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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리아 Jan 11. 2024

너희는 절대 이혼하지 마라 2

당신이 생각하는 낭만적인 이혼은 없다 part2

바보 같은 선택


  대부분의 가정 폭력범들이 그러듯, 폭행을 행사한 후에는 더욱 다정하게 대해준다. 거듭되는 사과와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약속들... 그래도 한 때 사랑했던 사람인데 한 번의 무력으로 내가 지금까지 쌓아왔던 것이 무너진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들은 심해 저 바닥으로 나를 끌어내렸다.


  당연하겠지만 스물셋의 어린 딸이 아홉 살 많은 남자와 결혼한다고 나섰을 때 부모님은 반대하셨다. 당시 우리 집 형편은 그다지 좋지 못했는데 간단하게 표현하자면 응답하라 1988에 나오는 덕선이네 집과 비슷했다.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부족하지 않게 자라왔는데 어느 순간 가세가 기울어서 스물 그즈음에는 경제적으로 많이 힘들었었다. 아버지는 해외로 돈을 벌러 가셨고, 어머니만 한국에서 고군분투하며 방 두 칸의 반지하에서 나와 동생을 대학에 보내셨다. 방학이면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업을 이어나갔다. 한 번은 친구들이 여름휴가를 가자고 제안했는데 그 장소는 여수-순천이었다. 친구들끼리 처음 가는 여행에 너무나도 가고 싶었는데 당시의 교통비 5만 원이 너무나도 무겁게 느껴지던 시기였던지라 망설였다. 중학생 때부터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이 나의 상황을 눈치채고 십시일반 돈을 모아서 함께 여행을 갔던 기억이 있다. 철이 없었던 나는 여행도 하고 학교를 다니면서 나름 즐겁게 보냈다. 간혹 수업 중에 채권추심 전화가 나에게까지 걸려오는 상황이 닥쳐오기도 했지만 부모님께서 어련히 다 해결하시려니 생각했다. 스물이 넘어도 세상물정 모르는 '철없는' 아이였던 나는 반지하에 사는 것 이외에 큰 불만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느 K장녀처럼 생계에 도움이 되고자 노력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오로지 수능만을 위해 작은 학교에 갇혀있던 나는 대학이라는 조금 더 큰 세상을 만나고 늘 보던 친구들이 아닌 더 다양한 군상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나의 지경이 넓어지고 있다는 것에 너무나도 짜릿한 기분을 느끼면서 나름대로의 빛나는 그 시절을 즐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아예 집안 걱정을 한 것은 아니었다.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일단 좋은 성적을 받는 것이었기 때문에 학업 자체에는 꽤나 집중을 했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공부를 조금 잘했던 나는 전액은 아니지만 일부의 장학금을 받으며 휴학 없이 대학을 다닐 수 있었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부모님께서는 많이 마음이 힘드셨고, 아프셨을 것이다.


"가난이 싫어서 도망가는 것이냐"  


  지금도 이 말을 내뱉은 아버지의 표정과 분위기가 생생하게 기억난다. 모든 것이 얼어붙은듯한 차가운 공기, 차마 소리 지르지 못하고 이를 악물며 참아내는 분노, 그리고 이런 상황까지 오게 한 자책이 혼재된 순간이었다.  그때는 왜 몰랐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말씀하신 아버지 마음이 찢어지게 아프셨을 것이라는 것을, 도망치듯 진행한 결혼이라는 것을......

  스물을 갓 넘긴 치기 어린 '사랑이라고 믿었던' 감정이었던 것이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옛말 그대로 부모님께서는 결국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딸이 아파하는 것을 견디지 못해서 결혼을 허락하셨다.   사랑하는 엄마, 아빠의 가슴에 대못을 쾅쾅쾅 박고 시작한 결혼이기에 더 잘 살고 싶었다. 5개월 만에 따귀를 맞는 모습이 아닌 행복하게 잘 사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었다. 이미 대못을 박아버렸기에 '이혼'이라는 선택으로 그 자리에 못을 다시 박기 싫었다. 당시에는 그것이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했지만 참 바보 같은 선택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건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맞았다는 사실을 부모님께 이야기하지 않았다.  이미 많은 부담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고, 그들이 내 상황을 알게 된다면 더욱더 마음 고생하실 것 같아서였다. 나만의 힘으로 이겨내려고 했다. 그때의 나는 부모님에게 더 이상의 상처를 안겨드리기 싫었고, 이 상황을 풀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결혼을 결심하고 밀어붙였을 때와 같이 가보지 않은 길이지만 할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자신감 같은 것 말이다.  거기에 더해 스물다섯도 안된 어린 나이에 '이혼녀'라는 시선을 감당할 자신이 무엇보다도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돌싱'이라는 타이틀이 손가락질받기 쉬운 시절이었다) 멍청이 같지만, 주변 지인을 통틀어 가장 먼저 축복받으면서 결혼식을 올렸기에 관심을 많이 받고 있던 시기였기에 그 모든 관심들이 동정이나 비웃음으로 변하는 것을 견딜 자신이 없었던 부분이 컸던 것이다.


  그렇게  첫 번째 이혼의 기회를 묻어두기로 했다. 정말 바보 같게도 말이다. 혹여 이 글을 보는 독자들에게 당신이 어떠한 이유에서든 연인에게 폭력을 행사당한다면 단 한 번의 용서도 없이 헤어지는 것을 권한다. 많은 사례에서 보듯 그리고 나의 어리석은 경험에서 보듯 분노에 못 이겨 주먹을 휘두른다는 것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성숙하지 못했던 스물셋의 어린 신부는 똥인지 된장인지 눈으로 구별하지 않고, 찍어 먹어보서야 알게 되었다.


  어찌 되었든 바보 같은 선택을 한 나는 그렇게 그를 용서하고 결혼을 이어가기로 했다. 서먹하긴 했지만 없었던 일로 묻어두고 가니 정말 아무 일도 아닌 거 같았다. 단 한 번의 실수일 거라고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거라고 약속했으니 앞으로는 좋은 일만 생길 거라 믿었다. 그렇게 별 다른 일 없이 평화롭게 지내다가 첫 아이를 임신하고 출산하게 되었다. 임신 전에 백두산에 다녀올 기회가 있었는데, 3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백두산 천지를 두 눈과 가슴에 담고 장백 폭포의 정기를 가득 받은 후 찾아온 큰애는 지금도 나에게 큰 의지가 되는 아이이다.  작디작은 아이가 지금은 엄마보다 20cm는 훌쩍 더 커버렸는데 별다른 사춘기도 없이 잘 자라준 아이에게 참 고마우면서도 미안하기도 하다.



  큰애가 두 살쯤 되었을 때, 우리 부부는 다시 한번 갈등에 휩싸이게 되었다. 물론 싸움의 이유는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사소한 문제일 것이다. 예를 들자면 '장난감 정리 좀 도와줘' 같은 작은 것에서 시작하는 갈등말이다. 전혀 싸울 거리가 아니었던 것에서 시작한 작은 불씨는 이내 크게 번져 커다란 화마가 되어있었다. 단순한 말싸움으로 끝나면 좋았을 것을 그는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선풍기를 두 손으로 들어 방구석으로 던졌다.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작은 플라스틱 조각들이 나와 아이의 앞까지 굴러왔을 때, 이것이 현실인가 싶었다. 이윽고 그는 서랍에서 망치를 꺼내 들었다.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혼수로 사 온 TV는 깨져버렸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그 망치가 나와 아이를 향하지 않았다는 점 하나 일 뿐, 온통 비현실적인 상황에 두려움은 내 온몸을 휘감았다. 마치 마음도 함께 부서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무엇보다도 가장 안전해야 할 공간인 '집'이라는 곳에서 있어서는 안 되는 '흉기를 이용한 공포감 조성'은 상상 이상의 공포였다. 힘껏 휘둘러  TV 위에 선명하게 드러나는 파괴의 흔적은 내 가슴에 영원히 박제되어 있다.  어린 신부가 부모님 가슴에 못을 더 이상 박기 싫다며 참아왔던 상처들이 수문을 열어버린 댐처럼 폭발적으로 새어 나왔다. 이런 일이 내 삶에 일어날 줄은 감히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고, 이제는 나 혼자가 아닌 아이까지 있는 상황에서 이 작은 생명에게 생채기를 냈다는 죄책감이 나를 짓눌렀다.  아이에게는 절대 보여주고 싶지 않은 장면이다. 제발 커서도 기억하지 말라고 간절하게 바랬지만 아무리 두 살이라고 해도 충격적인 기억은 오래 남는 법인지 큰애는 제법 그때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부모로서 죄스러운 부분이다.


  아이는 그 자리에 그대로 앉은 상태로 얼굴이 시뻘게져서 소리를 지르며 울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아이를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아이의 눈 속에서 나온 그 눈물은 마치 나의 마음을 대신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와 그 사람의 무책임한 행동이 아이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남겼는지를 이내 알 수 있는 순간이었다. 과거, 나만 다치고 아이는 겪지 않아도 되었을 첫 번째 이혼의 기회. 그때를 날려버리고 지속하고자 한 바보 같은 선택이 낳은 결과가 집안의 살림이 부수어지고, 고함과 울음만이 가득한 집이라니!!!! 감정은 내 안에서 온갖 감정들과 얽혀 더욱 무거워졌다. 아이의 울음소리는 마치 우리 가정 안에서 울려 퍼지는 비극의 트리거처럼 들렸다. 나는 스스로도 지키지 못하고 아이까지 희생시켰다는 생각에 정신없이 전화기를 들어 112를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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