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이라는 말의 무게
회식 자리였다.
서하는 맥주잔을 들고 웃고 있었다.
옆자리 팀장이 말했다.
“서하 과장이 진짜 집에서는 가장이지 뭐. 남편분은 아직도…?”
서하는 잔을 비우고, 말없이 웃었다.
말끝을 흐리지 않으면
사람들이 불편해하니까.
“요즘은 그런 부부도 많잖아요.”
다른 누군가가 덧붙였다.
그 말에 동의하는 듯한 고개들.
하지만 말 없는 고개엔
여전히 기준이 숨겨져 있었다.
그날 밤,
서하는 조용히 현관문을 열었다.
안에는 낮은 조명이 켜져 있었고,
강재는 식탁에 앉아 아이의 그림책을 정리하고 있었다.
식탁 한쪽에는 오늘 쓴 가계부가 펴져 있었다.
우유 값, 공과금 납부, 아이 물티슈.
붉은 펜으로 계산된 숫자들이 조용히 칸을 채우고 있었다.
서하는 코트를 벗으며 말했다.
“팀장님이 나더러 가장이래.”
강재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럴 수도 있지.”
서하는 말없이 가계부를 들여다봤다.
그 안엔 작은 지출 하나까지 빠짐없이 적혀 있었다.
자신조차 알지 못했던 정기구독 금액도 있었다.
잠든 아이의 방에 불이 꺼지고
두 사람은 거실에 남았다.
“나는…”
서하가 말했다.
“가장이라는 단어, 별로 좋아하지 않아.”
강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래.
누가 책임지는 거 말고,
서로 책임지는 거면 좋겠어.”
누가 가장이냐는 질문 앞에서,
서하는 생각했다.
가장은
가장 오래 깨어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가장은
작은 무게를 끝까지 들어주는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그렇다면,
지금 이 집에서 가장은
이미 강재였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서로 묻지 않았다.
육아만 할거냐고,
직장은 알아보지 않을거냐고.
내가 이대로 집에 있어도 괜찮냐고.
말하지 않아도 알게 되는 종류의 신뢰.
그건 매일의 시간 속에서,
묵묵히 쌓여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