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부로는 계산되지 않는 감정들
밤이었다.
식탁 위엔 펼쳐진 가계부 한 권.
줄이 그어진 숫자들 사이로
강재의 메모가 조용히 박혀 있었다.
'우유값 400원 인상.
고은이 생일,학원 비용 적립 중.'
서하는 퇴근 후, 그 페이지를 천천히 넘겼다.
숫자는 늘 정확했고,
그 아래 적힌 문장은 늘 담백했다.
그녀는 늘 생각했었다.
돈보다 중요한 건 마음이라고.
하지만 어느새..
돈이 부족하면
그 마음의 힘이 약해진다는 것을
오래 전부터 느끼고 있었다.
강재와 마주앉은 저녁-
식탁 맞은편,
강재가 물컵을 들었다.
서하가 물었다.
"우리 둘 다,
너무 의무만 다하고 있는 거 아닐까?"
강재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
서하는 강재가 말하지 않아도
그의 무게를 알것 같았다.
그러면서
우리가 한 선택이
강재와 자신을 위해
과연 옳은 것인지
문득 의심하게 되는 날이 종종 있었다.
점심시간 회사내에서 전업주부들을 부러워하는 동기들의 대화.
어린이집 차량 승차장에 삼삼오오 모여서 아이들을 보내고 나누는 차 한잔의 여유.
회식하고 돌아온 남편을 위해 타주는 따뜻한 꿀물 한잔
퇴근하는 남편을 기다리며 장보는 동네 주부들
남들에겐 평범하고 당연한 것들이,
서하에겐 경험조차 꿈꿀수 없는 사실이라는 것에
서하는 순간순간 미세하게 흔들리고 무너진다.
그녀는 독립적인 사람이라 믿었지만,
그 믿음조차
때로는 주변의 상황과 모습,말들에 갉아먹힌다.
퇴근길 버스 안에서
서하는 가계부 앱을 열었다.
대출이자. 교육비. 생활비..
눈앞엔 숫자들이 깔려 있었고,
그 아래에는 말로 적을 수 없는 감정이 내려앉아 있었다.
이 숫자들에 단 한 달 만이라도 치이지 않고 살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그러다,
그녀는 생각했다.
지금은 과도기니까.
나중에 우리 아이가 자라
여자도 일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시대가 오면
이 모든 것은 지나가겠지.
그 사회를 위해
내가 지금 견디는 거라면,
지키자.
누구든,
능력이 있다면
그걸 펼 수 있는 구조와 제도.
그리고 그 구조 안에서
누구도 색안경을 쓰지 않는 사회.
그 사회 안에서 서로 인정하고 배려하는
사회구성원이 함께 하는 사회.
그녀는
그 사회의 초입 어딘가에 서 있다고 믿고 있다.
지금은 그 자리를
조용히 버티고 있을 뿐이었다.
식탁 위 불이 꺼지고
두 사람은 아이 방으로 향했다.
작은 숨소리 사이로
하루의 감정은 조용히 정리되고 있었다.
말은 없었다.
그러나 그날,
서하의 마음은 조용히
다시 중심을 잡았다.
또 흔들리겠지만,
최소한 오늘은 또 다시 이겨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