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할과 책임은 왜 자꾸 겹치는가

5장.

by 경영 컨설턴트 Tim

작은 조직에서는 역할과 책임이 생각보다 쉽게 겹친다.
누가 무엇을 맡고 있는지 표에는 적혀 있는데, 실제 일을 보면 비슷한 일을 여러 사람이 동시에 보고 있거나, 반대로 아무도 끝까지 보고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처음에는 모두가 “저건 내가 볼게요”, “그건 제가 확인할게요”라고 말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누가 주도하는지 흐려지고, 중간에 누가 끼어들어야 하는지도 애매해지고, 결국 중요한 일일수록 책임이 분산되다가 사라진다. 겉으로는 협업처럼 보이지만, 안쪽에서는 경계가 없어서 계속 겹치고 새는 구조가 만들어진다.


나는 이 문제가 단순히 사람들끼리 일을 나누지 않아서 생긴다고 보지 않는다.
오히려 작은 조직일수록 사람들이 서로를 도우려는 마음이 강하기 때문에 겹침이 생긴다. “내가 좀 더 볼게요”, “그건 같이 보는 게 좋겠죠”, “어차피 연결되어 있으니 같이 확인하죠.” 이런 말들은 처음에는 아주 자연스럽고 친절하다. 하지만 책임과 역할이 분명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런 협업이 반복되면, 누가 최종적으로 결정하고 끝낼 사람인지 점점 불분명해진다. 도와주는 마음은 남아 있는데, 끝을 책임지는 사람은 사라지는 것이다.


역할이 겹치는 첫 번째 이유는, 조직이 아직 역할을 기능보다 사람 중심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은 조직에서는 특정 업무가 특정 사람의 성향이나 능력에 묶여버리기 쉽다. “이건 저 사람이 잘하니까”, “저건 이 사람이 제일 빨라서”, “어차피 그 업무는 저 사람한테 물어봐야 해서”라는 식이다. 그러면 사람은 일을 수행하는 주체가 아니라 일 그 자체와 섞여버린다. 문제가 생겨도 역할의 문제인지 사람의 문제인지 분리되지 않는다. 역할이 정리되지 않았는데도 일이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조직은 구조를 손볼 기회를 자꾸 놓친다.


두 번째 이유는, 책임과 권한이 분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책임은 있는데 결정권이 없거나, 권한은 있는데 끝까지 책임지는 구조가 없으면 역할은 쉽게 겹친다. 예를 들어 어떤 일의 실무자는 분명 있는데, 마지막 결정은 대표가 해야 하고, 중간 조율은 팀장이 해야 하고, 협업 부서는 별도로 확인해야 하는 상태라면 그 업무는 사실상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게 된다. 이때 각자는 자기 역할이 있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서로의 영역이 계속 포개진다. 책임은 나뉘어 있는 것 같지만, 막상 중요한 순간에는 모두가 서로를 바라본다. 그러면 다시 대표에게, 혹은 가장 경험 많은 사람에게 일이 모인다.


내가 만났던 한 14명 규모의 조직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있었다.
콘텐츠 팀, 마케팅 팀, 운영 팀이 각자 분명히 존재했지만, 실제 캠페인 하나를 진행할 때마다 업무가 계속 겹쳤다. 콘텐츠는 마케팅 소재를 확인하고, 마케팅은 운영 일정까지 봐야 하고, 운영은 다시 콘텐츠 반응을 받아야 했다. 처음에는 빠르게 협업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시간이 갈수록 어느 팀이 어디까지 책임져야 하는지가 불분명해졌다. 결국 중요한 일은 여러 사람이 조금씩 만지다가 늦어졌고, 문제가 생기면 “그건 저 팀에서 봐야 하는 거 아닌가요?”라는 말이 반복되었다. 사람들은 게으르지 않다. 다만 역할의 끝이 정리되지 않았을 뿐이다.


역할이 겹치는 세 번째 이유는, 조직이 “도와주는 것”과 “책임지는 것”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작은 조직에서는 서로 돕는 분위기가 좋게 여겨진다. 실제로 협업이 잘 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돕는 것과 책임지는 것은 다르다. 도와주는 사람은 필요할 때 들어가고 빠질 수 있지만, 책임지는 사람은 끝까지 결과를 봐야 한다. 그런데 이 구분이 없으면 모두가 “같이 본다”고 말하면서 아무도 끝까지 보지 않게 된다. 특히 일이 복잡해질수록 “같이 보는 것”은 편리한 표현이 되지만, 실제 실행에서는 오히려 느슨함을 낳는다. 어느 한 사람이 중심을 잡고 책임을 이어야 하는데, 모두가 조금씩만 관여하면 그 일은 끝이 흐려진다.


역할과 책임이 겹치는 조직에서는 회의도 자주 비슷한 모양을 띤다.
누가 결정해야 하는지 모르는 회의, 누가 최종 책임자인지 흐릿한 회의, 누가 먼저 끝내야 하는지 정리되지 않은 회의. 회의 안에서는 다 같이 이야기하지만, 회의가 끝나면 다시 각자 해석한 대로 움직인다. 그러면 한 일에 대해 여러 사람이 중복해서 확인하거나, 반대로 모두가 봤다고 생각해서 아무도 끝까지 잡지 않는 일이 생긴다. 역할이 정리되지 않은 조직은 회의에서조차 역할이 드러나지 않는다. 회의가 끝나도 책임의 경계는 그대로 모호하다.


역할이 겹치는 것은 때로 감정 문제로도 이어진다.
누군가는 “내 일이 아닌데 자꾸 들어와요”라고 느끼고, 누군가는 “왜 제가 끝까지 챙겨야 하죠”라고 느끼고, 또 누군가는 “도와준다고 했는데 왜 제 책임이 됐죠”라고 느낀다. 여기서 갈등은 일을 잘못 나눠서만 생기는 것이 아니다. 애초에 누가 어디까지 맡고 있는지 합의가 없었기 때문에 생긴다. 그런데 사람들은 종종 이 감정을 사람의 태도 문제로만 해석한다. “협조적이지 않다”, “경계가 심하다”, “책임감이 부족하다.” 하지만 실제로는 역할이 명확했다면 생기지 않았을 감정일 수 있다. 구조가 불분명하면 사람은 서운해지고, 서운함은 다시 관계를 어렵게 만든다.


나는 작은 조직에서 역할과 책임을 구분하는 일이 단순히 문서를 잘 쓰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조직이 사람에게 무엇을 기대하는지 선명하게 말하는 일이다. 이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끝까지 책임지는 사람인지, 어디까지는 판단할 수 있고 어디서부터는 올려야 하는지, 어떤 일은 도와줄 수 있지만 최종 책임은 아닌지. 이런 경계가 정리되지 않으면 조직은 계속해서 좋은 의도를 낭비한다. 모두가 열심히 도와주지만, 정작 끝내야 할 일이 남는다. 그리고 그 끝나지 않는 일은 다시 사람의 피로와 불만으로 돌아온다.


역할이 겹치는 이유는 사실 조직이 아직 구조보다 관계에 더 기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작은 조직은 관계가 좋으면 많은 것을 덮고 넘어갈 수 있다. 서로 잘 아니까, 이해해주니까, 한번 봐주면 되니까. 하지만 관계가 좋은 것과 역할이 분명한 것은 같은 말이 아니다. 오히려 관계가 좋을수록 경계는 더 조심스럽게 정리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친함이 역할을 대신하고, 배려가 책임을 대신하고, 합의되지 않은 기대가 점점 쌓인다. 처음에는 사소한 도움처럼 보이던 것이 나중에는 당연한 역할처럼 굳는다.


역할과 책임을 분리하는 것은 사람을 차갑게 대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람을 덜 지치게 하려는 일이다. 누가 무엇을 끝까지 책임지는지 분명할수록 사람은 덜 불안하다. 어디까지가 내 몫인지 알면, 불필요하게 끼어들거나 뒤늦게 책임을 떠안는 일이 줄어든다. 반대로 역할이 겹치면 사람은 계속 눈치를 보고, 계속 중간에서 조율하고, 계속 상대의 반응을 읽어야 한다. 그러면 조직은 협업하는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판단의 피로만 커진다. 분리된 역할은 차가운 장치가 아니라, 오히려 사람을 살리는 장치가 된다.


그렇다면 역할과 책임은 어떻게 구분해야 할까.
나는 핵심은 세 가지라고 생각한다.
첫째, 존재 이유를 분명히 해야 한다. 이 자리의 사람이 왜 필요한지.
둘째, 끝까지 책임지는 결과를 분명히 해야 한다. 무엇이 이 사람의 몫인지.
셋째, 판단의 경계를 분명히 해야 한다. 어디까지 스스로 결정하고, 어디부터 올려야 하는지.
이 세 가지가 정리되지 않으면 역할은 계속 겹친다. 그리고 겹친 역할은 결국 아무도 끝까지 책임지지 않는 상태를 만든다.


나는 역할과 책임이 겹치는 문제를 볼 때마다 작은 조직이 왜 자꾸 피곤해지는지 이해하게 된다.
사람이 많지 않아서 오히려 서로의 일을 쉽게 넘겨다 보고, 관계가 가까워서 경계가 무뎌지고, 대표가 늘 마지막에 정리해주다 보니 각자의 자리보다 전체의 분위기가 더 우선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방식은 오래 못 간다. 결국 누군가는 지치고, 누군가는 불만을 품고, 누군가는 자기 몫을 덜 책임지게 된다. 그래서 역할을 나누는 일은 조직을 쪼개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를 더 정확히 만나는 일이다.


역할과 책임이 자꾸 겹치는 조직은 협력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경계가 아직 자라지 않은 조직일 수 있다.
그리고 그 경계가 자라기 시작할 때, 사람들은 비로소 “내가 어디까지 책임지고, 어디부터는 맡기고, 무엇을 끝내야 하는지”를 알게 된다. 그때부터 협업은 더 부드러워지고, 불필요한 중복은 줄어들고, 책임은 더 분명해진다. 작은 조직이 성숙한다는 것은 결국 사람을 덜 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경계를 더 잘 그리는 데서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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