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친 하루 끝,살아 있는 집
밤 8시를 조금 넘긴 시각.
서하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구두를 벗어 들었다.
발이 저렸다.
오늘도, 걷고, 멈추고, 판단하고,
웃고, 버티고, 침묵한 하루였다.
현관문을 열자
집 안은 따뜻했다.
주방 쪽에서 달그락 소리.
방 안에선 희미한 아이 목소리.
거실엔 불이 켜져 있었다.
서하는 무거운 가방을 내려놓았다.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숨을 한번 내쉬었다.
강재는 앞치마를 두른 채 국을 데우고 있었다.
아이의 분홍 양말이 식탁 위에 널려 있었고,
고은이는 색칠 공부를 하다 졸았는지
식탁에 고개를 푹 묻고 있었다.
서하는 한 발짝 멈췄다.
그 장면이, 이상하게 오래 마음에 머물렀다.
“왔어?”
강재가 조용히 말했다.
그 말이
오늘 들은 수많은 말 중
가장 필요한 말이었다.
서하는 옷을 갈아입고,
아이 옆에 앉았다.
고은이의 머리를 쓰다듬자
잠든 아이가 웃는 얼굴로 몸을 돌렸다.
퇴근 후 불이 켜진 집.
누군가 나보다 먼저 도착해
집을 살아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놓은 이 집.
그것이
얼마나 큰 위로인지,
얼마나 드문 일인지
서하는 잘 알고 있었다.
누구도 묻지 않았지만,
누구도 묻지 않아 더 좋은
그런 안부가
이 집에는 있었다.
그날 밤 서하는
오랜만에 방 안에서 음악을 틀었다.
책장을 정리하다,
강재가 접어 둔 고은이의 유치원 알림장을 발견했다.
“오늘은 친구에게 양보했어요.
아빠가 칭찬해 줬어요 :)”
그 말 옆에,
강재가 쓴 작은 메모.
‘하루하루 자라는 중.’
서하는 문득 생각했다.
그건 아이만이 아니었다.
자신도,
그리고 이 집도
하루하루, 자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