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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림 Sep 14. 2019

회오리 지나 무지개 너머 ‘오즈’의 세계

캔자스 Kansas

“어 어, 핸들이 너무 흔들리네.”

운전대를 붙잡은 남편이 말했다. 두 손으로 꽉 잡고 있는데도 흔들림이 심하다. 큰 트럭이 지나갈 때마다 캠핑카가 휘청거렸다. 불안한 마음에 창밖을 보니 나무들이 거친 바람에 헤드뱅잉을 하고 있다. 3월에서 4월로 넘어가는 즈음, 우리는 시카고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미국을 관통하는 루트66을 달리고 있었다. 초록의 동부, 붉은 토양의 서부의 쨍한 날씨들과 달리, 중부지역으로 들어가니 하늘이 흐릿하다 못해 날씨가 요동쳤다. 미주리 주에서는 펑펑 눈이 내리더니 캔자스 주에 접어들며 바람이 더욱 거세졌다.


이게 바로 도로시의 집을 날려버린 회오리란 말인가? 캔자스 대평원에서 발생하는 돌풍은 무섭게 거셌다. 오즈의 마법사 이야기가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오즈의 마법사는 프랭크 바움의 판타지 동화가 원작이다. 캔자스 농장에 살던 소녀 도로시의 마을에 거센 회오리바람이 불어온다. 집이 통째로 날아가 신비한 마법의 세계 오즈에 떨어진다. 그곳에서 도로시는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 흥미로운 모험을 한다. 아이가 커가며 한 번씩 '오즈의 마법사' 동화책을 읽어주니 아이도 꽤 흥미를 보였다.


미국에 와서 지도에서 캔자스 주가 눈에 띌 때마다, 오즈의 마법사가 떠올랐지만, 실제로 그곳에 가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기회는 우연히 만들어졌다. 남편과 장거리 여행 계획을 의논하다가 캔자스 주가 물망에 올랐다. 하지만 찾아봐도 캔자스 여행기는 흔하지 않다. 캔자스는 미국의 중부에 위치해 있어 자동차로 방문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딱히 유명한 여행지도 없다. 캔자스 주에 살지 않는 이상, 일부러 허허벌판에 위치한 시골을 찾아가는 ‘미친 짓’을 하는 사람은 드물다는 뜻이다.


하지만 무모하기에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우리는 루트 66 횡단 여정에 캔자스를 포함시켰다. 오즈의 마법사의 배경이 된 캔자스를 실제로 가볼 수 있다니 실감이 안 났다. ESL 수업시간에 오즈의 마법사 문고판 소설책을 빌려왔다.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며칠 후 방문할 캔자스를 떠올렸다. 그렇게 D-데이가 다가왔다.


눈부신 초록색 숲과 파란 하늘이 일상을 지배했던 산뜻한 노스캐롤라이나를 지나 중부지역으로 접어드니 모든 게 잿빛이다. 기온 또한 떨어져서 영하에 달했다. 반팔부터 패딩까지 사계절 옷을 전부 챙겨 오긴 했지만, 정말 패딩만 입고 다닐 줄은 몰랐다. 즐거운 캠핑카 여행이 어딘지 모르게 쓸쓸하고 우울해졌다. 그런 캔자스 주의 전체적인 느낌을 창밖의 갈대숲이 인상적으로 바꾸어놓았다.

캔자스 주와 오클라호마 주는 톨그래스라는 일종의 키 큰 갈대 보호구역이 있다. 톨그래스 서식지에는 수많은 야생동물이 함께 살아간다. 환경오염과 화재 등으로  톨그래스가 사라지고 남아 있는 지역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캔자스 톨그래스 국립공원은 휑한 평원에 농장 건물 같은 게 세워져 있다. 하늘도 땅도 뿌옇다. 멀리 누런 갈대들이 보이는 듯하다. 갈대가 휘어지기 적당하게 바람도 불어온다. 싸늘한 날씨에 옷자락을 모았다.


갈대숲을 지나 돌풍을 뚫고 도착한 캔자스는 마치 태풍 전야처럼 평온했다. 시원시원하게 뚫린 길과 큼지막한 건물들은 고요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오즈의 마법사 박물관’. 캔자스에서 관광할 만한 대표적인 명소다. 외벽에는 노란 바탕에 아기자기한 오즈의 마법사 그림이 크게 그려져 있다. 박물관 안을 들어가니, 나이가 지긋한 백인 여성 직원이 안내를 한다. 착한 동쪽 마녀가 떠오르는 인상이다. ”이곳에는 2000가지의 수집품들이 전시돼 있어요. 이제 여러분은 잠시 후에 오즈의 마법사 속 세계로 들어갈 거예요. 하나 둘 셋!” 이윽고 문이 열렸다.

안내하는 직원에게서 느껴지는 깐깐한 자신감만큼이나 박물관 내부는 깔끔했고 보존이 잘 되어 있다. 퀴퀴한 읍내 박물관이 아닌, 아기자기한 소품들의 천국이다. 길을 따라가다 보면 등장인물이 하나씩 나타나며 다양한 인형, 그림, 소품, 영화 자료 등 오즈의 마법사에 대한 모든 역사가 펼쳐진다.

제일 먼저 나타난 허수아비의 지푸라기가 정겹게 다가왔다. 헝겊으로 만든 인형, 돌로 만든 인형, 큰 인형, 작은 인형 등 여러 가지 모습으로 만들어졌다. 사자도 두려움 많은 사자, 용맹한 사자, 귀여운 사자 등 하나의 캐릭터에 수많은 해석이 있다. 이렇게 다양한 모습이 있었다니! 캐릭터를 하나씩 지날 때마다 도로시가 새로운 친구를 만나가는 여정을 그대로 따라가는 느낌이 들었다.


지호는 매끈한 양철 나무꾼을 좋아했다. 똑딱거리는 빨간 심장을 달고 있는 그의 부리부리한 눈이 가장 많은 이야기를 하는 듯했다. 책상 서랍 속에 자고 있을 양철 나무꾼 인형이 생각났다. 지호와 플리마켓에 갔다가 1달러를 주고 사온 인형이다. 주말마다 열리는 플리마켓에 가면 앤틱 가구부터 장난감, 그릇, 옷, 음반, 각종 소품 등 안 파는 게 없다. 한 번씩 지호와 함께 가서 1달러 지폐 몇 장으로 쓸만한 중고물품을 건져오곤 했다. 양철 나무꾼 인형은 아이가 좋아하는 장난감 코너에서 봤다. 은회색 양철 속에 큰 눈을 꿈뻑거리며 모든 감정을 호소하는 모습에 왠지 모르게 눈길이 갔다.

또 한 코너를 지나가니 흑백으로 영화 '오즈의 마법사' 메이킹 필름이 나오고 있다. 흑백 영화가 컬러 영화로 바뀌면서 어릴 적 인상 깊게 본 도로시의 빨간 구두가 탄생했다. 이곳 박물관에 와서야 알게 된 사실이 있다. 그 구두가 본래 서쪽마녀의 구두였으며, 서쪽마녀가 도로시의 집에 깔려서 구두만 남기고 자취를 감춘 뒤 남은 물건이라는 사실을…….

 

전 세계에 출간된 오즈의 마법사 책을 모아놓은 코너에서 반가운 한국어 책도 발견했다. 테마파크에 온 것처럼 동심의 세계로 돌아갔던 박물관 여정도 막바지에 이르렀다. 도로시가 친구들과 함께 손을 잡고 무지개를 향해 걸어가는 뒷모습이 그려진 커다란 퀼트 작품을 보며 문을 닫고 나왔다.  

박물관 밖은 아직도 쌀쌀한 바람이 분다. 박물관을 찾아가는 길에 김이 모락모락 나던 도넛 가게가 생각나서 가봤다. 하지만 그새 문이 닫혔다. 아쉬운 마음에 바로 옆 드럭스토어에 갔다.

"혹시 옆에 도넛 가게는 벌써 문을 닫았나요?"

"네. 이곳은 흐리거나 바람이 부는 궂은 날에는 가게들도 일찍 문을 닫고 들어가곤 해요."

캔자스다운 라이프스타일이다.  

캠핑카로 돌아와서 아이는 오즈의 마법사에 대한 그림일기를 그렸다. 모든 친구들이 자신의 꿈을 찾아가는 과정을 아이도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하는 것 같다. 나는 유튜브를 찾아 흑백영화 속 도로시가 부르는 '오버 더 레인보우'를 들려줬다.

 “Somewhere over the rainbow~"

"지호야, 무지개 너머에 뭐가 있을까?”

지호의 일기

바람이 좀처럼 잦아들지 않는 캔자스를 빠져나가며 나도 모르게 계속 노래를 흥얼거렸다. 익숙한 멜로디는 언제라도 우리를 그때 그곳으로 안내하는 마법을 부린다. '오버 더 레인보우'를 들으면 거센 회오리바람을 맞으며 위태롭게 미국 한가운데를 관통하던 순간으로 되돌아간다. 아름다운 기억은 도로시의 빨간 구두를 신고, 또다시 새로운 세계로 우리를 데려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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