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속에 그리고 풍성하게 매체인간을 설명하는 글
후설의 조교이기도 했던, 가톨릭 성녀
에디트 슈타인의 <내적 침묵으로 향하는 길>에 따르면,
각 개인은 나 자신을 알아야 한다고, 자신을 아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이는 나와의 소통에서 내가 일방적으로 나의 배경자아(김주환, 내면소통)에게 말을 거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배경자아가 나에게 말을 거는 것을 헤아려야 한다는 지점을 상기하게 한다.
나의 생각은 나의 독백이 아니라는 것이다.
에디트 슈타인이 자신을 알아야 한다고 했던 배경에는 영원하신 분과의 관계를 마련하기 위함이라 하였다.
이는 나 자신과의 소통이 깊숙이 이루어지는 사람은 저절로 절대자와의 소통에 연결됨을 의미한다.
이는 다시,
개인의 무의식과 집단 무의식으로 대비할 수 있다.
집단 무의식은 모든 이들이 접속할 수 있는 뿌리이며,
개인 무의식은 개성이라고 할 수 있다.
에디트 슈타인 역시 개성을 신성불가침한 것이라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절대자(신, 집단무의식 등으로 표현)가 개인에게 자유를 프로그래밍했기 때문이다.
절대자가 자신에게 향할 수 있도록 모든 존재들에게 프로그래밍한 것과 더불어
모든 존재들이 절대자 자신에게 향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를 준 것 역시 이 개성의 문제와 연결된다.
(이는 매체인간이 내용으로 채워져 있는 것이 아닌, 내용이 비워져 있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개성은 개개인의 인식과 감정, 의식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개성은 개개인 각자의 감각이 개별적이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납득이 가능하다.
모든 개인은 같은 사건을 보고 있는다 하더라도, 같은 사건이 아니다.
개별적인 눈과 피부라는 경계는 자유롭기 때문이다.
나와 살을 맞대고 있는 사람과 동일한 사건을 바라본다 할지라도
우리는 다르게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눈의 높이가 다르고, 방향이 다르다.
하물며 눈이 이러한데, 보다 더 복잡한 감각의 차이를 미분한다면, 그 차이는 엄청난 것이 된다.
에디트 슈타인의 글은 짧지만, 강력하다.
통찰력으로 압축된 글을 풀어내기에 나의 조급함이 크다.
절대자와의 연결은 내안의 나를 깊숙이 연결하면서 가능해진다.
나와 타인은 절대자의 프로그래밍으로 인해 연결되어 있다.
내가 타인을 절대자, 신으로 대해야 하는 이유이다.
절제된 언어 속에 풍요로운 침묵이 있고,
고요한 침묵 속에 자유가 충만하다.
에디트 슈타인은 인간 존재의 의미는 그분에게서, 하늘과 땅, 하느님과 창조물이 결합하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는 매체인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