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렇게 일하겠다는 선언"
최근 들어 나는 금융, 경제, 투자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단순히 월급만으로는 먹고살기 버거운 시대라는 현실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새로운 목표가 생겼기 때문이다. 나는 앞으로 단순히 노동만으로 수입을 얻는 삶에서 벗어나, “배당금과 이자”라는 자산의 흐름으로 생활을 유지하고 싶다. 원금을 최대한 보전하면서도 안정적이고 지속 가능한 기반을 마련하는 방법을 찾는 것, 지금 내게 가장 중요한 과제다. 이제 회사에서 받는 월급은 단순한 생활비가 아니다. 나의 투자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시드(seed) 자본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예전에는 힘겹게만 느껴지던 야근과 주말 근무조차 다르게 다가왔다. 땀과 시간이 허공에 흩어지는 게 아니라, 내 미래를 위한 씨앗으로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는 확신이 나를 움직이게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마음이 생긴 덕분에 회사에서 쉬는 주말을 맞이했을 때 나는 조금 당황했다. 법정 최대 근무시간을 채우고 나니 회사에서 “이제 그만 나오라”는 말을 들었고, 속으로는 “아, 일하게 해주세요!”라고 외쳤다. 그만큼 나는 일에서 얻는 의미—특히 주도적으로 무언가를 만들어낼 때의 그 몰입에서—빠르게 만족을 얻는 사람이다. (오랜만에 맞는 주말의 여유... 오전에 피아노를 치다가, 카페에서 책을 읽으려고 한다.)
환경이 달라지자 태도도 달라졌다. 이전 팀에서는 단순 반복 업무가 많아 출근이 늘 버겁고, 회사는 숨 막히는 장소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지금의 팀은 다르다. 스스로 계획을 세우고 주도적으로 일할 수 있는 구조가 마련되어 있다. 집에서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보다 회사에 가서 몰입하며 성과를 쌓는 일이 더 의미 있고 값지다. 하고 싶은 일도 스스로 만들 수 있고, 모르는 것은 DB에서 찾아 공부하면 된다. 내 성과를 학회에 정리해 논문을 쓰고, 잘 되면 특허나 개인 사업으로 이어가 보고 싶은 꿈도 생겼다.
흔히들 MZ세대는 ‘일을 안 한다’, ‘워라밸만 챙긴다’고 말하지만, 나는 그 프레임이 너무 단순하다고 느낀다. Cathy K 님의 글, “꼰대를 거부하는 X친 X라이 MZ세대”를 읽었을 때 특히 공감했다. 그 글은 MZ세대를 단순한 ‘게으름’이나 ‘무책임’으로 규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산물로 본다. 우리 사회에는 전쟁을 겪은 ‘최빈국’ 세대, 고도성장의 ‘개도국’ 세대, 그리고 물질적 풍요 속 교육받은 ‘선진국’ 세대가 공존한다. MZ세대는 후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어떻게’ 일할 것인가를 묻는다. MZ는 일을 안 하는 세대가 아니라, 어떻게 일할지를 새롭게 정의하는 세대다. 과거에는 “죽어라 일해야만 먹고 산다”는 공식이 통했지만, 이미 선진국의 교육을 받은 지금은 일의 유무가 아니라 방식이 중요하다. 일을 한다면 내 방식대로, 책임질 수 있는 결과를 내면서. 더 이상 “일하고 싶지 않아요”라는 거부가 아니라, “나는 이렇게 일하겠다”는 선언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그런 대화 중에 친구와 나눈 토론이 하나 떠오른다. “우리가 하는 일은 AI에 의해 대체되지 않을까?”라는 질문. 둘 다 설득력 있는 관점을 내놨다. 한편으로는, AI—특히 LLM과 자동화 도구—는 이미 많은 업무를 대체하고 있고, 앞으로 그 범위는 더 넓어질 것이다. 반대로 AI는 확률 기반의 도구이고, 완전히 신뢰하기 어렵다는 입장도 있다. 물론 AI는 확률 기반의 LLM이기에 완전히 신뢰하기는 어렵지만, 이미 많은 영역에서 인간보다 더 효율적이고 빠르다. 사실 나조차도 몇 시간 고민해 짠 코드보다 ChatGPT가 몇 분 만에 내놓은 결과가 더 나은 경우를 자주 본다. 예전엔 몇 시간 쏟아부어 만들던 스크립트나 코드가, 이제는 AI가 몇 분 만에 더 깔끔하게 뽑아주는 경우가 많다. 나의 작은 ‘잡기술’이라고 믿어온 나의 무기들이 이제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나는 미래를 상상한다. 대부분의 노동은 결국 AI와 로봇이 대체할 것이다. 그렇다면 일을 할 수 있는 자격은 누가 갖게 될까? 똑똑한 사람과 자본을 가진 사람들이다. 실제로 지금도 고임금의 노동은 일부 자본가들만 독점하고 있다. 몇십억을 순식간에 몇 조로 불렸다는 재벌들의 뉴스는 흔하다. 미래에는 단순히 “고임금 노동”뿐만 아니라 “중간임금 노동”조차 자본과 실력이 없는 사람에게는 닿지 않을 수도 있다. 남은 선택지는 저임금 노동뿐. 그래서 나는 자본을 축적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돈을 모아 편하게 먹고 놀겠다는 게 아니다. 오히려 일을 계속하기 위해서다. 돈이 있어야만, 자본과 기술이 있어야만, 미래에도 “일을 할 자격”을 가질 수 있다.
결국 중요한 건, 일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는 방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단순히 시간을 늘려 소모하는 노동은 곧 AI에게 넘겨질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하는 건 투자, 자본, 기술 같은 레버리지를 활용해 더 효율적으로 일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그래야만 미래에도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할 수 있고, “일을 할 수 있는 자격”을 지킬 수 있다.
나는 이제 알겠다. 단순히 시간을 늘려 죽어라 일하는 방식으로는 더 이상 미래를 열 수 없다. 중요한 건 균형이다. 가진 에너지를 몽땅 태워버리는 게 아니라, 오래 버틸 수 있게 조율하는 법. 작은 씨앗을 심듯 차곡차곡 모은 자본과 경험이 언젠가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고르고, 더 큰 가치를 만들어내는 발판이 될 것이다.
코난 오브라이언은 10년 전 다트머스 대학 졸업 연설에서 “순수 예술이나 철학을 전공했다면, 직업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은 고대 그리스일 것”이라는 농담을 했다. 십 년이 지난 지금은 그 말이 단순한 농담으로만 들리지 않는다. 이제는 순수 예술뿐 아니라 많은 직업이 사라질 위기에 놓여 있고, 십 년 후에는 그것이 현실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제레미 리프킨의 『노동의 종말』은 바로 이 지점을 정면으로 다룬다. 우리는 이미 역사를 통해 기술과 산업이 인간의 일자리를 어떻게 앗아갔는지를 목격해왔다. 1차, 2차 산업혁명은 농민과 블루칼라 노동자들의 자리를 기계로 대체했고, 3차 산업혁명은 서비스업과 전문직 영역까지 파고들었다.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인간의 사고와 지능마저 인공지능이 침범하면서, “거의 노동자 없는 경제”가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 책을 읽으며 가장 흥미로웠던 점은 “오늘날 자본주의가 어떤 문제에 봉착했고, 앞으로 어떤 이데올로기가 펼쳐질 것인가?”라는 질문을 머릿속에 그리며 읽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나 역시 막연하게나마 극한의 착취와 빈부격차로부터 자유로운, 보다 건강하고 평화로운 세상을 꿈꾸어왔는데, 이 책은 그런 생각들을 정리하고 더 깊이 고민해 볼 기회를 주었다.
리프킨에 따르면, 생산은 로봇이, 소비는 인간이 담당하게 되는 사회에서, 소비 능력을 잃은 인간만 남는다면 자본주의 체제 자체가 유지되기 어렵다. 결국 국가는 국민들에게 불로소득, 즉 기본소득을 나누어주어 소비자로서 역할을 하게 만드는 수밖에 없다. 이 점에서 나는 공산주의 사회를 떠올렸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통해 노동자 중심으로 자본가를 무너뜨리고자 했다면, 오늘날은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을 무너뜨리고도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기본소득을 제공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완전히 반대의 맥락이지만, 결국 모두가 공산주의적 요소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 충격적이었다.
또 하나 흥미로운 지점은 불로소득에 대한 우리의 심리적 거부감이었다. 실제로 한국 고등학생들의 장래희망 2위가 ‘건물주’였다는 조사 결과가 있는데, 놀랍지도 않았다. 노동을 통한 성취보다 불로소득과 워라밸을 택하려는 사회 분위기가 심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내가 노동하지 않고 기본소득만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상상해 보니, 도저히 의미를 찾기 어려웠다.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고 비생산적인 삶에서만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것은 나 자신을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마르크스와 헤겔 이후의 철학은 인간을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 노동을 통해 규정된 존재로 이해한다. 즉, 우리는 ‘무엇을 생산하는가’를 통해 스스로를 정의한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 없는 세상, 노동하지 않는 나 자신을 상상하기 어려운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하지만 코로나 팬데믹은 이런 인식을 조금씩 바꾸어 놓았다. 많은 자영업자들이 일자리를 잃고 국가의 재난지원금으로 버티게 되면서, ‘노동 없는 소득’이 불편함을 남기면서도 점차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워라밸을 꿈꾸는 에세이가 서점을 가득 메우고, 사회의 무게 중심이 ‘work’에서 ‘life’로 이동하는 모습이 뚜렷하다.
나는 이 흐름이 결국 극단적인 이중 경제로 이어질 수 있다고 본다. 가진 게 없는 사람들에게는 노동의 종말이, 가진 게 많은 사람들에게는 노동의 독점이 일어날 것이다. 상류층은 고급 교육을 통해 기계를 다루고 이길 수 있는 능력을 독점하게 되고, 부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이들이 내는 세금이 재분배되어 나머지 사람들은 기본소득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런 부의 격차는 극복 불가능한 수준으로 벌어지고, 결국 사회는 이중 경제로 굳어질 것이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책이 다니엘 마코비치의 『엘리트 세습』이다. 조승연 작가의 유튜브에서 추천받아 읽게 된 이 책은, 우리가 정의롭다고 믿어온 능력주의 사회의 허구를 파헤친다. 원제는 “능력 위주 사회의 함정(The Meritocracy Trap)”인데, 한국에서는 자극적인 제목으로 “엘리트 세습”으로 번역되었다.
능력주의 이전의 사회는 세습 신분 사회였다. 상류층은 물려받은 재산으로 호화로운 삶을 살았고, 다수의 중산층과 하층민이 그들의 생활을 떠받쳤다. 하지만 오늘날 능력주의 사회에서는 물리적 재산이 새로운 부를 보장하지 못한다. 대신 상류층은 엄청난 질의 교육과 문화 자본을 통해 간접적으로 부를 세습한다. 돈 많은 집안의 자녀들이 놀던 과거의 명문대학은, 이제 치열하게 노력하는 엘리트들의 배움터가 되었고, 이곳에서 노동 생산력을 독점한 엘리트들이 도시를 형성하며 자산 가치를 증폭시킨다. 반면 중산층은 직업을 잃고 높은 생활비와 물가를 감당하지 못해 밀려나게 된다.
결국 빈민층은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고, 중산층은 열심히 일하면서도 점차 몰락하며, 상위층은 자기 자신을 ‘공장’처럼 착취해야 하는 사회가 되었다. 나 역시 책을 읽으며 내 삶을 돌아보았다. 밤을 새우거나 주말에 일하는 게 너무나 당연하고, 심지어 부담스럽게 느껴지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왜 이렇게 당연하게 스스로를 착취하고 있는가? 돈을 더 벌어 행복해지고 싶어서인가, 아니면 돈이 없을 때 찾아올 불안감이 두려워서인가?
『엘리트 세습』은 바로 그 질문에 답한다. 능력주의 사회는 우리 모두를 불안 속에 몰아넣는다. 경쟁에서 뒤처지면 곧바로 추락한다는 공포, “열심히 했으니 정당하다”는 자기 위안이 우리를 끊임없이 스스로를 몰아붙이게 만든다. 승자와 패자가 모두 지쳐버리는 시스템, 그것이 능력주의 사회의 함정이다.
『노동의 종말』은 노동이 사라지는 사회를, 『엘리트 세습』은 노동이 초엘리트에게만 집중되는 사회를 경고한다. 상반된 듯 보이지만 두 책은 공통적으로 지금의 자본주의가 지속 가능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노동이 줄어든 사회에서, 혹은 소수에게만 집중된 사회에서, 다수는 의미를 잃고 소수는 자기 착취에 시달리며, 결국 모두가 불행해진다.
결국 질문은 하나로 귀결된다. “노동이 사라진 사회에서, 혹은 노동이 집중된 사회에서, 우리는 무엇으로 서로를 인정할 것인가?”
나는 두 책을 읽으며, 노동의 종말은 단순한 경제적 위기가 아니라 의미의 재편을 요구하는 신호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노동 없는 소득이 불편하더라도 이미 사회에 뿌리내리고 있듯, 언젠가는 ‘무엇을 생산하고, 무엇을 기여하며, 무엇을 의미 있는 삶이라 부를 것인가’를 다시 정의해야 할 것이다. 기본소득, 새로운 사회계약, 기술 배당, 돌봄과 문화의 가치 재평가 같은 제도가 논의되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노동 없는 사회와 노동이 집중된 사회, 두 얼굴의 미래를 마주하며, 나는 다시 묻게 된다. “나는 왜 일하는가? 그리고 우리는 무엇을 위해 함께 일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