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틀랜드 Portland
"스타우트 두 잔 주세요.”
'본드 브라더스'가 적힌 티셔츠를 입은 직원이 무심하게 신용카드를 건네받는다. 와인잔처럼 동그랗고 밑둥이 짧은 유리잔을 두 개 꺼낸다. 탭을 꺾으면 신선한 맥주가 부글부글 거품을 일으키며 콸콸 쏟아져 나온다. 가득 채워진 맥주는 맨 위에 1센티미터의 적당한 거품 층 아래 까만 어둠을 머금고 있다. 그렇게 짙은 흑맥주는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다. 오래전 흑백사진 작업을 했던 암실이 떠오른다. 한줄기 빛도 허용하지 않던 검은 암연처럼 깊고 진한 맛.
“오늘 저녁때 한번 가볼까?”
오후에 아이를 프리스쿨에서 데리고 온 뒤 앞뜰 잔디에 물을 뿌리며 남편이 말했다. 미국에서 살면서 가장 즐거운 날은 브루어리에 가는 날이었다. 집에서 20여 분 거리로 우연히 본드 브라더스라는 브루어리를 발견했다. 그곳에 가면 우리 동네에서는 드물게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널찍한 홀과 야외 테이블을 여럿 두고 있지만, 갈 때마다 그 넓은 공간이 사람으로 꽉 찬다. 저녁 시간이 지나서 가면 자리가 없다.
그곳에서는 특이하게도 요일을 정해놓고 마라톤이나 요가를 즐기고 맥주를 한잔 마시는 이벤트를 연다. 맥주와 요가라니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만남이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운동복과 핫팬츠를 입고 땀 흘려 뛰고 난 뒤 멋지게 맥주 한잔을 즐긴다.
본드 브라더스에 가면 무엇보다 내가 좋아하는 흑맥주가 맛있어서 좋고, 또 사람들과 그들의 삶을 엿볼 수 있어 좋았다. 커다란 개를 끌고 자유롭게 서서 맥주를 마시는 이들 속에 함께 술잔을 기울이고 있노라면 잠시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햇빛이 비치는 야외에 자리를 잡으면 지호는 브루어리 안에 쌓여있는 보드게임을 테이블에 펼쳐놓고 놀았다.
두 번 방문했던 노스캐롤라이나의 샬럿에도 즐겨 찾는 브루어리가 있었다. 샬럿은 노스캐롤라이나의 금융기관이 모여 있는 도시다. 고층빌딩이 즐비하고 일하는 젊은이들이 많은 도심이다. 그곳에 브루어리가 성행해 거짓말 안 하고, 한 블록마다 하나씩 브루어리가 자리 잡고 있다. 그만큼 사람들이 맥주를 만들고 또 즐기는 게 신기할 정도다.
우리가 갔던 곳은 야외에 넓은 인조잔디밭을 끼고 피크닉 테이블이 있는 노다 브루어리다. 샬럿은 독특하게도 앰버 맥주가 대세다. 흑맥주를 좋아하는 우리도 샬럿에서는 붉은 호박색 엠버를 마셨다. 떫고 스모키 한 향이 독특한 맛을 낸다. 나무로 짜인 안락의자에 앉아 파란 하늘을 바라보며 엠버 맥주를 마시는 동안 지호는 잔디밭을 뛰어다니며 놀았다. 볕좋은 따뜻한 오후, 아이들을 데려와서 잔디밭에 놀게 하고 부모는 맥주 한잔을 즐기는 일상이 매우 자연스러운 곳이다.
미국 각지로 여행을 다니면서 유명한 브루어리가 있으면 한 번씩 찾아갔다. 맥주의 맛과 종류가 이루 말할 수 없이 다양한 미국에서 브루어리를 찾아다니는 건 또 하나의 재미있는 여행이다. 늘 여행 일정을 빡빡하게 잡는 남편도 매력적인 로컬 브루어리를 가기 위한 시간은 꼭 빼놓곤 했다.
뉴멕시코의 앨버커키에 있는 캔틴 브루어리는 인상 깊었던 곳 중 하나다. 앨버커키는 브루어리가 많은 지역이다. 여러 브루어리 중에 가장 가까운 한 곳을 골랐는데 맥주 맛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캔 맥주를 구입하겠다고 하니 직접 캔에 넣어 포장해줬다. 우락부락해 보이는 청년이 꼼꼼히 캔 맥주를 포장하는 동안, 사장님이 서비스로 지호에게 무알콜 음료를 따라줬다. 지호는 조그만 잔을 들고 깔깔깔 웃었다.
서부에서는 오레건 주의 포틀랜드 맥주가 궁금했다. 포틀랜드는 워낙에 맥주와 커피로 유명한 곳이다. 맥주와 커피를 직접 양조하는 크고 작은 브루어리와 카페가 무척 많다. 연말을 앞두고 시애틀부터 샌프란시스코까지 북에서 남으로 이동하는 여정에 포틀랜드를 지났다. 커피광인 남편은 카페를 포기하고 내가 좋아하는 맥주를 맛볼 수 있는 일정을 마련했다.
어둑어둑한 저녁에 포틀랜드 시내에 도착했다. 투명한 유리창으로 내부가 훤히 비치는 현대식 건물이 보인다. 노스캐롤라이나에는 없는 유명 의류 브랜드의 상점이다. 차를 주차장 건물에 세워놓고 밖으로 나왔다. 큼지막한 건물과 넓은 도로. 몇 발짝 안 내디뎠는데 대도시의 느낌이 물씬 느껴졌다.
우리가 포틀랜드에서 찾아간 곳은 데슈츠 브루어리. 전국 마트에 맥주를 납품할 정도로 규모가 큰 브루어리다. 브루어리 안으로 들어가니 넓은 공간을 가득 메운 사람들의 웅성웅성하는 이야기 소리가 들린다. 창가 쪽 테이블에 앉아 스타우트를 주문했다. 메뉴판을 보니 '포크윙'이라는 메뉴가 눈에 띈다.
“돼지고기를 버팔로윙처럼 구운 요리죠. 맛있을 거예요.”
메뉴를 추천하던 직원이 곧 포크윙이 담긴 접시를 하나 들고 왔다. 뼈에 붙어있는 돼지고기가 구워지며 짭조름한 소스를 만나 감칠맛이 깊다.
"닭날개 윙보다 맛이 훨씬 좋은데?"
강한 맥주와 궁합이 딱 맞다. 데슈츠의 스타우트를 다시 한 모금 마셨다. 창밖을 바라보니 거리의 환풍구에서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난다.
포틀랜드의 흑맥주를 마시며 오레건의 거친 대자연의 풍경이 머릿속에서 재생됐다. 오레건에 들어와 에콜라 주립공원에 가던 길, 뾰족한 침엽수로 우거진 숲을 지났다. 마치 영화 트와일라잇의 뱀파이어라도 나올 것만 같은 숲이다. 언덕배기에 올라가니 바다가 나타났다. 거친 파도가 이는 잿빛의 바다는 날 것 그대로다. 캐논 비치에서 바라본 태평양 바다도 태고의 망망함을 지니고 있었다. 지호는 광야에 서있는 나무 한그루처럼 바람에 몹시 춥다며 주머니에 양 손을 찔러 넣었다.
캐논 비치에서 나와서 다음 여정으로 이동하는 길에 실제 데슈츠 강이 흐르는 거대한 산맥을 봤다. 하늘을 찌를 듯한 높은 산맥의 위용이 구름인지 안개인지 모를 신비로움에 감싸여 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데슈츠 맥주 라벨에 그려진 그림처럼 깊게 굴곡진 산맥이 드러났다. 웅장한 산맥의 여운이 묵직하게 밀려오는 그 맛. 데슈츠의 스타우트는 그렇게 거칠지만 세련된 맛으로 기억에 남는다.
포틀랜드와 가까운 유진이라는 도시에도 유명한 맥주가 있어서 찾아갔다. 포틀랜드 도심에서 2시간 남짓 떨어진 유진은 오레건 주립대학이 위치한 대학 도시다. 그곳의 닌카시 브루어리는 무려 ‘우주 맥주’라는 술을 팔고 있다. 우주 맥주가 된 유래는 이러하다. 수년 전 닌카시 브루어리가 효모를 채운 병을 로켓에 실어 하늘 위 120km 고도에 올려보냈다. 그렇게 수분 간 무중력 상태를 겪고 돌아온 효모로 맥주를 빚은 게 우주맥주가 되었다. 물론 당시의 효모가 지금까지 남아있지 않지만, 우주 맥주라는 별칭은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닌카시 브루어리가 있는 동네는 유난히 어두침침했다. 밤 아홉시가 조금 지난 시간이었는데도 밤길을 걷기가 조심스러웠다. 가게 안은 생각보다 작고 아담했다. 삼삼오오 맥주를 마시고 있는데, 그들의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분위기가 음산(?)했다. 어떤 이는 괴상한 피어싱을 하고, 어떤 이는 곱슬곱슬한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채 다녔다. 밤늦은 시간에 아이를 데리고 맥주를 마시러 온 아시안계 이방인도 그들에게 낯설어 보이긴 마찬가지였겠지만.
맥주를 두 잔 주문하고 테이블에 앉았다.
"점퍼가 무척 멋있네요."
옆에서 서서 맥주를 마시던 한 남자가 남편에게 불쑥 말을 걸었다. 긴장이 조금 풀렸을까? 지호는 그곳에서 만든 맥주들의 브랜드가 적힌 엽서를 가지고 카드놀이에 푹 빠졌다.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우주로 날아갈 것 같은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곳 브루어리의 독특한 분위기 때문인지 유난히 시원하게 느껴졌다.
유진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날에는 백두산 천지 같은 분화구 호수인 크레이터 레이크로 향했다. 올라가는 길에 눈이 많이 쌓여 있어 스노체인을 준비했다. 국립공원 입구에 다다르자 눈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비지터센터는 지붕까지 눈이 차올랐다. 호수를 보기 위해 차에서 내려 눈길을 걸었다. 무릎까지 푹푹 빠진다. 하얀 눈밭 위에 올라 스키화를 신고 트래킹을 준비하는 사람들도 많다. 정상에 오르자 파란 호수가 나타났다.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짙고 깊은 푸른색. 눈 덮인 산이 은은하게 투영되어 보석처럼 영롱하게 빛났다.
포틀랜드 여행을 마치고 다시 본드 브라더스에서 한 번씩 맥주를 즐기는 일상으로 돌아왔다. 한 겨울에도 햇볕이 좋은 날이면 브루어리는 맥주를 즐기는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내가 좋아하는 스타우트 외에도 금빛 라거와 시큼한 밀맥주를 즐기는 사람도 많다. 새로운 여행지에서 만난 맥주들도 저마다 독특한 매력으로 다가왔다. 말로만 듣던 포틀랜드의 맥주에는 도시의 세련된 느낌과 오레건 주의 거친 자연이 모두 담겨 있었다. 내가 스타우트를 좋아하는 이유는 추운 겨울에 제 맛을 내기 때문이다. 쌀쌀한 날씨에 즐기는 한잔의 흑맥주는 청정한 겨울을 느끼게 해주는 매력이 있다. 추운 겨울 가장 쓰고 가장 달콤하게 살아나는 그 맛을 여전히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