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국 일정을 당기려는 자의 변명 (2)
유럽 여행은 오래된 로망이었다.
고등학생 때 세계지리를 배우면서 자유로운 어른이 되었을 때 전 세계를 누빌 상상을 했다. 수능 공부하기 싫을 땐 유랑에 들어가 다른 사람들의 여행기를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분명 그랬다. 유럽에 가는 건 오랜 꿈이었다.
스물넷의 나와 열아홉의 내가 다르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면 나는 조금 더 일찍 움직이지 않았을까?
분명 나는 유럽에 도착했는데 감흥이 생각만큼 크지 않았다. 매 순간 감격하고 아름다움에 감탄해야 할 것만 같았는데.
과거의 내가 꿈꿨던 소망을 지금의 내가 대신 이뤄주려고 이 고생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지금 이 곳에 있기를 원해서 이 곳에 있는 게 아니라.
유럽의 4월은 부활절이 있는 축제 기간이다. 시기는 조금씩 달라도 최소 일주일, 최대 2주일 간의 휴가를 갖는 것 같았다. 여행 계획을 짜다가 문득 생각했다.
"솔직히 지금 제일 가고 싶은 데는 일본인데. 가서 라멘 먹고 오코노미야끼 먹고 오고 싶어."
"그냥 한국 다녀올까? 일본 갔다 들렀다고 말하면서?"
굳이 아시아를 건너 유럽에 정착한 동양인이 아이러니하게도 유럽에선 아시아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집순이와 여행의 궁합도
애초에 나는 여행을 하지 못하면 몸이 뻐근하고 밖에 나가고 싶어 안달 난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정통 집순이다. 일주일 동안 밖을 나가지 않아도 전혀 답답함을 느끼지 않는 사람, 침대에서 핸드폰과 노트북만 있으면 내 세계가 완성되는 사람.
유럽 여행을 오고 싶었던 이유를 다시 떠올려본다.
원래 가장 가고 싶었던 곳은 우유니 소금사막이었다. 그래도 아시아 반경 한 번도 나가본 적 없는 사람에게 남미는 꽤 레벨이 높은 여행지일 테니, 유럽 여행을 하면서 스스로를 단련시키자는 생각에서 출발했던 것 같다. 물론 파리도 막연한 로망이었고, 모로코의 염색 공장도 가보고 싶었지만...
그 열망이 너무 오래 전의 기억이라서일까? 아니면 애초에 유럽 여행이 나에게 절실하지 않았는데 분위기에 휩쓸려 불시착하고 만 것일까? 페이스북에 수많은 여행 제보가 넘실거리고 인스타그램엔 지인들의 여행 사진이 끊임없이 올라오는데 나는 그 무엇에도 공명하지 못했다. 예쁘다, 가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뿐이었다. '저거 예쁘다'는 말이 '사달라'와 같지 않고, '맛있겠다'라는 말이 '지금 먹어야 한다'라는 말과 같지 않듯이 내게 여행기와 사진, 영상이 그랬다. 예쁘다는 것은 내가 잘 알겠다. 끝!
굳이 지금일 필요가 없어서
처음 이 곳에 교환학생으로 도착했을 때 최대한 유럽의 많은 나라를 돌다 오고 싶었다. 사실 독일의 라미 본사에서 만년필을 사 오자는 목표와 스위스에서 패러글라이딩을 하겠다는 목표 이외에는 아무것도 정해진 것 없고 하고 싶은 것 없는 상태였다. 남들 다 가고 싶어 하는 여행지도 나는 절실하지 않았다. 그냥 이왕 온 김에 기회 잘 살리고 가려면 열심히 여행을 다녀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 나한테 중요한 건 유럽 대륙의 몇 프로를 여행했는지 정량적 수치를 높이는 일이었다.
유럽 여행 일정을 짜다가 동선이 어떻게든 맞지 않아 터키와 그리스를 제외했다. 산토리니는 가고 싶은 곳이 맞았고, 터키는 원래 아무 생각 없었지만 가려고 하다가 불발된 나라여서 괜히 가고 싶은 나라였다. 하지만 학기 중에 시간을 내기도 애매하고 종강 후 돌기에도 동선이 맞지 않아서 다음 기회를 기약하기로 했다.
비슷한 이유로 베를린과 폴란드, 베네치아를 선택지에서 미련 없이 지웠다. 동선이 안 맞으면 안 가면 그만. 다음에도 오면 되니까.
혹자는 그렇게 말할 수 있겠지. 기회가 그렇게 쉽게 찾아올 것 같냐고. 기회가 찾아오지 않더라도 그만이다. 내 눈으로 무언가를 직접 봤을 때의 감동을 모르지 않는다. 그렇지만 평생 그 풍경을 모르고 산다 한들, 지금의 나는 만족스럽게 잘 산다. 지금 절실하지 않을 뿐이다.
반복되는 여행 속에서 이 시간과 여행이 아깝다는 생각을 했다. 매너리즘 속에서 무던하게 이 풍경을 흘려보내느니 차라리 정말 이 곳을 오고 싶을 때 한껏 이 도시를 즐기는 게 더 많은 부분을 보고 더 많은 생각을 할 수 있게 만들어 줄 텐데. 그게 더 나에게 의미 있는 여행이고 내게 성장을 안겨다 줄텐데. 정말 유럽을 아끼고 싶은 마음이라면 그렇게 여행하는 게 더 나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있는 그대로 지금의 나를 인정하기로 했다. 유럽에 교환학생으로 와 있으면서도 여행에 게으른 나를 탓하지 않기로 했다. 있고 싶은 만큼 있고, 돌아오고 싶을 때 돌아오자고. 그렇게 매력적인 이 곳을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다시 만나자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