. 입구에 커다란 배드민턴 셔틀콕 조형물이 독특하다. 박물관 안은 대리석으로 웅장하고 고급스럽게 꾸며져 있다. 우리와 함께 한 가족이 들어왔다. 정장 차림의 엄마 아빠를 따라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소년이 보우타이를 매고 수줍게 들어왔다. 나름대로 한껏 격식 차린 복장이다. 휴일에는 그렇게 박물관 나들이를 즐기는 미국 중부의 소박한 일상이 그려졌다.      

넬슨아킨스 박물관

미주리를 지나 캔자스 주로 접어드니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동화 속 캔자스의 회오리바람 이야기가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엄청난 돌풍이 불었다. 캠핑카는 부피는 크지만 차체가 가벼워서 흔들림이 심하다. 도로에서 차가 휘청거리며 위험한 고비를 몇 번 넘겼다. 캔자스에 와보니 왜 여기에 사람들이 잘 오지 않는지 알 것 같다. 바람 부는 흐린 날씨와 휑한 도시... 그래도 캔자스를 밟았으니 이번 여행의 일차적인 목표는 달성한 셈이다.      

도시를 벗어나 인적이 없는 들판으로 나왔다. 창밖에는 누런 갈대가 무성하다. 비포장도로를 달려 톨그래스 보존지역으로 들어갔다. 캔자스에서 힘없이 고개를 꺾은 갈대들을 보다가 오클라호마로 오니 그 위에 바이슨 떼가 더해졌다. 캠핑카를 잠깐 세워 바이슨을 구경했다. 갈대와 잡초가 우거진 바람 부는 들판이 그들의 삶의 터전이다. 세찬 바람에도 끄떡 않고 유유히 들판을 거니는 바이슨의 모습이 섬세한 갈대밭과 어우러져 근사했다.     


바이슨과 작별하고 블랙앵거스를 만났다. 오클라호마의 초록 들판 위에 까만 소들이 풀을 뜯고 있다. 소 한 마리도 드넓은 자연에 풀어서 키우는 여유가 느껴진다. 가도 가도 황량한 들판에는 소들만 띄엄띄엄 보일 뿐, 사람 구경을 하기 힘들다. 길을 달리는 내내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오클라호마는 소고기가 유명해서 스테이크 맛집도 여럿 있다. 우리가 방문한 캐틀맨 레스토랑에는 카우보이 모자를 멋스럽게 쓴 손님들이 앉아 있었다.       

캐틀맨 레스토랑

루트66은 참 신기한 길이다. 고속도로에서 한 칸 내려왔을 뿐인데 마치 평행우주를 지나는 듯, 같은 공간에서 다른 시간대를 지나는 느낌이다. 그동안 봐왔던 익숙한 경치와는 전혀 다르게 정적이고 예스러운 풍경들. 하나씩 나타나는 루트66의 상징들은 불을 밝히는 등대처럼, 낡은 길을 지나는 나그네들의 이정표가 되어준다.     

루트66의 또 다른 명물, 팝스 아카디아도 그러했다. 미국인들이 좋아하는 소다 음료를 파는 상점으로, 그 앞에 콜라를 닮은 커다란 조형물이 상징이다. 거대한 콜라병의 흰 뼈대 사이로 빛과 그림자가 동시에 새어 나왔다. 사진에 담으니 더욱 매력적인 구조물이다. 가게 안의 진열대에는 갖가지 맛의 소다 음료가 조명을 받아 보석처럼 빛났다.

팝스 아카디아

여행이 무르익으며 냥이들도 적응을 해갔다. 소심한 초코와 달리, 제시카는 예상보다 훨씬 더 캠핑카 여행을 즐기는 눈치다. 차가 달릴 때나 멈출 때나 창밖을 빼꼼히 내다봤다. 지호는 테이블 위에서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불렀다. 지호가 이번 여행에서 꽂힌 노래는 '오 수재너'.

"멀고 먼 앨라배마 나의 고향은 그곳,

밴조를 메고 나는 너를 찾아왔노라."

가사 뜻도 모르고 부르는 노래는 점차 목청이 커졌다. 운전대를 잡은 남편도 덩달아 따라 불렀다. 하루에 400킬로미터씩 장거리 운전을 하는 남편은 트럭 운전수처럼 적성에 맞는다고 했다. 저녁밥을 거하게 차려주면 맛있게 먹고 세상에서 누구보다 행복해하는 그였다.

오클라호마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방문한 곳은 볼거리가 가득했던 루트66 박물관이었다. 박물관에 가까이 다가가면서부터 루트66 글자가 계속해서 눈에 띈다. 루트66 여행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들르지 않고는 못 배길 장소임에 틀림없다. 우리처럼 루트66을 지나는 관광객들을 만났다. 노부부도 있고, 아이를 데리고 있는 가족도 봤다. 그들은 설레는 마음으로 루트66 박물관을 찬찬히 둘러보고 있었다. 박물관 안은 마치 추억의 7080 박물관처럼 옛 주유소와 자동차, 레스토랑 등 옛 것으로 가득 차 있다.

오클라호마의 루트66 박물관

한 코너에는 꽃무늬가 알록달록 그려진 캠핑카가 있다. 이렇게 예쁘고 아담한 캠핑카가 있으면 참 좋겠다. 짐 가방을 한 가득 싣고 있는 클래식 카도 나쁘지 않다. 우리도 이미 떠나왔으면서, 낭만을 싣고 떠나는 여러 전시물에 관심이 쏠린다. 똑같은 추억은 아니지만, 그런 추억과 향수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왠지 알 것만 같았다. 옛것과 지나간 것에 대한 그리움은 누구나 갖고 있으니까.     

텍사스 주로 접어들었다. 루트66의 볼거리인 캐딜락 랜치라는 곳에 갔다. 평평한 옥수수 밭을 지나 넓은 황무지에 차를 대충 세웠다. 내려서 걸었다. 어느 때보다 바람이 세차게 분다. 멀리 캐딜락 자동차 열 대가 일렬로 땅에 박혀 있다. 자동차에는 사람들이 직접 스프레이 페인트를 뿌려 알록달록하게 채색되어 있다. 이 폐허 같은 풍경은 또 어떤 의미란 말인가. 지나가는 길에 남아있던 쇠락한 도시의 잔해들이 오버랩된다. 사람이 떠난 낡은 주유소에는 버려진 기계들이 그대로 놓여 있다. 부지런히 치우고 새로운 것으로 바꾸지 않고 고스란히 남겨둔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루트66이 지나는 길은 마치 세상과 단절된 듯, 그 길만의 감성으로 뻗어나간다. 목적지에서 잠시 이탈하거나 언제라도 되돌아오는 건 우리의 선택이다. 텍사스를 지나 뉴멕시코의 캠핑장에 도착했다. 어도비 양식으로 둥글둥글하게 이국적으로 지어진 오피스. 안으로 들어갔다. 작은 루트66 박물관처럼 사진이 꾸며져 있다. 사진 속에는 우리가 지나온 곳도 있고, 앞으로 지나올 곳도 있다. 한 곳 한 곳이 남다르게 눈에 들어왔다.     

이번 여행에서 매일 해가 진 뒤 캠핑장에 도착하기 일쑤였는데, 오랜만에 여유가 생겼다. 지호와 캠핑장 안을 돌아봤다. "엄마, 여기 왜 이게 있어?" 뉴멕시코의 상징인 빨간 고추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날씨는 아직 쌀쌀했지만, 캠핑장의 벚나무에는 꽃이 활짝 피었다. 패딩점퍼를 입은 아이를 꽃 앞에 세워 사진을 찍었다. 밤에는 화로에 불을 지폈다. 맥주를 한 병 꺼내 별을 바라봤다.

다음 날은 뉴멕시코의 주청사가 있는 산타페에 갔다. 산타페에서도 히스토릭 루트66 표지판을 반갑게 만났다. 뉴멕시코는 인디언의 문화가 강하게 남아있는 곳이다. 산타페를 둘러보고 엘모로 국립기념관에 들렀다. 700년 동안 삶의 보금자리를 지키고 살아온 인디언들의 한맺힌 역사가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함께 보존된 곳이다.


엘모로 주변에서 신기한 경험을 했다. 주니 족이라는 인디언이 모여 사는 작은 마을을 지날 때다. 곳곳에 사진을 찍으면 영혼을 빼앗아 가기 때문에 찍지 말라는 푯말이 나타났다. "기분이 이상해." 그 마을을 지나며 남편이 말했다. 집집마다 옛 방식 그대로 불을 떼는 아궁이가 보인다. 인디언 부족들은 그렇게 작은 마을에서 자신들의 전통을 유지하고 있었다.

엘모로 국립기념관

애리조나에 접어들자마자 루트66의 명소인 홀브룩에 갔다. 영화 ‘카(cars)’에 등장했던 위그앰 모텔이 있는 곳이다. ‘위그앰’은 인디언들의 원형 텐트를 말한다. 하얀색 외벽에 천장이 높고 끝이 뾰족하게 모아진 숙소가 줄지어 있다.

위그앰 모텔

“와, 여기 맥퀸이 있어. 내가 갖고 있는 차가 다 있네.”

지호는 집에서 갖고 노는 미니카를 발견했다며 기뻐했다. 위그앰 모양의 숙소 앞에는 클래식 카가 한 대씩 놓여있는데, 그 차들 중 몇몇은 카 애니메이션에 나온 자동차들처럼 익살스럽게 눈코 입이 붙어있다. 소설 '분노의 포도'가 루트66을 따라 이동하는 미국 농민과 이주노동자들의 처참한 실상을 보여줬다면, 애니메이션 '카'는 루트66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풀어낸다. 오직 1등만을 위해 스피드를 높이던 레이싱 카 맥퀸. 어느 날 잘못 길을 들어 루트66을 지나게 된다. 그곳에서 맥퀸은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희로애락을 담고 있는 느린 길의 매력들을 발견한다.  

루트66은 그런 의미였다. 성공을 위해 빠른 길만을 재촉해온 나를 되돌아보는 시간. 그런데 그러기에는 여유가 너무 부족한 일정의 연속이다. 애리조나를 벗어나 라스베이거스에 도착했을 때는 피로가 극에 달았다. 무척이나 붐비는 캠핑장에 저녁식사를 훌쩍 넘긴 시간에 도착했다. 초코와 제시카도 배가 고픈지 은근히 보챘다.  

“언제까지 이렇게 가야 돼? 하루에 대여섯 시간씩 차타고 다니니... 너무 힘든 일정이잖아.”

일정을 두고 남편과 약간의 다툼이 일어났다. 몇날며칠 달리는 차에서 생활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달리지 말고 좀 멈춰있는 여행을 하면 어땠을까? 루트66 횡단에 회의가 들었다.

       

계절이 봄에서 다시 여름으로 바뀌었다. 데스밸리에서 이틀을 보낸 뒤 캘리포니아로 접어들며 길었던 여정도 막바지를 향해 갔다. 캘리포니아에 들어와서 리바이닝 캠핑장에 묵었다. 건물 곳곳에 대장장이 마을처럼 삽이나 프라이팬, 각종 연장들을 장식품처럼 걸어놓은 모습이 특색 있다. 날씨가 좋아서 초코 제시카를 데리고 나왔다. 냥이들은 밖으로 나오니 조금은 긴장하는 모습이었다. "괜찮아." 쓰다듬었다. 모처럼 초코와 햇살을 쬐며 팍팍했던 마음이 누그러들었다. 냥이들과 언제 또 이렇게 아름다운 자연에 머물 수가 있을까.     

리바이닝 캠핑장

환상적인 모노레이크를 구경한 뒤 산길을 올라갔다. 하늘이 꾸릉꾸릉 해지며 회색빛으로 바뀌었다. 레이크 타호로 가는 길가에 눈이 하얗게 쌓였다. 다시 긴팔 옷 위에 두터운 패딩점퍼를 걸쳤다. 레이크 타호에 도착했을 때 춥고 탁한 날씨에 서둘러 내려가고 싶었는데 지호는 눈 구경을 더 하자고 졸랐다. 먼저 와있던 사람들에게 썰매를 빌려서 신나게 탔다. 캠핑카로 돌아와 추운 몸을 녹이기 위해 라면을 끓였다. 눈 덮인 설경 속에 먹은 라면 맛은 잊을 수가 없다. 뜨끈하고 칼칼했던 그 맛이 두고두고 생각난다.    

레이크 타호 가는 길

다음날 아침 드디어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해서 캠핑카를 반납할 시간이 왔다.

“그동안 고생했어.”

남편의 한 마디가 묵직하게 울렸다. 이날이 올 줄이야. 길게만 느껴졌던 보름의 시간이 순식간에 지났다. 힘들기도 했지만 지나고 보니 아쉬운 마음이 생긴다. 이렇게 장거리 여행을 할 날이 또 올까? 미국 땅을 동에서 서로, 영하의 추위부터 한 여름의 더위까지 사계절을 지나왔다. 그동안 캠핑카에서 먹고 자고,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부르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캠핑이란 별 게 아니다. 그곳에 흠뻑 빠져보내는 일. 남편은 미국에 와서 자신의 적성을 찾았다며 운전하는 내내 즐겁게 임했다.


캠핑카를 반납하고 샌프란시스코에서 노스캐롤라이나로 돌아왔지만, 사실 루트66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루트66의 종착지는 캘리포니아 산타모니카 해변에 있다. 미국에서 2년의 생활을 끝내고 한국에 돌아오기 전, 마지막으로 캘리포니아에 들렀다. 그때 산타모니카 해변에 나가 루트66의 종착지를 밟았다. 한여름의 산타모니카에는 내리쬐는 햇살 속에 많은 사람들이 해수욕을 즐기고 있었다.     

 

부서지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파라다이스 같은 해변을 천천히 걸었다. 지호는 모래사장에 글씨를 쓰며 따라왔다. 산타모니카 피어에 올라오니 그곳에 루트66의 끝을 알리는 표지판이 있다. 지난 봄 궂은 비바람과 눈발을 뚫고 이 길을 참 열심히 달려왔는데...


시작할 때만 해도 참 무모하게 느껴졌던 여행이다. 우리에게 아무 의미 없던 루트66을 따라가는 길. 목적도 기대도 없이 떠났기에 새로운 발견이 있었던 것 같다. 기대 없이 미국에 왔다가 소소한 행복을 만났던 것처럼 말이다. 반듯하게 닦인 고속도로가 아닌, 털털거리며 낡은 풍광을 바라보는 옛 길의 매력을 조금은 알게 됐다. 그 기나긴 길을 때로는 즐겁게 때로는 인내하며 달려야 했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만 추구하는 삶에서 조금은 비켜설 수 있는 용기를 얻은 것 같다.       

산타모니카

End of the trail. 우리는 루트66의 종착지에 웃으며 섰다. 처음 길을 나설 때만 해도, 나와 루트66이 무슨 상관이냐며 까칠하게 곤두세웠던 마음이 누그러졌다. 누군가에게는 낡은 주유소의 추억, 누군가에게는 눈부셨던 청춘에 대한 추억, 누군가에게는 과거와 미래를 이어주는 현재 진행형의 시간일 것이다. 우리에게는 루트66이 어떤 의미로 남을까. 그 길 끝에 서서 비로소 우리가 왜 이 여행을 떠나야 했는지 알 것 같다. 고양이들까지 함께한 우리 가족의 가장 아름다운 시간들. 언제까지고 그리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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