듀랑고 Durango
“언제 또 여기에 와보겠어. 한번 왔을 때 열심히 다녀야지.”
남편은 여행 계획을 세울 때마다 최대한 많은 곳을 돌아보는 일정을 짜곤 한다. 가고 싶은 데가 너무 많아 넘친다. 하지만 덜컹거리는 캠핑카에서 하루에 몇 시간씩 이동하는 일도 생각보다 체력적으로 힘들 때가 많다. 그래서 불평을 하다가도, 막상 여행을 다니다 보면 의기투합해 욕심을 부린다.
“거기는 안 갈 거야? 여기까지 와서 그냥 지나가기 아쉬운데..."
그러다 보니 아이에게는 미안할 때가 많다. 여행지를 바삐 돌아다니며 "얼른 자", "얼른 먹어", "위험하니까 하지 마"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지호도 텐트 치고 캠핑카를 타고 다니는 여행을 좋아하지만, 사실 자연을 보며 감탄하는 건 어른이나 하는 일이다. 아이에게는 눈앞에 만질 수 있는 무언가가 훨씬 더 재미있다. 가끔씩 눈 구경을 하거나 물놀이를 할 때, 아니면 특이한 돌멩이나 나뭇가지를 만져볼 때를 빼고는 시큰둥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여행 계획을 짤 때면 아이를 위해 테마파크나 수족관, 동물원 등을 일정에 집어넣으려고 애쓴다.
그러나 광막한 중서부를 여행할 때는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아이를 위한 코스가 전혀 없다. 가끔 들르는 기념품 가게에서 인형이나 장난감을 구경하는 것으로 대신해야 했다. 옐로스톤에 가기 위한 서부여행을 할 때도 그러했다. 집 떠나온 지 일주일째, 아이뿐 아니라 나도 서서히 여독이 쌓이고 집 생각이 나기 시작했다. 그럴 즈음 콜로라도의 듀랑고에서 보낸 하루는 한여름밤의 꿈처럼 신선하게 다가왔다.
콜로라도 주의 남쪽에 위치한 듀랑고는 미국 서부개척 시대를 상징하는 도시다. 옛 서부영화에 나올법한 촌스러움도 친숙하게 다가왔다. 마을 한 편의 철로에는 기관차가 연기를 내뿜으며 기적소리를 냈다. 요즘은 보기 힘든 증기기관차다. 듀랑고는 기차의 도시로도 유명하다. 실버톤이라는 광산지역까지 가는 증기기관차는 그곳의 명물이다. 1880년대 만들어진 철도를 지나간다. 아직도 석탄을 때서 나아간다니 움직이는 유물이나 다름없다.
듀랑고의 캠핑장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아침 일찍 기차역에 나섰다.
"오늘 실버톤으로 가는 기차를 한번 타볼까? 지호도 좋아할 거야."
기차역에 도착해 남편이 차표를 알아보러 가는 사이 지호와 나는 플랫폼에 나가서 떠나는 기차를 구경하고 있었다. 기차가 사람들을 싣고 떠나는 모습을 보니 괜스레 마음이 들떴다.
“엄마, 우리도 이 기차 탈 거야?”
기차를 좋아하는 아이는 꼭 한번 타보고 싶은 눈치다. 그때 남편이 멀리서 기차표를 흔들며 뛰어왔다.
“다음에 출발하는 기차를 바로 타자. 공룡마을에 가는 기차야.”
"공룡 기차??"
당초 우리가 타려고 했던 실버톤행 기차는 이미 떠났다. 대신에 특별한 기차가 곧 출발하는데 바로 공룡마을로 가는 기차다. 마침 우리가 방문한 6월에만 한시적으로 열리는 이벤트다. 산 위에 꾸며놓은 작은 테마파크에서 공룡을 주제로 다양한 놀이를 할 수 있다. 지호의 눈동자가 동그래졌다가 이내 반달이 되었다.
"와 신난다!"
평소에 공룡을 무척이나 좋아하던 아이다. 신기하게도 지호뿐만 아니라 아이들은 대부분 공룡을 좋아한다. 인류에게 공룡을 친숙하게 느끼는 유전자라도 있던가. 그런 아이들이 엄마 아빠 손을 붙잡고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기차가 슬슬 도착할 시간이다.
"아빠, 기차타고 공룡마을에 가는 거야?"
"응. 오늘은 거기 가서 신나게 놀자."
기다란 기차가 플랫폼에 멈춰 섰다. 나무로 만들어진 노란색 창틀이 왠지 정겹다. 유리가 없이 뻥 뚫려 있고 가장자리는 나뭇잎으로 장식되어 있다. 사람들이 줄을 서서 차례로 올라탔다. 기차 안은 낡았지만 익숙한 듯 편했다. 기차에 오르는 순간부터 이미 공룡 기차는 설정에 들어갔다. 차장 아저씨와 직원들이 아이들을 공룡의 세계로 안내했다. 기차에 올라타 긴 좌석을 하나 차지해 앉았다. 경적을 울리며 기차가 서서히 움직였다.
공룡 마을에 도착하면 세 시간 후에야 다시 내려오는 기차를 탈 수 있다고 한다. 괜히 땡볕에 고생하는 건 아닌지, 기차 삯만 아깝게 날리는 건 아닌지, 기대와 함께 불안감도 연기처럼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하지만 그런 걱정도 잠시, 뻥 뚫린 창밖으로 불어오는 바람이 걱정스러운 마음을 시원하게 날려버렸다.
기차는 산후안 국유림을 배경으로 애니마스강을 따라 달란다. 눈앞에 듀랑고의 일상이 그림처럼 펼쳐졌다. 자동차 뒷자리에 앉아서 보던 창밖과는 또 다르다. 울창한 나무 아래 집들이 보인다. 자연을 즐기러 밖으로 나온 사람들이 제법 많다. ‘컬러풀 콜로라도’라는 슬로건답게 콜로라도의 활기차고 다채로운 풍경이 영화처럼 지나갔다.
뿌뿌~ 기차가 지나가며 기적을 울렸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저마다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강에서 수영을 하는 사람, 숲 속 계곡에서 래프팅을 하는 이들도 손을 흔들어줬다. 산에는 한가로이 자리잡은 캠핑족들이 인사를 건넨다. 그때마다 지호도 창밖을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공룡마을의 보안관은 아이들에게 도장을 다 받아 오면 배지를 주겠다고 미션지를 나눠졌다.
"엄마, 언제 도착해? 응? 언제 도착해?"
지호의 마음은 이미 공룡마을에 가 있는 듯했다.
기차를 타고 사십 여분쯤 달려왔을까?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다. 마지막에 산길을 한참 올라오니 평평한 지대가 나타났다. 그곳에는 구역별로 공룡을 테마로 아이들이 놀만한 거리가 가득 있다. 한쪽에는 천막을 쳐놓고 납작한 돌에 공룡 그림을 그려 공룡 화석을 만들어보도록 했다. 또 다른 코너에는 모래사장에서 공룡 뼈를 발굴할 수 있다. 미니골프 게임도 있고, 바람이 가득 차있는 에어바운스 미끄럼틀도 있었다.
공룡인형 옷을 입은 사람들이 다가오면 아이들이 몰려가 구경하기 바빴다. 나와 남편은 아이를 열심히 쫓아다니며 미션지에 도장을 받아줬다. 다양한 놀이 속에 야생동물을 구경하는 코너는 이색적이었다. 지호가 거북이를 보고 달려갔다. 딱딱한 거북이등껍질을 신기하게 만지작거리던 아이에게 공룡마을 직원이 다가왔다. 귀에 까만색 피어싱을 하고 있는 청년은 흑마술이라도 부릴 듯이 목에 뱀을 두르고 있다. 지호는 입가에 웃음을 머금은 채 뱀의 미끈한 비늘을 겁도 없이 쓰다듬었다.
나무 아래 그늘에서는 페이스페인팅을 해주고 있었다. 히스패닉 부부다. 남편은 페이스페인팅을 해주고, 아내는 갓난아이를 돌보고 있다. 흰 피부의 금발머리 여자아이는 핑크색 티라노사우르스로 막 페인팅을 마쳤다. 지호는 스테고사우루스를 그리고 싶다고 했다. 초록 물감으로 바탕을 칠하고, 검은색과 흰색으로 뿔과 음영을 만들었다. 마지막에 반짝이까지 뿌리니 귀여운 아기 스테고로 변신! 아이는 신이 나서 손톱을 모으며 공룡 흉내를 냈다.
지호가 모래사장에서 공룡 뼈를 열심히 발굴하는 동안 남편은 차가운 맥주를 두 병 갖고 왔다. 깜찍한 듀랑고 기차가 그려져 있는 페일 에일이다. 듀랑고에 수제 맥주가 많은데 그중 한 가지를 맛보게 됐다. 쨍한 햇볕에 아이를 따라다니며 서서히 지쳐갈 무렵, 시원한 맥주 한 모금에 땀을 식혔다. 이제 슬슬 되돌아갈 시간이다. 아이들은 돌아갈 기차를 기다리며 공룡들과 신나는 댄스파티를 벌였다. 지호도 무리에 뒤섞여 폴짝거렸다. 이윽고 기차가 왔다. 공룡마을에 남은 직원들은 기차가 떠날 때까지 손을 흔들어 배웅했다.
기차에서 지호는 원하던 보안관 배지를 받고 기세 등등해졌다. 오랜 여정 끝에 아이에게도 기억에 남는 하루가 생긴 것이다. 노을이 예쁘게 물들어가는 하늘을 보며 생각했다. 오늘 하루가 뜻밖에 주어진 선물 같다고... 예정에 없던 공룡 기차를 타서 아이도 우리도 달콤한 축제를 즐겼다.
놀이기구로 가득찬 대형 테마파크가 아니어도 좋다. 털털거리는 낡은 기차와 정겨운 웃음만으로도 참 행복했던 순간들. 그날의 사진을 넘겨보면 언제라도 얼굴에 웃음이 씨익 그려진다. 지금의 일상에서 보너스 같은 하루가 또 주어진다면 무엇을 할까? 아마 또 캠핑 짐을 싸서 어디론가 떠나지 않을까. 그곳에서 또 어떤 재미난 추억을 만들지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