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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안 Feb 14. 2018

어쩌다 벨기에 교환학생

정신 차려보니 브뤼셀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왜 벨기에로 가기로 한 거야?


 정말 많이 받은 질문이다. 어쩌다 보니 벨기에로 파견된 거라서 딱히 왜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다. 
생각해 보면 교환학생도 어쩌다가 온 것 같다. 어릴 때부터 유럽에 가는 게 로망이긴 했다. 파리가 그렇게 가 보고 싶었다. 에펠탑이 보고 싶었던 건 아닌데 그냥 그 거리에 있고 싶었다. 해외여행을 몇 번 가 보긴 했지만 아시아권을 넘어가 본 적은 없어서 유럽이라는 대륙 자체에 막연한 기대가 있기도 했고.

대개 유럽을 가는 경우 한 달 정도를 잡고 해외여행을 하고 오던데 나는 그것보다 조금 더 오래 있었으면 좋겠다. 오래 살려면 해외에서 근무를 하거나 교환학생을 가면 되는 거려나. 어차피 해외에서 오래 살고 싶다는 생각은 했었으니까 졸업 전에 교환학생 가는 것도 좋겠다.

라는 생각으로 어영부영 대학교를 다녔고 시기상으로 내년 1학기나 2학기쯤(2018년)에 가면 참 좋겠다고 막연하게 생각했었다. 그러다 우연히 교환학생 지원 설명회가 있어서 정보를 얻을 겸 참석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 설명회에서는 간략하게 정보만 얻고 제대로 준비하는 건 한 텀 쉬고 다음 기회에 지원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막상 설명회를 듣고 나니까 생각보다 나한테 남은 기회가 없었다. 2018년 1학기에 가려면 2017년 여름방학에 지원을 했어야 했고 두 달 만에 교환학생 지원 준비를 마쳐야 했다.


 걱정했던 점수보다는 높았지만 그리 많은 선택지를 허용하지 않았던 애매한 토플 성적을 들고 일단 갈 수 있는 모든 유럽 대학을 적었다. 10지망까지 쓸 수 있었는데도 쓸 수 있는 학교가 여섯 개밖에 없어서 그제야 아이엘츠라도 봐서 영국 대학도 좀 비벼볼 걸 후회를 했다. 그 적은 선택지에서 벨기에는 3지망이었다. 벨기에 아래로는 스웨덴과 노르웨이. 최근 읽은 책과 행복이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고 얼 탄 채로 면접을 마무리했는데도 어쨌든 교환학생 붙긴 붙었다. 사실 최종적으로 여섯 명의 정원을 다 못 채우고 다섯 명이 벨기에로 날아왔으니 4지망 이하로 떨어질 이유가 전혀 없었다.
 심지어 내가 한 학기 동안 공부할 VUB(Vrije Universiteit Brussel, 브뤼셀 자유대학)도 어쩌다가 우리를 받았다. 원래 내가 다니는 고려대학교와 VUB는 연구 쪽으로만 교류협력을 하는 관계였고 교환학생에 관해서는 협력관계를 맺은 바가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내가 지원할 때 VUB 측에서 실수로 교환학생 파견 허가를 냈고, 고려대 측은 VUB가 실수를 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고 일단 학생 모집을 확인했으니 교환학생 모집 학교 목록에 넣을 수밖에 없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그냥 새로 교환학생을 모집하나 보다 짐작하고 지망 학교 목록표에 적은 거고. 어쨌든 VUB 측 착오이기 때문에 교환학생 파견 확정이 취소되는 일은 없었다.
 그게 내가 벨기에로 오게 된 경위다. 어쩐지 벨기에로 교환학생을 온 '이유'보다는 '경위'라는 단어가 더 어울릴 만큼 특별한 목표의식 없이 덜컥 붙어버린 것 같아 되려 걱정이었다. 

 교환학생을 가고 싶었던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학업계획서에도 다양한 사람들과의 문화 교류를 주요 지원 동기로 썼을 만큼 나는 외국 가서 공부하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그저 아시아를 벗어나서 여행을 해 보고 싶었고 외국에서 생활자로 살아보고 싶었다. 그리고 극한 위기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궁금했다. 말도 안 통하고 모든 게 낯선 동네에서 나는 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일까, 일단 회피하고 보는 사람일까? 나를 던져보고 관찰해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곳에서 겪게 될 지독한 외로움을 나는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하기도 했고. 정말 도전과 위기 극복만이 교환학생을 가는 이유였다면 교환학생보다는 무작정 외국 가서 살기라던가 워킹홀리데이 쪽을 도전하는 게 더 취지에 걸맞겠지만 안타깝게도 그 정도의 용기는 아직 부족했던 걸로. 

입국 후 일 주일 간 머물렀던 브뤼셀 안더레흐트의 저녁.


 페이스북에 그렸던 만화에서 장난스럽게 벨기에에 가게 된 건 운명이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어쩌다 보니 가게 되었다는 말도 맞고 운명이라고 한 말도 맞는다고 생각한다. 그냥 막연히 유럽에 가 보고 싶었던 어느 대학생이 우연히 벨기에를 만나 자리 잡고 정 붙이고 살아갈 뿐이다. 처음엔 브뤼셀에 불시착했다는 표현을 쓰고 싶었다. 그 누가 내가 벨기에에서 학교생활을 할 거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그런데 불시착이라는 말을 쓸 만큼 브뤼셀이 완전히 예상 밖에 있던 지역도 아니고-어쨌든 내가 지원 학교로 적었으니까- 그만큼 내 교환학생 생활이 불행하게 시작하는 것도 아니다. 아직 브뤼셀이 나의 운명이라고 말하기엔 우린 조금 더 정을 들여야 하지만.

 그래서 중요한 건 내가 왜 여기에 왔느냐는 질문보다 여기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느냐는 질문일지도 모른다. 내가 꼭 벨기에에 와야 한다는 열망도 이유도 없었지만 나와 벨기에는 이제 막 처음 만난 사이일 뿐이다.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에 대해 알아가야 하는,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관계다. 그러니 나는 이곳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저 반년 후 돌아갈 내가 지금보다는 좀 더 나은 모습이었으면 좋겠다고 조심스럽게 바랄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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