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3
스물아홉에 한국을 떠나 머나먼 나라에 공부를 하러 왔다. 일이 년도 아닌 6년 동안이나.
내가 도피유학을 하고 있는 건지 가끔은 의문이 든다. 도피유학의 뜻이 원하는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고 해외로 간 사람을 의미한다면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대학은 이미 졸업했지만, 의전원은 거의 사라지는 추세고 수능으로 도전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스카이 대학에 붙고도 의대, 약대, 치대를 가기 위해 포기하는 이 시기에 내가 성공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나는 대학 입시에서 사교육의 도움을 받기보단 혼자 독학을 했고, 머리도 좋은 편이 아니다. 그냥 성실하게 매일 노력해서 겨우 내신만 좋게 받았다. 벼락치기는 나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의 객관적인 위치를 다시 한번 깨닫고 나니 외국으로 눈을 돌렸다.
유럽은 입학은 쉽고 졸업이 어렵다고 하니 내가 정말 의사 할 자격이 없다면 유급을 할 것이고, 유급을 하면 깨끗하게 포기할 각오를 했다.
돈이 문제였지만 장학금을 받을 기회를 찾았고 그래서 올 수 있었다. 학비가 우리나라보다 비싸고 학자금대출 같은 것은 없기 때문에 장학금이 아니었다면 나는 정말 유학을 올 수 없었을 것이다.
해외로 목적의식이 없이 도피성으로 해외 유학을 간 것 또한 도피유학이라고 한다. 도피를 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목적의식이 없지는 않다. 의사가 꼭 되겠다는 생각은 항상 내 마음속에 깊게 자리 잡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늦은 나이에 일을 그만두고 떠난 것이 생각 없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에 변명을 할 생각은 없다. 비슷한 나이대에 다른 사람들은 모두 일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니까. 나 또한 그 부분에서는 매우 떳떳하지 못하다.
내 미래가 불확실해서 불안할 때도 많다. 내가 여기서 뭐 하는 거지? 통과하지 못하면 어떡하지? 한국에서 졸업하고 의사를 바로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거기다가 헝가리 의대가 해외의대 중에서도 타깃이 되어 이미지가 그다지 좋지가 않은 경우가 많다. 똑같은 의사 국가고시를 합격했는데도 제대로 된 의사라고 인정해주지 않는 분위기다.
다녀본 입장에서 돈 많은 애들에게 학위장사를 한다고 하기엔 졸업까지 너무 힘들다. 학교 교칙에 시험에서 몇 번 이상 통과하지 못하거나 몇 학점 이상 통과하지 못하면 퇴학까지 시킨다. 그 외에도 많은 교칙이 있어 아무에게나 졸업장을 주지 않는다.
말하기 시험이 주는 압박감도 상당하다. 한국에서는 출석을 정말 안 하거나, 아예 백지상태로 시험지를 제출하지 않은 이상 F를 주는 일은 드물다. 여기서는 말하기 시험이기 때문에 기준이상 통과하지 못하면 바로 1점(한국의 F)을 준다. 한 과목이라도 1점으로 통과하면 다음학년으로 올라가지 못한다.
한국의 의대처럼 예과, 본과가 없어 1학년때부터 무조건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 열심히 해도 학년에 못 올라가는 사람이 많다. 헝가리 의대를 좋게 봐달라고 하고 싶지는 않지만 어쨌든 호락호락하게 돈만 주면 의사 면허를 주는 곳이 아니다.
도피성이기엔 나에겐 너무나 여유가 없다. 내가 정한 나만의 규칙에 따르면 한 과목만 통과하지 못해도 이 과정을 포기할지도 모르겠다. 한국에서 대학을 다녔을 때보다 훨씬 더 공부를 많이 한다. 한 과목만 통과하지 못하면 유급을 하는 이 구조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다.
또한 나는 매일 너무 궁상맞게 살고 있다. 여기서는 한국처럼 전세가 있는 것도 아니고, 월세가 생활비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생각보다 너무 크기 때문에 다른 것들을 다 절약한다. 한국에서는 대학생이면 과외를 할 수 있을 텐데 여기서는 할 수가 없으니 답답하다.
나의 유학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보는 관점에 따라 나는 ‘도피성 유학’ 일 수도 있다. 도피성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으려면 끝까지 졸업을 하고, 한국 국가고시를 합격해 정말 의사가 되는 방법밖에 없다.
앞으로 긴 여정을 내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해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