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종림 Aug 23. 2019

대자연을 깨우는 나바호의 아침

모뉴먼트 밸리, 엔텔로프 캐니언

여행을 다니면 저마다 스타일이 있다. 나와 남편은 아침잠이 많은 탓에 하루의 시작이 조금 늦는 편이다. 해가 떠있을 때 하나라도 더 봐야 남는 여행객으로서는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하지만 여행도 길어지면 일상이다. 억지로 다른 리듬으로 살아가기에는 무리가 있다. 우리는 늦게 움직이는 대신 석양과 별, 캠프파이어를 충분히 즐기고 다녔다. 반면에 일출을 챙겨본 적은 드물다. 여행을 다니며 일출을 제대로 목격한 최초의 여행지는 바로 나바호족의 성지라고 불리는 모뉴먼트 밸리다. 여행 계획을 짤 때부터 모뉴먼트 밸리의 일출은 꼭 봐야 하는 특별한 이벤트였다.


캠핑카를 타고 서부여행을 하던 중, 모뉴먼트 밸리를 구경하기 위해 나바호 자치구역에 발을 디뎠다. 모뉴먼트 밸리는 미국 남서부 유타 주와 애리조나 주의 경계인 미국 나바호 자치구역에 있다. 그곳은 미국 내 500여 인디언 부족 가운데 가장 큰 나바호족의 보호 구역이다. 엄밀히 말하면 미국 땅이 아니라 나바호족의 영토다. 미국에 있지만, 미국 땅이 아니라는 사실이 이방인인 우리에게는 꽤나 헷갈린다. 하지만 여권을 검사한다든지 별도의 절차가 필요가 없다. 그저 자연스럽게 이동하면 된다. 단 약간의 통행료를 지불해야 한다. 또 미국과는 다른 서머타임을 적용하기 때문에 시곗바늘을 한 칸씩 앞뒤로 조절해야 하는 작은 번거로움이 있다.


미국에 와서 처음 인디언을 접한 건 스모키 마운틴에 갔을 때다. 오는 길에 인디언 마을이라 불리는 체로키를 지나왔다. 스모키 마운틴을 따라 체로키도 단풍이 예쁘게 물들어 있었다. 체로키에 진입하는 길에 작은 개울가가 보였다. 그 옆에 인디언 깃털 장식을 머리에 쓰고 있는 할아버지가 앉아 있었다. 5달러를 내면 함께 사진을 찍을 수 있다고 한다.

"자, 여기 봐주세요. 하나 둘 셋."

지호와 함께 할아버지는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오래전 광활한 대지를 뛰어다니던 인디언이 이렇게 좁은 의자에 앉아 기념사진을 찍어주며 살아가고 있다니... 사진 속 그의 미소가 어딘지 모르게 쓸쓸해 보였다.

체로키 인디언 할아버지와 함께

마을로 들어가니 한눈에 보이는 기념품 가게들 뿐이다. 그곳에는 드림캐쳐를 비롯해 가죽이나 나무를 이용한 인디언의 공예품을 판매하고 있다. 메이드 인 차이나의 조악한 액세서리들도 진열장을 차지하고 있다. 조그만 깃털 장식이 달린 머리끈을 하나 사서 나왔다. 아름답지만 쇠락한 인디언 마을이 어딘지 모르게 헛헛하게 느껴졌다.


그랜드 캐니언과 뉴멕시코 주의 산타페에서도 인디언 마을을 만났다. 역시나 한켠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액세서리 노점들이 전부였다. 그에 비하면 수많은 관광객으로 가득 찬 나바호 구역은 인디언의 기상이 매우 강하게 남아있는 관광지다. 모뉴먼트 밸리에 가는 길에 들른 엔텔로프 캐니언 역시 애리조나에 위치해 있지만 나바호 자치구역에 속하는 곳이다. 나바호 인디언들은 그곳에서 매우 적극적으로 관광 사업을 벌이고 있었다.


엔텔로프 캐니언에 오기 전에 사진을 보며 어떤 곳일지 무척 궁금했다. 미국에서 여행을 다니며 기대되는 곳 중 하나였다. 엔텔로프 캐니언을 구경하려면 1인당 40여 달러의 값비싼 입장료를 내고 가이드 투어를 신청해야 한다. 엔텔로프 캐니언은 두 개의 지역으로 나뉜다. 위치에 따라 어퍼 캐니언과 로어 캐니언이 있다. 우리는 로어 캐니언을 돌아보기로 했다.

예약한 시간에 맞춰 나바호의 투어 오피스를 방문했다. 풀이 듬성듬성한 메마른 붉은 황무지를 걷다 보니 오피스에 다다랐다. 그 안에는 간단한 샌드위치와 스낵을 파는 매점과 기념품 가게가 함께 있다. 귀걸이, 반지 같은 소품과 그림, 인테리어 장식품 등 인디언 공예품을 팔고 있다.


매점에는 우리보다 먼저 와서 기다리는 중국인 관광객들로 바글바글했다. 테이블에 앉은 여성 단체 관광객은 화려한 스카프를 하나씩 두르고 앉아 컵라면을 먹고 있었다. 곧이어 가이드가 우리를 호명했다. 젊은 여자 가이드다. 우리와 함께 가는 일행은 스무 명쯤. 매점에서 봤던 중국인 단체 관광객이 대다수를 차지했다. “뒤에 계속해서 다른 팀이 오니까 사진을 찍느라 시간을 끌어서는 안 돼요.” 가이드는 줄을 지어 이동해야 하기 때문에, 꼭 규칙을 따라야 한다고 당부했다.

엔텔로프 로어 캐니언의 입구를 향해 다시 황무지를 걸었다. 날씨가 더워서 모자와 선글라스, 생수는 필수다. 남편은 캠핑카에서 차가운 생수를 두세 통 챙기고, 배낭에 아기띠도 넣어왔다. 가파른 계단으로 이동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캐니언 입구부터 철제 계단이 나타났다. 지호가 아빠에게 번쩍 안겨 좁은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을 내려오니 붉은 흙으로 만들어진 동굴 같은 요새가 나타났다. 사진에서 보던 환상적인 협곡 속으로 들어갔다.

"와, 진짜 포토제닉한 곳이다."

온화한 빛이 황금빛 사암의 굴곡을 타고 물결을 그린다. 엔텔로프 캐니언은 물과 바람에 의해 이뤄진 협곡이다. 지금은 물이 없이 마른 협곡처럼 보인다. 모래 바위에 비가 내려 바위틈이 벌어지고 깎였다. 그리고 바람이 불어 협곡이 다듬어졌다. 오랜 세월 이런 과정을 반복하며 지금의 엔텔로프 캐니언이 생겨났다.


사암에 새겨진 부드러운 곡선들은 시간의 흐름 같기도 하고 빛의 궤적 같기도 하다. 바람이 불고 흙이 깎여나간 흔적이 곱게 남아 있다. 마치 '사진'처럼 빛이 들어왔다가 빠져나가는 방향이 눈에 그려진다. 어떤 곳은 좁은 틈 사이로 햇볕이 비집고 들어와 또 다른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영원이 만들어낸 세월의 조각이 찰나의 빛에 의해 새로운 공간으로 창조되고 있다.

"여기가 가장 유명한 곳이에요. 저기 자세히 보면 사람의 옆얼굴이 보여요."

머리가 긴 여신의 옆모습과 같은 캐니언이 나타났다. 시간과 빛, 바람과 흙이 만들어낸 자연의 위대한 합작품이다.  

어느 각도에서 어떻게 찍든 화보 사진이 만들어졌다. 우리뿐 아니라 그곳을 관광하는 사람들은 지나가며 정신없이 셔터를 눌렀다. 프레임 속 장면은 시간을 멈춘 것 같은 환상적인 경치인데, 실제 상황은 좁은 통로에 앞뒤로 사람들이 바글바글한 시장통 같다. 정신이 하나도 없다. 그 와중에 가이드의 눈치를 보며 사진을 찍고 바삐 줄을 따라가고, 또 사진을 찍고 줄을 따라가기를 반복했다.

"지호야, 걸을 만 해? 안아줄까?"

"아니, 괜찮아. 혼자 걸을 수 있어."

사람들이 발을 디디며 지나가는 통로는 좁고 협소하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된다. 때로는 굴곡진 벽면을 물결처럼 타고 넘어가야 한다. 지호는 미로를 빠져나가듯이 그곳을 지나는 것을 꽤 즐겼다.

환상적인 북새통인 엔텔로프 캐니언을 빠져나와 모뉴먼트 밸리로 향했다. 모뉴먼트 밸리로 가는 길에 남편이 캠핑카를 세웠다.

"여기서 사진 한 장만 찍어줘."

지호와 나는 영문을 모르고 캠핑카에서 내렸다. 남편은 내게 카메라를 쥐어주고 폴짝폴짝 점프를 하기 시작했다. 도로에는 차가 한산하다. 쭉 뻗은 길 끝에 평평한 산이 역광을 받아 희미하게 보인다. 우리가 멈춘 길은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 나오는 유명한 검프 로드다. 그 영화를 좋아하는 남편은 주인공이 달리기를 멈췄던 곳에서 인증샷을 찍자고 한 것이다. 모뉴먼트 밸리는 <포레스트 검프> 뿐 아니라 수많은 서부영화에 단골로 나왔다. <백 투 더 퓨처>의 서부시대 편에도 그곳이 나왔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백 투 더 퓨처>의 광팬인 나도 요란한 인증샷을 못 찍고 지나친 게 조금은 아쉽다.

"우와, 저기 봐봐. 여기 너무 멋있다. 이런 곳이 있다니..."

모뉴먼트 밸리로 다가갈수록 대지의 기운이 더 크게 느껴졌다. 광활한 대평원 지대에 우뚝 솟은 세 개의 산이 주는 느낌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만큼 강렬하게 다가왔다. 이 산들은 록키 산맥에서 내려온 퇴적물이 쌓이다가 솟아난 곳이다. 멀리서 보면 마치 거대한 조각물처럼 그 형태가 매우 독특하다. 어떤 산은 우뚝 솟아 봉우리 모양이고, 또 어떤 산은 위가 평평하다. 장갑, 낙타, 코끼리, 마차 등 모양에 따라 다른 이름을 지녔다.

토양은 일관되게 붉다. 해가 서서히 넘어가자 대지와 바위산 사이로 더욱 붉은 빛이 스며든다. 나바호족이 이곳만큼은 지키려고 피의 전쟁을 불사한 이유를 알 것 같다. 남아있는 인디언의 정기가 신비롭게 뿜어져 나온다. 바위산에 더 가까이 다가가려면 오프로드를 달리거나 트래킹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타고 온 캠핑카로는 지날 수가 없는 길이다. 대신에 우리는 너른 캠핑장에서 홀가분하게 바라보기로 했다.

모뉴먼트 밸리의 세 바위산이 보이는 유타 주의 캠핑장에 자리를 잡았다. 대지가 워낙에 넓고 평평해서인지 이번 캠핑장은 유난히 허허벌판에 있는 느낌이다. 그 느낌이 무척 평온했다. 캠핑카를 세우고 밖으로 나왔다. 전망만큼은 역대 캠핑장 중 최고다. 조금 이른 저녁이지만 캠핑의자를 펴고 모닥불을 지폈다. 모뉴먼트 밸리를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 오늘 관광은 충분하다. 가벼운 캠핑의자에 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너른 풍경을 바라봤다. 어둠이 짙어지자 별이 빛나기 시작했다. 카메라로 장 노출을 줘서 별의 궤적을 찍었다. 프레임 한 가득 별이 들어왔다.

별과 모닥불을 한참 즐기고 잠을 청했다. 몇 시쯤 되었을까. 알람 소리가 울리기 전에 잠에서 깼다. 캠핑카의 창문에 달린 커튼을 젖혔다. "아, 지금이다." 점퍼를 걸치고 카메라를 쥐었다. 눈을 비비며 캠핑카 문을 열었다. 모뉴먼트 밸리는 아름다운 일출을 꼭 봐야 하는 명소로 유명하다. 늦잠을 잘까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일출을 볼 수 있겠다. 까맣던 세상이 조금씩 갈라진다. 대지의 실루엣이 드러나며 하늘이 본연의 푸른빛을 회복해 간다. 그 가장자리에는 아직 초승달이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다. 해와 달과 별이 동시에 떠 있는 감동적인 순간. 빛의 온기가 장엄한 모뉴먼트 밸리를 뒤덮었다.

인기척을 느낀 남편이 슬리퍼를 끌며 캠핑카 밖으로 나왔다. 둘 다 말없이 서서 해가 떠오르는 장면을 숨죽이며 지켜봤다. 검은 실루엣이 사라지고 붉은 대지가 서서히 드러난다. 각양각색의 바위산을 타고 눈부신 햇살이 퍼진다. 태고적부터 시간이 멈춘 듯한 나바호의 신성한 자연. 아주 먼 과거에서부터 저 빛의 기운을 얻어 살아온 인디언의 눈을 빌어 바라본다. 늑대가 울부짖는 밤이 지나고 동이 터오는 아침은 언제나 내 편이었다.

"이제 다음 목적지로 슬슬 가볼까?"

해가 떠오르고도 한참을 캠핑의자에 기대어 바라봤다. 한낮의 강렬한 대지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모뉴먼트 밸리의 일출은 신성한 나바호의 자연만큼이나 경이로웠다. 고요한 밤하늘과는 또 다른, 넘치는 생명력을 듬뿍 느끼며 다시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냥이들과 4000킬로미터 미국 횡단 대장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