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냥조각 Nov 07. 2024

결제하고 튀어!

결제부터 하고 보는 하고재비의 이야기

<하고재비-무슨 일이든지 안 하고는 배기지 못하는 사람을 일컫는 경상도 말>     


며칠 전 문득 궁금해졌다. 인생의 반이 조금 안 되는 시간을 산 나는 어떤 사람인건지.

깊게 고민하지 않아도 답이 떠올랐다. 40여 년의 내 인생을 대변할 수 있는 말은 하∙고∙재∙비

한 곳에 머물지 못한 채 부유하는 인생, 의식의 흐름에 따라 선택과 실행을 반복하며 살아내는 현재진행형.


그렇다, 나는 하고재비이다.     


대단한 도전과 성취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돈이 사용되는 경우에는 버그가 발생하긴 하지만 대체로 결제로 이어진다. 신용사회에서 결제가 어려운 것은 아니니깐. 이후 파도처럼 덮치는 후회 앞에서는 ‘인생 수업료 지불했다!’라고 허울 좋은 럭키비키를 외치면 그뿐.


결제하고 튀어버린 얼기설기 뭉쳐져 있는 내 삶을 고백해 본다.     


영어공부 하고재비

갓 대학생이 되었을 무렵 외국인 친구를 사귀면서 영어를 배울 수 있는 영어학원이 인기였다. 꽤 비싼 수강료에 망설이던 때, 하필 그때 받은 망할 전화 한 통. 그 당시 인기 시트콤인 ‘논스톱’을 영어로 더빙해 카세트테이프에 담아냈단다.

카세트테이프는 철 지난 유물 같은 것으로 MP3 플레이어라는 신문물이 밀려오기 시작하는 때였다.

텔레마케터의 나긋한 목소리와 영어 끝장내자 라는 방향 잃은 의욕의 콜라보로 24개월 할부라는 결과물을 만들었다. 도시락 보다 큰 어학용 카세트 플레이어는 덤.

2년 동안 정기결제 알림이 올 때마다 엄마는 나를 곱게 모셔져 있는 그 물건들과 세트로 애물단지 취급했다.


원어민 영어회화 패키지, 원서 읽기 수업, 영어공부법 책 구매 등을 지속적으로  시도했으나 실력은 역시나 제자리걸음이다. 

지금도 스르르 학습된다는 야나두를 결제 한 사실은 남편과 아이들에겐 쉿!     


쇼핑엔 사고재비

유명 브랜드, 커다란 로고의 옷을 즐겨 입는 것은 아니다. 그날의 기분에 찰떡 같이 맞는 옷을 주섬주섬 집어온다고나 할까.

탈의실에서 옷을 여러 번 갈아입는 날은 결제의 신이 강림하는 날. 점원이 웃으며 권해주는 옷은 마다하지 않는다. 난 지금 이 상황에  꽂힌 것. 뜬금없이 돈지랄을 하고 싶은 날 인지도 모른다.

 이 부분에서는 나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거절이라는 것이 어려운 사람. 점원의 친절한 응대에 보답해야 하는 사람. 그런 어설픈 마음이 사고재비를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취미생활 하고재비

가구 만들기였는지 우쿨렐레였는지 무엇을 먼저 시작한 것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둘째 아이가 유치원을 다니기 시작한 후 끌리는 것이 생기면 일단 시작했다.

원하는 디자인의 원목가구를 다듬고 고운 색으로 옷을 입히면 뿌듯함이 몰려왔다. 손가락을 튕겨 맑은 소리 읊어내면 내 마음도 함께 통통 솟아올랐다.

그 뒤로도 바이올린, 기타, 퀼트, 드립 커피, 요가, 필라테스, 골프, PT, 독서 등 여러 경험이 나를 거쳐 갔다.     

그중 일부는 나에게 정착했고 대부분은 그저 흘려보냈다.


하고재비 짓의 최고봉은 단연 육아였는데 책 육아를 기본으로 시작해 제주로 이사까지 하게 된 제 멋대로의 엄마이다.


하고재비로 산다는 것은 이것저것 찔러보기만 하는 실속 없는 삶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해본 것 중 성공한 것보다 실패한 것이 더 많다. 당근마켓에 물건 내놓는 일이 또 다른 취미가 될 지경이다.


그럼에도 ‘나’라는 사람이 어떤 것을 좋아하고 무엇을 소중히 여기는지 알아가는 길이 하고재비의 길이라 생각한다.


각각의 경험으로 어우러진 나를 사랑하는 방법, 오늘도 실행하는 사고재비, 하고재비!!      


사진출처 :  pixabay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