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운서와 테라피스트의 시선
아나운서의 말_
‘이제는 편안함에 이르렀나?’ 그리운 <나의 아저씨>
언제부턴가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나도 모르게 ‘나의 아저씨’를 찾는다.
하루가 버티기 힘들었을 땐 ‘정희네’ 모여 앉은 후계동 사람들이 시끌벅적 술 마시는 장면을 돌려보았고, 버티지 못한 사람들의 안타까운 소식이 언론에서 들려올 때면 지안이 할머니를 마트 카트에 싣고 병원을 몰래 빠져나가는 장면을 돌려보았다. 그리고 사람의 온기가 그리울 땐 후계동 사람들이 지안의 할머니 장례식에 찾아와 가족같이 위로하고 차디찬 장례식장의 온기를 채우는 장면을 돌려봤다.
‘괜찮아, 아무것도 아니야’
묵묵히 삶의 무게를 견디며 세상을 버텨나가는 이들의 이야기 ‘나의 아저씨’에는 현실에 지쳐 하루하루를 버티는 미생들의 이야기가 담겼다.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는 우리는 어느새 드라마 속 주인공이자 주인공의 친구가 되어갔던 것 같다. 자신을 ‘성실한 무기징역수’라 부르며 자조하는 지친 얼굴의 주인공, 그런데 주인공이 우리가 그동안 잊고 살았던 ‘공동체’와 함께 치유하고 성장하는 과정을 보며 우리 각자가 스스로의 삶을 투영해 봤던 것 같다. 방영된 지 7년이 지났지만 삶에 지칠 때마다 철 지난 이 드라마를 보고 또다시 본다는 사람들이 많은 걸 보니 우리는 대부분 하루하루를 버티는 미생의 삶인가 보다.
‘이제는 편안함에 이르렀나?’
그런데 마지막을 울렸던 주인공의 말은 정작 현실의 주인공에게는 고통스러운 마지막을 스스로 끝내고 나서야 그에게 되돌아갔다. 2년 전 이맘때는 의대 정원 2,000명 확대와 마약과의 전쟁, 국정감사에서 팽팽히 부딪히는 여야 간 이슈로 정치권이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던 시기였다.
그런데 어느 날 특유의 저음 목소리 톱스타 L이라는 이름과 마약이란 단어가 언론에 등장하기 시작한다.
익명을 보장하기 위해 쓰여야 할 이니셜은 불필요한 여러 수식을 통해 누구나 알 수 있는 이름이 되었고 그 이름을 본 다른 언론들은 확인도 없이 소식을 퍼 날랐으며 ‘날리면’이 뭔지를 묻지도 못하던 이들은 마치 정의의 사도, 참 언론인 인양 알 권리를 내세우며 당사자와 가족들을 괴롭혔다.
정작 확인된 사실은 거의 없던 때였다. 3번에 걸친 마약 검사는 모두 음성이었다. 수사 홍보에 눈이 멀었던 경찰은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흘렸고, 굳이 포토라인 앞에 세워 구경거리를 만들었으며, 조회수에 눈이 먼 언론은 퍼 나르고, 사이버 레커들은 하이에나처럼 달려들어 물어뜯었다. 평소 좋은 이미지로 광고주가 뽑은 좋은 모델상을 받기도 했던 고인은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100억대 위자료 문제를 쏟아내는 언론과, 그동안의 좋은 이미지에 배신감을 느낀 대중들의 주홍 글씨 낙인이 이마에 새겨지며 여론판결은 이미 내려진 뒤였다.
단지 유명인이란 이름 하나로 이 모든 상황을 감내하기엔 본인과 가족에게 가해지는 가학적인 폭력을 견디지 못한 채 그는 극단의 선택을 하고 만다.
공인이나 유명인(연예인을 공인이라 하지 말자)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집단린치.
우리는 종종 스스로 인식하지 못한 채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참혹한 결론 뒤엔 마치 이런 결과를 원하지 않았던 참 언론인 듯 자살 예방 전문가 상담 전화 안내 문구를 기계적으로 붙이는 조금 정제된 기사에 잠시 불편함과 반성을 하곤 하지만 그때뿐이다. (고인의 장례식장을 무차별적으로 찾아 소란을 피웠다는 유튜버들에겐 인간의 존재에 대한 환멸까지 느끼게 된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는 ‘우리가 좋은 어른이 되고 있는가’를 묻는 드라마였다. 치열한 투쟁적 삶, 경쟁이 선이고 정의인양 승리에는 과정의 올바름이 필요치 않다는 사회적 가스라이팅은 좋은 어른이 사라진 시대를 만들었고, 타인의 고통과 심지어 죽음마저도 돈벌이에 이용하는 악독한 어른이 넘치는 사회를 만들었다.
기억에 남았던 고인의 대사가 오늘도 마음을 울린다.
죽고 싶은 와중에 죽지 마라.
당신은 괜찮은 사람이다.
파이팅 해라.
그렇게 응원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숨이 쉬어져.
고맙다. 옆에 있어줘서…
—<나의 아저씨>, 박동훈의 말
아련히 남아있는 ‘좋은 어른’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던 <나의 아저씨>
박동훈은, 이선균은 ‘좋은 어른’이었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전지적 시점-
테라피스트의 말_
‘고맙다 옆에 있어 줘서.’ 곁에 머무른 <나의 아저씨>
제가 참, 많이 좋아하는 드라마 〈나의 아저씨〉 이야기에 반갑게 고개를 끄덕이며 읽어 내려갔습니다. 저도 이 드라마를 서너 번은 돌려보았고 대본집까지 사 두었으니 제게는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 인생 드라마입니다.
지켜야 할 게 많아서 울 수조차 없는 사람, 박동훈.
울 자격조차 없다고 여겨온 사람, 이지안.
이 드라마는 세대의 위아래가 아니라, 세대를 넘어 서로의 옆자리에 조용히 앉아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처음에는 박동훈과 이지안 두 인물에 집중했지만, 반복해서 볼수록 제 눈에 들어온 것은 후계동 골목의 작은 술집, 정희네였습니다.
동네 골목에 자리한 허름한 술집 정희네는
특별한 장소가 아닙니다.
인생을 바꿔주는 말이 오가는 곳도 아니고, 누군가의 문제를 마법처럼 해결해 주는 공간도 아닙니다. 그저 늘 같은 자리에 있고, 언제 가도 문이 열려 있으며, 혼자 가도 누군가와 함께 가도 늘 다정하게 맞아주는 곳입니다. 사람들은 그곳에 모여 소주 한 잔 앞에 두고 각자의 하루를 내려놓습니다. 잘 버텼다는 이야기, 도저히 못 버티겠다는 고백,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아 말없이 앉아있는 침묵까지. 정희네는 그 모든 것을 허락해 주는 공간이었습니다.
그곳은 누군가를 고쳐주려는 장소도, 정답을 말해주는 곳도 아닌 그저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는 자리, 설명하지 않아도 돌아갈 수 있는 안전기지였어요.
애착이론에서 말하는 안전기지(secure base)란, 사람이 세상으로 나아갔다가 두려울 때 언제든 돌아와 감정을 회복할 수 있도록 존재 자체로 지지해 주는 안정적인 대상이나 관계를 뜻으로 저는 드라마 속 정희네가 바로 그런 세상의 안전기지처럼 느껴졌답니다.
아마도 그곳에서의 이야기가 소비되지 않기 때문일 것이며, 누군가의 실패가 웃음거리가 되지 않고, 누군가의 상처가 소문으로 퍼지지 않는 곳이기 때문이겠지요. 그래서 후계동 사람들은 삶이 버거워도 다시 밖으로 나갈 힘을 그곳에서 조금씩 회복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나운서님은 “우리는 대부분 하루하루를 버티는 미생의 삶인가 보다.”라고 하셨지요. 그래서일까요.
우리에게는 정희네와 같은 ‘안전기지’가 더 절실해졌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어쩌면 현실의 배우 이선균에게는 판단 없이 “지금은 그냥 힘들다고 말해도 괜찮다”라고 이야기를 꺼낼 수 있는 정희네 같은 자리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차웨이 작가의 그림책 <그랬구나!>은 한 마디의 말이 여러 사람들을 거치며 얼마나 쉽게 변형되고 부풀려지는지를 보여줍니다. “오늘은 너무 힘들어.”라는 소의 이 말은 이내 다른 이야기로 부풀려 번져만 가고, “너는 지금 어떤 상태야?”라고 아무도 다시 묻지 않습니다. 그림책의 마지막에서야 농부는 소문의 길을 거꾸로 따라가 처음의 말 앞에 도착해 이렇게 말합니다.
“아, 그랬구나.”
이 말은, 무너진 안전기지를 다시 만들어 주는 말처럼 느껴집니다.
아나운서님이 짚어내신 ‘사회적 관음증’은 어쩌면 우리가 누군가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는 자리를 잃어버린 채, 자극적인 장면만 떠도는 사회의 초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해 대신 판단이 앞서는 시대에서 어쩌면 우리는 점점 “그랬구나”라고 말해줄 어른, 그런 안전기지를 잃어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구에게나 삶에서의 안전기지는 필요합니다.
강한 사람에게도, 늘 잘 버텨온 사람에게도, 무너지지 않겠다고 말하는 사람에게는 더더 욱요.
드라마 〈나의 아저씨〉는 “우리는 과연 좋은 어른으로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끝까지 놓지 않았던 이야기였습니다. 경쟁이 미덕이 되고, 이기는 것이 정의처럼 소비되는 사회에서 타인의 고통은 쉽게 구경거리가 되고, 실패와 상처는 순식간에 이야기의 재료가 됩니다. 그런 시대 속에서 박동훈이라는 인물은 누군가를 판단하지 않는, 그저 곁에 머물러 주는 좋은 어른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죽지 마라.” “너는 괜찮은 사람이다.” “고맙다, 옆에 있어 줘서.” 어쩌면 이 말들은 세상을 바꾸는 거창한 선언이 아니라 한 사람이 다시 숨을 쉴 수 있게 해주는 작지만 분명한 안전기지 같은 말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좋은 어른’이란 단단함을 증명하는 사람이 아니라, 누군가가 돌아올 수 있는 자리를 조용히 내어주는 사람입니다. 흘러가는 것은 흘러가는 대로 두고, 변해가는 것은 변해가는 대로 놓아주며 누군가의 곁에서 말없이 함께 걸어줄 수 있는 사람. 그렇게 한사람의 삶에 조용한 안전기지가 되어주는 어른으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고맙다, 옆에 있어 줘서.”
그 말 한마디로 한 사람의 삶이 다시 살아질 수 있음을 깨닫게 해 준 이야기 <나의 아저씨>.
박동훈은, 이선균은
누군가의 곁에 머물러 주었던 좋은 어른이었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테라피스트 시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