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대 오빠와 법대 언니의 두가지 시선
2019년 11월 23일. 한국 미술계에 큰 사건이 발생했다.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인 김환기의 대표작 '우주'(Universe 5-IV-71 #200)가 크리스티 홍콩 경매에서 약 131억 8,750만 원(8,800만 홍콩달러)에 낙찰된 것이다. 낙찰 수수료까지 더한다면 153억 원이 넘는 가격으로 한국 미술품 경매 최고가를 기록하였다.
국내 미술계는 이 뉴스를 대서특필했고, 아침에 일어나 뉴스를 확인했던 이 법대 언니도, 남편인 미대 오빠도 크게 놀랐다.
아트마켓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순수하지 못한 법대 언니는 늘 ‘과연 한국 작가의 작품이 투자 대상으로서 매력적인가’를 물어왔다. 미술에 관심이 많은 우리 부부는 당연히 미술품 투자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 안타깝게도 우리가 원하는 작품을 모두 사들이기에는 총알이 부족하다. 너무 부족하다. 결국 우리는 투자의 대상이 될 작품을 고르고 고르고 또 골라서 결정을 해야만 하는데, 과연 한국 작가의 작품을 선택하는 것이 현명한 투자가 될런지 항상 고민이 되었다.
그때마다 등장하던 이야기는 ‘마의 100억’이었다. 한국의 추상미술이 세계 미술시장에서 주목을 받은 지 많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100억 원을 넘는 작품이 없다는 이유로 한국 미술품에 대한 투자를 부정적으로 보는 의견도 있었고, ‘마의 100억’을 넘기만 하면 가격이 훨훨 날아갈테니 아직 한국 미술품의 가치가 저평가되어 있는 바로 지금 투자를 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그런데 그 ‘마의 100억’이 깨어진 것이다.
숨을 고르고 작품을 감상해보자.
'우주'는 김환기의 작품 중 가장 큰 추상화이자 유일한 두폭화라고 한다. 두 점의 그림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크기가 254x254cm에 이르는 대작이다. 김환기의 다른 대작들을 대면했을 때 느껴지던 압도적인 기운을 떠올려 보면, 이 작품에서 뿜어져 나올 아우라가 어떠할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물론 사진으로만 보니, 솔직히 감동은 좀 덜하……
아.. 화제를 돌려보자.
한국 미술계의 대환호를 불러일으킨 이 이벤트를 두고, 따뜻한 마음으로 미술을 사랑하는 미대 오빠와 세상 모든 것을 의심하고 시니컬한 법대 언니의 시선이 조금 갈렸다.
미대 오빠는 이 작품에 숨겨진 비하인드 스토리에 주목했다.
‘우주’를 경매에 내놓은 주인은 뉴욕에 거주하고 있는 김마태 박사이다. 김마태 박사는 김환기의 오랜 후원자이자 벗, 그리고 그의 주치의로 알려져 있다. 이 둘의 인연은 수십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전쟁 발발 이후 전쟁을 피해 많은 예술가들은 부산으로 모여들었다. 그 부산에서 김마태 박사와 김환기가 우연히 만났고 이 둘은 곧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1953년 김 박사가 미국으로 떠나면서 김환기와 김 박사는 서로 다른 대륙에 머물게 되었지만, 이 둘의 우정을 더욱 돈독해졌다. 특히 김 박사는 김환기의 든든한 후원자 역할을 하였는데, 1963년 김환기와 그의 부인이 뉴욕으로 이주할 때 항공권 비용까지 부담을 해주었다고 한다. 김환기는 고마움의 표시로 김 박사에게 작품을 선물하기도 하였고, 김 박사는 김환기의 작품을 꾸준히 구매하였다.
김 박사는 1971년 ‘우주’를 구매한 이후 50년 가까이 품어 왔고, 이는 김 박사가 보유하고 있는 수많은 김환기의 작품 중에 최초로 경매에 등장한 작품이 되었다.
한국 미술계의 거장과 그를 수십년간 후원한 절친한 벗의 깊은 우정. 거장의 대작 안에는 단 하나뿐인 이야기가 녹아 있었다.
그림 자체를 바라보자. 물론 크고 아름답다. 그런데 저 그림을 그리는데 사용된 재료의 원가는 얼마일까? 딱히 대단한 테크닉이 필요하지도 않은 듯한, 그저 푸른 점으로 이루어져 있는 그림이다(좀 연습하면 나도 그릴 수 있……). 단순히 원가를 생각한다면 '우주'를 150 여 억 원을 구매하는 것은 미친 짓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김환기라는 작가가 갖는 무게감이, 작품이 한국 미술사에서 갖는 지위가 엄청난 가치를 만들어냈고, 그림에 녹아있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화룡점정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우주’의 낙찰자는 그림 만이 아닌, 그 뒤의 유일무이한 스토리까지 구매할 수 있었기에 어마어마한 거액을 기꺼이 지불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잠깐, 모든 것이 그렇게 순수하고 아름답기만 할까?
‘우주’의 낙찰이 이루어진 이후, 낙찰자가 누구인지는 공개되지 않았다. 크리스티는 낙찰자가 법인이 아니라고 밝혔을 뿐, 낙찰자의 신분은 밝히지 않았다. 한국인이라더라, 한국인인데 외국 국적인 '검머외'라더라, 완전 서양인이라더라, 완전 서양인인데 배후에는 한국인이 있다더라…… 소문만 무성했다.
법대 언니는 개인적으로 김환기 작품의 낙찰 최고가 경신된다면, 낙찰자는 한국계가 아닌 순수 외국인, 그것도 아시아인이 아닌 다른 인종이길 바랬다. 이 경이로운 작품의 아름다움을 이역만리의 그조차 똑같이 느낄 수 있기를 희망했다. 그리고 좀 세속적인 눈으로 보자면, 그래야 한국 미술품에 대한 전세계의 시선이 쏠리고, 돈이 쏠리면서, 한국 미술시장의 전체 파이가 커질 수 있다고 생각을 했다.
'우주'의 낙찰 뉴스가 전해진 직후, 아트마켓에 종사하는 한 지인이 의문을 제기했다. 해외에서는 개인이 고가의 작품을 낙찰받으면 이를 명예롭게 여기는 분위기 때문에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낙찰자에 관한 아무런 소식이 없는 것을 보아, 아무래도 낙찰자는 외국인이 아닌 한국인인 것 같다는 이야기였다. 업계에는 한국인이 펀드를 결성해서 경매에 참여했다는 소문, 외국인을 앞세운 한국인이 낙찰은 받은 것이라는 소문 등이 돌고 있다고 했다.
과연 며칠 후, 실제 ‘우주’를 낙찰받은 당사자가 모 그룹의 후계자이자 미술계 종사자인 모 큐레이터라는 기사가 나왔다. 이에 대해 크리스티 코리아는 오보라고 했지만 정작 지목된 당사자는 모호한 답변만 내놓았고, 진실은 저멀리 있을 뿐이다.
물론 이 법대 언니는 미술품 경매, 미술품 거래가 순수하고 아름다운 의도로만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방법이 위법하거나 누군가는 기만하는 것이 아니라면 순수하지 못한 의도가 담긴 거래도, 아예 거래가 없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번 ‘우주’의 낙찰이 단순히 ‘마의 100억’을 인위적으로 깨려는 세력에 의한 것이었다면 한국 미술사에 기록될 이번 이벤트의 의미가 퇴색되는 것 같아 영 기쁘지 않다. 이번 경매의 낙찰자가 정말 순수하게 김환기의 대작을 소장하고자 했던 한국인 컬렉터였고, (아마도) 세무조사의 위험 등 때문에 그 사실을 자신 있게 밝히지 못한채 숨어버린 것이라면, 그런 분위기 또한 개운하지 않다.
환희 뒤에 알 수 없는 씁쓸함을 남긴 김환기의 경매 이벤트, 이를 바라보는 여러 시선이 궁금하다.
그리고 법대 언니는 씁쓸함은 뒤로 한 채, 미대 오빠와 즐겁게 그리고 피 터지게 의견을 나눌 또다른 이벤트를 기다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