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책을 만들고 있습니다_어쩌다 덕업일치] 17 디자인하는 편집자
그냥 제가 할게요.
편집자로 이직 후 내가 그동안 근무했던 환경이 좋았다는 걸 깨달았다. 사무실 컨디션은 둘째 치고 외주 작업 없이 회사 내에서 업무 처리가 가능했다. 여러 분야의 팀을 갖추어 한 공간에서 근무하니 소통도 편리했다. 메신저도 사용했지만 마주 보고 이야기하면서 불필요한 절차를 줄였다. 효율적으로 일하며 직원들과도 친하게 지낼 수 있었다.
그런데 이직한 회사에서는 디자이너가 한 명뿐이었다. 디자이너는 거의 표지 위주로 급한 업무를 했고, 편집자들은 자신과 잘맞는 외주 작업자를 지정해서 일하고 있었다. 주변에 아는 사람을 수소문하는 것부터 일이었다. 표지는 책 스타일과 잘맞는 업체와 계약을 맺고 의뢰했다. 일러스트레이터도 최소 인원이었다. 삽화가 많은 분야인지라 학기 중에는 일러스트조차 외주 작업을 하지 않으면 책 한 권 완성하기 어려웠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불편했다. 내부에서 처리할 때보다 작업 시간이 길어졌다. 급한 업무는 미리 말해도 외주 작업자의 작업 가능 시간을 고려해야 하니 당장 급한 일을 처리할 수 없는 경우가 생겼다. 수정할 교정지를 전해주면 끝이었는데 파일로 보내려면 스캔도 해야 했다. 외부로 보내기에는 작은 수정인데 내부에서도 일정에 틈이 없으면 곤란했다. 수정사항을 눈앞에서 설명할 수 없으니 작업자가 이해할 수 있는 자료도 만들었다. 최종 PDF 검판을 본 후에 수정이 생겨도 외주 작업자의 작업을 기다려야 했다. 생각도 못 한 부분에서 에너지가 소모됐다.
답답했다. 더욱이 나는 이직 전까지 디자인과 조판이 가능한 편집디자이너이지 않았나. 잠깐이면 끝나는 일을 외주 작업자에게 연락해서 자료를 넘기고 기다리고 다시 확인하는 일이 너무 소모적이었다. 그렇다고 그 일을 내가 직접 한다면 앞으로는 계속 그럴 게 뻔했다.
꾹 참고 참던 어느 날이었다. 반드시 출력물을 완성하고 퇴근해야 하는데 야근을 앞두고도 속도가 나지 않았다.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냥 제가 할게요.”
“그럴래? 그게 낫겠다, 정말!”
상사에게 직접 인디자인 작업을 하겠다고 말했다. 상사도 반기는 눈치였다. 외주 작업자를 기다리며 초조해할 일도 없고 내가 더 꼼꼼히 작업하니까 다시 수정할 일도 없었다.
그렇게 시작한 편집디자이너로의 일은 예상대로 더 늘었다. 다른 편집자의 급한 책을 편집디자이너가 되어 도와주며 함게 야근도 했다. 회사를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원래 서로 도우며 일하니 그게 싫은 건 아니었다. 진짜 문제는 편집자로서의 내 일이 점점 늘어났다는 사실이다.
편집장은 나를 예뻐했다. 다른 사람들까지 느낄 정도로 티가 많이 났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도 디자이너 출신이었다. 그래서 나를 보고 동질감을 느꼈고, 내게 기대를 많이 했다고 한다. 편집자들이 언어 능력은 탁월하지만, 디자인을 보는 안목이 부족해서 아쉬울 때가 있다고 했다. 나는 그 점을 보완할 수 있을 것 같아 마음에 들었다면서 말이다. 실제로 회의 자료가 한눈에 보이기를 원하는 상사의 요구를 단번에 만족시켰다. 다른 직원들 앞에서 “봐, 다르잖아.” 라며 칭찬도 많이 해주었다. 그렇게 나는 넘치는 사랑을 받았다.
감사하고 행복한 일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상사의 사랑만큼 많은 일이 내게 몰려왔다. 그동안 어느 회사에 다녀도, 심지어 아르바이트하면서도 일복이 넘쳤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달랐다. 진이 다 빠졌다는 말을 매일 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도 가장 짧은 기간 동안 다녔는데 가장 많은 일을 했던 회사였다.
편집자는 책을 만들며 일어나는 모든 상황을 통제하는 책임자이다. 책이 한 권 늘어나면 담당하는 저자나 그 외 신경 써야 할 일은 몇 배로 늘어난다. 지금 맡은 책을 처리하려면 매일 야근해서 겨우 맞추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내가 잘할 것 같으니 내가 담당해야 한다고 하는 일이 생겼다. 주말 내내 출근해도 시간이 부족하니 다른 편집자도 나를 도왔다. 그래도 책임자는 나, 아무리 도와줘도 한계가 있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편집자라서 그런 걸까? 이 회사의 시스템이 문제일까? 내가 이렇게 일하는 게 맞는 건가? 하필 가장 바쁠 때 입사해서 그럴 거야.
- 정신 차려! 팀 구성에 문제가 있는 거라고!
그래도 나는 편집자의 꿈을 이루었잖아. 할 수 있는 데까지 해 봐야지. 학기가 끝나면 달라질지도 몰라. 봄을 기다리자. 오늘 할 일 진짜 많은데 다 할 수 있을까...
- 아니야, 제발 일찍 퇴근해야 한다고!
하루도 빠짐없이 출퇴근하는 내내 머릿속에서는 천사와 악마가 싸웠다. 그렇게 나는 모든 에너지를 쏟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