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장.
사람은 평온할 때보다 힘들 때 더 쉽게 자기 자신 쪽으로 기운다. 마음에 여유가 있을 때는 보이던 것들이, 지치고 예민해진 순간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 타인의 표정이나 말투보다 내 감정의 결이 훨씬 더 선명해지고, 관계 전체보다 지금 내가 얼마나 버거운지가 먼저 다가온다. 평소에는 한 번 더 생각해볼 수 있던 일도, 힘든 날에는 내 서운함과 내 피로를 중심으로만 해석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사랑은 여전히 남아 있는데도, 사랑의 시선은 점점 나에게로만 좁아진다.
나는 이것이 꼭 이기적이어서 생기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많은 경우 그것은 버티기 위한 반응에 가깝다. 사람이 힘들다는 것은 단순히 기분이 좋지 않다는 뜻이 아니다. 몸과 마음의 자원이 줄어들고, 평소 같으면 자연스럽게 하던 배려와 조율이 더 이상 सहज하게 이루어지지 않는 상태에 가깝다. 감정의 여백이 줄어들면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기 자신부터 붙잡게 된다. 지금 내가 무너지지 않는 것이 먼저가 되고, 내 안의 소란을 견디는 것이 급해진다. 그런 상태에서 타인의 마음까지 넉넉하게 헤아리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어쩌면 사람은 힘들수록 세상을 실제보다 더 좁게 경험하는지도 모른다. 해야 할 일은 많은데 마음은 따라주지 않고, 사소한 말에도 쉽게 지치고, 작은 어긋남도 크게 다가온다. 그러면 세상은 넓은데도 하루는 점점 내 문제로만 가득 차게 된다. 나는 지금 너무 지쳤고, 나는 이해받지 못하고 있고, 나는 버거운데 아무도 그것을 잘 모르는 것 같고, 나는 이 상황에서 더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느낀다. 그때의 ‘나’는 단순한 자의식이 아니라 거의 생존의 단위처럼 커진다. 사랑하는 사람조차도 내 곁에 있는 한 사람이라기보다, 지금 내 상태에 반응해야 하는 존재처럼 느껴질 수 있다.
힘들수록 내가 더 나 중심이 되는 이유는, 내 안의 아픔이 나를 설득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내가 먼저여야 한다고. 지금은 내가 힘든 것이 더 중요하다고. 지금의 예민함과 서운함은 충분히 정당하다고. 실제로 그 말은 어느 정도 맞다. 힘든 사람에게 “왜 그렇게 자기중심적이냐”고만 말하는 것은 너무 쉬운 판단일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지칠 수 있고, 버거울 때는 자신을 먼저 돌봐야 한다. 문제는 자기 자신을 먼저 돌보는 것과, 관계 전체를 나의 감정만으로 해석하는 것은 다른 일이라는 점이다. 나는 바로 그 차이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힘들 때, 자기도 모르게 관계를 확인의 자리로 사용하기 쉽다. 나는 지금 이만큼 힘든데 너는 나를 얼마나 알아주고 있는가, 나는 이렇게 버거운데 너는 왜 이 정도도 이해해주지 않는가, 나는 지금 위로받아야 하는데 왜 너는 나를 더 힘들게 하는가. 이런 질문은 너무 인간적이어서 쉽게 틀렸다고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이 질문들만 관계의 중심에 놓이기 시작하면, 상대는 더 이상 자기 삶과 감정을 가진 한 사람이 아니라 내 버거움을 덜어줘야 하는 역할로 축소된다. 사랑은 만남이 아니라 요구가 되고, 관계는 서로의 현실이 아니라 내 상태를 확인하는 공간이 된다.
나는 특히 힘든 시기의 사랑이 우리를 더 정직하게 드러낸다고 느낀다. 평온할 때의 다정함은 비교적 자연스럽다. 하지만 버거운 날에도 여전히 상대를 한 사람으로 볼 수 있는지, 내 감정이 앞서는 순간에도 상대의 현실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을 수 있는지, 지금 내가 지치다는 이유로 상대를 쉽게 배경으로 만들지 않는지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사랑은 감정보다 태도에 가까워진다. 힘든 순간에도 완벽하게 다정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내 감정이 전부가 되지 않도록 조금 늦추고 돌아볼 수 있느냐의 문제로 바뀌는 것이다.
물론 이런 말은 자칫 사람을 또 다른 자기검열로 몰아세울 수도 있다. 힘들 때조차 나 중심이 되면 안 된다는 식의 문장으로 읽히면, 사랑은 금세 의무가 되고 만다. 나는 그 방향으로 말하고 싶지 않다. 사람은 실제로 나 중심이 될 수밖에 없는 날들이 있다. 그 자체를 도덕의 실패처럼 말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내가 나 중심이 되는 순간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그리고 그 상태를 절대화하지 않는 것이다. 내가 힘들어서 시야가 좁아졌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과, 지금 느끼는 감정이 전부 진실이라고 믿어버리는 사람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그래서 성숙함은 아마 나 중심이 되지 않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 중심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데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 지금 나는 너무 지쳐 있어서 내 감정밖에 보이지 않는구나. 지금 나는 관계 전체보다 내 서운함을 훨씬 크게 느끼고 있구나. 지금 나는 상대를 한 사람으로 보기보다 내 상태에 반응해주길 바라고 있구나. 이런 문장을 마음속에서 꺼내볼 수 있는 순간, 사람은 비로소 자기감정의 한가운데서 아주 조금 비켜선다. 그리고 바로 그 작은 거리감이 관계를 구한다. 사랑은 완벽하게 흔들리지 않는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흔들리는 자신을 아는 사람에게서 더 오래 살아남는지도 모른다.
힘들수록 나 중심이 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하지만 그 자연스러움이 관계의 유일한 질서가 되도록 둘 필요는 없다. 나는 힘들 수 있다. 내가 먼저일 수도 있다. 잠시 나를 더 많이 돌봐야 하는 시기도 분명 있다. 다만 그 모든 사실이, 상대 역시 자기 삶을 견디고 있는 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지워버리게 해서는 안 된다. 사랑은 자기희생이 아니지만, 동시에 자기감정의 독재도 아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내가 얼마나 힘든가만이 아니라, 그 힘듦 속에서도 내가 타인을 완전히 잊지 않는가일 것이다.
생각해보면 사람은 힘들 때 가장 쉽게 “나를 좀 봐 달라”는 마음을 품는다. 그 마음은 잘못이 아니다. 누구나 그런 순간이 있다. 다만 사랑이란 그 말의 반대편에도 귀를 여는 일인지도 모른다. 나를 좀 봐 달라는 마음을 품으면서도, 동시에 내 앞의 사람 역시 자기 방식으로 힘들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 내가 버거운 만큼, 상대도 설명되지 않는 피로와 상처를 가지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떠올리는 것. 사랑은 어쩌면 그렇게, 내 아픔의 절대성을 조금씩 낮추는 법을 배우는 일인지도 모른다.
나는 사랑이 사람을 완벽하게 비이기적으로 만든다고는 믿지 않는다. 오히려 사랑은 내가 얼마나 쉽게 나 자신에게로 굽는 존재인지를 더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어떤 의미에서 훈련에 가깝다. 내 감정이 가장 크게 들리는 순간에도, 내 바깥에 여전히 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훈련. 내가 힘들다는 이유로 관계 전체를 내 마음의 배경으로 만들지 않으려는 훈련. 나 중심이 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거기에서 끝나지 않으려는 훈련 말이다.
결국 힘들수록 내가 더 나 중심이 되는 이유는, 내가 약해서이기도 하고 인간이라서이기도 하다. 그러니 그 사실을 부끄러워하기보다 먼저 인정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비로소 다음 질문으로 넘어갈 수 있다. 나는 지금 너무 나 중심이 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내 버거움이 상대의 존재까지 지워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사랑은 아마 이 질문을 포기하지 않는 데서 다시 시작되는 것 같다.
힘든 날의 나는 나에게로 기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사랑은 그 기울어짐을 전부라고 믿지 않게 하는 힘일지도 모른다. 내 감정이 가장 크게 들리는 순간에도, 그 바깥에 있는 한 사람을 완전히 잃지 않으려는 마음. 어쩌면 사랑은 바로 그 마음 덕분에, 나를 넘어서는 방향으로 조금씩 자라나는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