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봄, 멈춰버린 시간 속에 사라진 별

Ep.2 그해 여름, 아침 햇살처럼 눈부셨던 그

by luna Han 윤영

그해 여름은, 햇살처럼 눈부시고 뜨겁게 마음에 새겨진 기억의 출발이었다.


첫인상은 깊었지만, 그 기억은 이내 희미해졌다.

그 후로는 동아리방에서 그를 볼 수 없었다. 아니, 내가 잘 가지 않았다.

대학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채 버거운 1학기를 보내고 있었으니까.



다시 그를 마주한 건 여름방학이었다.


방학이면 전시를 앞둔 동아리방은 밤새 깨어 있었고,

여회원들은 순번을 정해 아침마다 반찬을 전해주었다.


신입인 우리는 혼자서는 현상실이나 인화실에 들어갈 수 없었고,

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해 늘 선배들과 함께였다.



그날도 나는 반찬을 들고 동아리방 문을 열었다.


밤샘 작업 끝에 아침을 여는 동기들과 선배들 틈에 그가 있었다.

“왔니?”

그 한마디를 남기고 씻으러 나가는 그의 뒷모습에,

아침빛인지 모를 강한 기운이 번졌다.

아침 당번일 때마다, 나도 모르게 그를 유심히 보았다.


끝 음절마다 ‘ㅆ’ 발음이 살아 있는 부산 억양에,

나는 자연스레 웃음이 번졌다.

그는 청바지 주머니에서 빨간색 말보로를 꺼냈다.

지퍼 라이터 불이 붙는 순간, 그의 손놀림이 먼저 빛났다.


말은 적었지만, 미소는 오래 남았다.

안경 너머로 빛나는 눈빛은 선했다.


나는 그에 대한 감정이 무엇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멋있었고, 눈이 마주칠 때마다 설레었고,

맥박이 뛰는 소리가 들릴 지경이었다.


그리고 조금씩 그와 친해지며,

이렇게 멋진 사람을 내 친구에게도 소개해주고 싶었다.

전시회가 끝나고, 새 학기가 시작됐다.


우연히 복도에서 마주친 그.

잠시 망설이고 물었다.

“제 절친이 있는데, 혹시… 소개팅 하실래요?”

종로서적.

휴대폰이 없던 그 시절, 약속 장소는 정해져 있었다.

빼곡하게 붙은 포스트잇에 메모가 남겨지던 그곳.


나는 주선자로서 그와 내 친구를 만나게 했고,

소개가 끝나 내가 일어서려는 순간,

그와 내 친구가 함께 계속 있자고 했다.


그날 우리는 맥주를 마셨다.

웃음이 번질 때마다, 눈길이 닿고 곧 피했다.

편안함과 함께, 심장은 조용히 속도를 높였다.

학교 공강 시간마다, 전날의 일과 내 생각, 그리고 감정을

무심한 듯 노트에 적어 떼어낸 쪽지를,

동아리방 그의 서랍 속에 살짝 넣어두었다.


누가 볼까 서둘러, 텅 빈 동아리방에 들러

쪽지를 몰래 넣는 것이 두근거리는 아침의 시작이었다.

보드판에 그의 별명 ‘Slayer’ 한 글자면, 그날의 신호로 충분했다.


그는 스치듯 다가와, 접힌 종이를 내 손바닥에 살짝 얹었다.

친구와의 소개팅 자리에서 시작된 만남 속에,

우리만의 작은 비밀이 하나씩 쌓여갔다.


그의 답장을 읽어내려갈수록,

마음 한켠이 조금씩 단단해졌다.

하루가 전보다 더 밝아졌고,

내일이 기다려졌다.

10월 첫 주, 가을빛과 함께 가슴 깊이 내려앉는 운명 같은 날들이 열렸다.

그때의 나는, 그것이 행복만 이어질 시간이라 믿었는데…

그의 서랍 속엔, 더는 닿지 못할 봄이 조용히 다가오고 있었다.



오늘도 제 글에 머물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마음 덕분에, 계속 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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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非)전지적 나만의 시점》 (월·화 / 감정 매거진)

나는 누구인가.

그 질문 앞에서, 나도 모르는 나를 찾아가는 여정이 시작되었습니다.

완전하지 않은 기억과 감정의 조각들을,

형식 없이 꺼내어 적어가는 감정 에세이 매거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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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 유죄》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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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의 이혼, 세 번째 결혼. 상처를 지나 다시 나로 서기까지—

버텨낸 나에게 건네는 늦은 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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