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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안 Feb 20. 2018

여분의 삶에 대해

(1) 레스토랑에서 강제로 여유를 선물받았다 

벨기에에 도착한 지 3주가 다 되어갑니다. 아직 개강도 완벽하게 하지 않았고 모든 것이 낯선 새내기 생활자이지만 그 사이에 행복을 느끼는 순간도 여럿 있어서 잊지 않고 기록해보려 합니다.


1.

익셀에 있는 기숙사에 들어오기 전 일주일은 안더레흐트에서 지냈다. 딱히 정해져 있는 일정이 있던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매일 눈 뜨면 오늘은 무엇을 할지 가만히 누워서 생각하곤 했다. 어느 순간부터 일정으로 꽉 찬 캘린더를 보면 거부감을 느꼈다. 그래서 그런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그 순간들이 소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물론 학업장려비 지원서도 쓰고 카드로 골머리를 썩기도 하면서 열심히 무언가를 하기는 했지만.

이 날도 잘 수 있을 만큼 늘어지게 잔 뒤에 일어나니 점심때가 이미 지나있었다. 무언가 제대로 된 밥을 먹고 싶었다. 어차피 일주일 지내다가 다시 집을 옮길 거라서 이것저것 식재료를 사기에는 짐을 더 늘리는 꼴이라 경제적이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밖에서 밥을 사 먹고 있었다. 어차피 반년 동안 지겹도록 밥을 해 먹을 텐데 첫 며칠은 여행자의 마음으로 돈을 조금 쓴다 한들 괜찮지 않을까 하며 스스로 위안을 삼기도 했다. 그래서 무작정 내가 알고 있는 그나마 번화한 곳으로 나갔다. (나중에 다시 동네 탐방을 하면서 알게 된 거지만 정말 그쪽 말고는 외식할 만한 곳이 없었다) 마르게리타 피자를 머리에 떠올리며 그런 비슷한 음식을 파는 피자집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꽤 준수한 가격의 파스타 파는 집에 갑자기 꽂혔다. 내가 먹고 싶은 거 먹어야지. 맛집인지 아닌지도 모르고 그냥 들어가 버렸다.


창가 쪽 구석 작은 테이블에 앉아 주문을 기다렸다. 어딘가에서 들었는데, 벨기에인지 유럽인지는 모르겠지만 웨이터가 올 때까지 알아서 기다리는 게 기본적인 예의고 'Excuse me'하면서 부르는 게 오히려 실례라고 들어서 열심히 주문 봐주시는 분과 눈을 마주치려고 노력했다. 사람이 그렇게 많아 보이지도 않았는데 직원들끼리 할 말이 뭐가 그리 많은지. 서빙을 봐주시는 머리 희끗한 아저씨는 한참 직원이랑 떠들다가, 잠깐 밖에 나가서 담배를 피우다가 아는 사람을 만났는지 수다를 떨다가 들어오고 한참 후에야 나에게 주문을 받으러 와주셨다. 

이탈리아 본토식은 아니겠지만 외국에서 만드는 까르보나라가 궁금해 도전해보기로 했고 벨기에 맥주가 유명하다고 하니까 큰 사이즈로 같이 주문했다. 짧은 불어, 그리고 불어가 막힐 때 자연스럽게 나와버리는 영어로 주문 완료. 분명 파견 전 학교 오리엔테이션에서 벨기에는 영어권으로 분류되었고 에어비앤비 호스트도 여기 사람들 웬만하면 영어 쓸 수 있으니 염려하지 말라고 했는데 내가 직접 마주하는 브뤼셀은 조금 달랐다. 불어로 말을 시작하는 게 당연한 사람들. 불쾌하진 않았다. 그냥 새삼스레 신기할 뿐.

사진엔 없지만 노른자가 따로 담겨 나왔다. 노른자 같이 주는 까르보나라 처음 먹어봄.

밥을 먹으면서 주변을 둘러보는데 그 풍경 자체가 퍽 여유롭게 느껴졌더랬다. 이 곳이 카페 겸 식당인 느낌이어서 나처럼 밥을 먹는 사람도 있었고 어떤 사람은 커피만 주문해서 마시고 있었다. 주문을 기다리는 사람은 조급해하지 않고 동행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여행자가 아니라 다행이었다. 주문과 서빙 모든 것이 느리게 흘러가는 이 곳에서 촌각을 다툴 정도로 일정이 꽉 차 있는 여행자였다면 답답하고 화가 났을지도 모른다. 여유를 강제로 받은 기분이었다. 새로운 경험이었다. 여유를 가질 수밖에 없는 시스템 속에서는 누구든 여유로운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 

그 느슨함이 좋았다. 종업원을 포함한 모든 사람이 같은 공간에서 각자의 일을 하고 있었다. 밥 먹는 데 두 시간이 걸리든 열 시간이 걸리든 누구도 신경 쓰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여서 나도 기꺼이 자유로운 느슨함에 뛰어들기로 했다. 차를 하나 시키고 할 수 있는 만큼 오래 있어보기로 한다. 노트북을 들고 오거나 책을 들고 왔다면 좋았을 텐데 아쉽게도 나한텐 둘 다 없었다. 핸드폰은 이미 성능이 많이 떨어져서 30분만 붙잡고 웹서핑을 해도 금방 배터리가 반으로 닳았다. 가지고 있는 거라고는 작은 여행회화책이 전부여서 불어 파트를 찾아 휙휙 책장을 넘겼다. 

차를 시켰는데 로투스랑 설탕을 같이 줘서 감동받았다. 설탕은 필요 없었지만 로투스는 맛있음.

구름 낀 날이 일상이라는 벨기에에서 다행히 이 날은 햇빛이 잘 들어오는 날이었고, 종업원 아저씨는 담배 피우러 왔다 갔다 하고 있으니 내가 뭐 하는지 관심이 있을 리가 없었다. 립톤 티백이긴 했지만 어쨌든 차는 향이 좋았다. 밥 먹고 무엇을 해야 할지 정해진 게 없으니 있고 싶은 만큼 있어도 됐다. 그냥 창가 바라보면서 하늘 보고, 지나다니는 사람 보고, 맞은편 아저씨가 커피 시키고 핸드폰 하는 거 보면서 외국이라고 다를 것 없다는 생각 한 번 했다. 계산대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종업원이 직접 영수증 들고 와서 바로 앞에서 거스름돈을 돌려주니 다시 주변을 돌아보며 종업원과 눈이 마주치기를 기다린다. 앞 테이블에서 계산할 때 썼던 문장을 기억해서 같이 반복하고, 불어만으로 카페 안의 모든 루틴을 마쳤다는 사실에 혼자 즐거워했다.


사실 저 날 먹었던 까르보나라는 첫 두 입만 감격스러웠고 나머지는 의무감에 먹었다. 베이컨이 너무 많아서 베이컨 남기기 싫어 천천히 꾸역꾸역 먹었다. 그럼에도 이 식당은 벨기에 와서 먹었던 레스토랑 중 내 기준 TOP 3 안에 든다. 맛있어서가 아니라 그 날의 분위기, 내 설렘과 들뜸이 너무 기분 좋아서. 굳이 시간 내서 꼭 다시 찾고 싶은 곳이기는 하다. 지금 사는 기숙사에서 조금 멀어서 언제 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그때는 오믈렛 먹으러 갈 거다. 물론 처음 갔을 때만큼 만족스럽지는 못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 곳은 내가 브뤼셀에 도착해 처음 만난 우연함과 행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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