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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안 May 18. 2018

권태로운 여행자의 넋두리

귀국 일정을 당기려는 자의 변명 (1)

오늘 드디어 LOT 항공에 전화를 했다. 귀국 편 비행기를 당기고 싶은데 비용이 얼마나 되는지 알고 싶다고 물었다. 이전에 끊었던 귀국행 티켓은 7월 27일이었고, 나는 7월 16일 비행기 편을 물어보았다.

누군가는 고작 10일이 아깝다고 얘기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 10일도 여기 있기 아까웠거든.


2월에 브뤼셀에 도착한 이후로, 나는 거의 매주 여행을 다녔다. 초반 3주는 벨기에 도시 여행을 다녔고 그 뒤부터 온 유럽을 쏘다니기 시작했다. 오롯이 혼자이고 싶어 떠난 발렌시아, 봄 방학을 맞아 떠났던 이탈리아와 몰타, 대학 동기들과 떠났던 동유럽, 출발 세 시간 전 예매한 버스로 즉흥적으로 떠난 쾰른, 룸메이트의 여행 계획에 얹혀 8시간 야간 버스를 타고 갔던 런던...


여행에 권태가 왔다.

시스티나 경당에 압도된 이후 각 도시의 성당은 다 비슷해 보이고 흥미가 떨어졌다. 건축물의 화려한 외관도 보다 보니 평범한 건물처럼 보였다. 무감각해지고 있음을 느꼈다. 나는 어떤 걸 예쁘다고 느껴야 하지? 무엇에 감탄해야 하는 거지?


동유럽 여행을 같이 갔던 동기들은 북유럽에서 교환학생으로 지내고 있었다. 자기가 사는 동네에는 이런 건축 양식이 없다며 연신 프라하의 건물에 감탄했다. 나는 무덤덤하게 보고 있었다. 별다를 것 없다고 생각했다. 고딕 양식의 성당은 쾰른 대성당의 재현 같았고, 파스텔 색감의 건물들은 몰타에서도 많이 봤었으니까. 잘난 척하려고 그런 생각을 했던 게 아니다. 어느 순간 무뎌져 있었다.


당시 나에게 절실하게 필요했던 건 아무 계획 없이 며칠 동안 침대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되는 공백이었다.

연속으로 잡힌 여행 스케줄은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이번 주 여행이 끝나면 다음 주엔 다른 곳으로 여행을 가야 했다. 밀린 숙제를 처리하듯 여행을 다닌다는 기분이 들었다. 교통편 예약과 숙소 예약은 별 게 아니면서 별 일이었다. 미미한 정도로 생긴 스트레스가 중첩되기 시작했다. 이게 누굴 위한 여행이지, 이게 의미 있는 여행이 맞나?


일주일이 넘어가는 여행에선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문득문득 했다. 관광 명소를 보는 일은 즐거웠지만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던 것 같다. 정착하지 못하고 부유하는 민들레 홀씨가 되는 기분이었다. 유럽에 오는 일이 흔치는 않으니 있는 동안 많이 돌아다니자고 생각하긴 했다. 그것과 별개로 장기 여행에서 생기는 피로감이 성실하게 쌓여갔다. 이래서 사람들이 여행 스케줄 중간중간에 휴식을 넣는구나. 미련하게도 지금까지 나의 여행에 여유는 없었다.


스스로에게 물었다.

일주일 여행도 버거운데, 종강하고 3주를 더 여행자 신분으로 유럽을 떠돌아야 한다고? 피로감에 쌓여서는, 비슷한 풍경에 무뎌져 제대로 감상하지도 못한 채 도장깨기 하고 다니게 될 텐데, 그런 여행이 정말 의미가 있어?

오랫동안 고민했다.

조기 귀국이 유력한 카드로 떠오른 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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