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봄, 멈춰버린 시간 속에 사라진 별.

Ep.1. 왜 아름다움은 빨리 사라지는가…

by luna Han 윤영

하얀 목련이 필 때면

다시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그를 보낸 그 해 봄,

그 꽃잎을 따라

나도 누렇게 함께 떨어뜨렸다.


중고등학교 시절, 나는 ‘무엇이 되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냥 공부를 했다.

그저 주어진 대로, 누군가를 기쁘게 하기 위해.

내가 알고 있는 세상은 너무 좁고, 너무 얕았다.


중학생이 된 나는 공부를 꽤 잘했다.

정확히 말하면—

누구의 돌봄도 없이 이만큼 해냈다는 ‘기특하다’는 말이 좋아서,

그 말 하나에 나를 갈아넣으며 공부했던 것 같다.

항상 반에서 손에 꼽히는 등수를 받았고,

자신감 있는 학교생활이 이어졌다.

연합고사 합격은 목표라기보다는 예정된 일이었다.


고등학생이 되면서 처음으로 세상이 만만치 않다는 걸 알았다.

각 학교에서 잘한다는 아이들이 한 반에 모인 인문계 고등학교.

나는 생애 처음으로 두 자리 수 등수를 받았다.


그 시절 우리는 늘 ‘역대급 경쟁률’ 속에 살았다.

반은 스무 개가 넘고, 한 반에 예순 명,

시험이란 늘 누군가를 떨어뜨리는 일이었다.


교복 자율화 세대였던 우리는

사복 하나에 기죽었고,

‘브랜드’라는 낯선 단어를 그때 처음 배웠다.


그러면서도,

공부는 멈추지 않았다.

오직 ‘엄마를 기쁘게 해주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나는 늘 누군가의 기대에 스스로를 맞추며 살았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 대학에 갈 거라고 믿었다.


진로에 대해 이야기할 어른은 없었다.

그래서 대학생이던 오빠에게 물었다.

“나, 무슨 과를 가야 할까?”


오빠의 대답은 단순했다.

“점수는 애매하고,

취업 잘 되는 전공은 학교가 낮고,

비인기 전공은 학교를 높여서라도 지원해볼 만해.”


나는 학교를 높였고,

비인기 전공인 불문학과를 선택했다.


그렇게 나의 대학 생활은 시작되었다.

첫날부터 나는 어리둥절했다.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도 없었다.

정해진 시간에 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오던 고등학교와는 전혀 달랐다.


시간표만 들고,

낯선 건물들 사이를

헤매고 또 헤맸다.


교실도, 사람도, 모든 것이 새로웠다.

친구도 처음부터 다시 사귀어야 했다.

익숙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날의 나는,

그 모든 순간에

긴장하고 또 긴장했다.


처음엔 모든 게 낯설었지만,

조금씩 익숙해졌다.

친구도 생겼다.


하늘이 파랗던 어느 날,

학생회관으로 향하는 길이 북적였다.

각 동아리의 가입 기간이 시작된 것이다.


각양각색의 부스,

누군가는 전단지를 나눠주고,

누군가는 마이크로 홍보를 외쳤다.


나는 새로 사귄 과 친구들과 함께

사진 동아리에 가입했다.


동아리방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였다.

가입서를 손에 들고,

친구들과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처음 맡아본 인화 약품의 시큼한 공기와

먼지 섞인 햇살 속,

그 방 한 켠,

인기척에도 고개를 들지 않은 한 선배가 있었다.


조용히 앉아,

말없이 카메라 렌즈를 닦고 있었다.


창문 틈 사이로 쏟아진 빛이

그의 손등 위에만 머물러 있었다.


말 한마디 없던 그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나의 대학 생활은

남들처럼 평범하게 시작되는 줄 알았다.


그 이듬해 봄, 그 선배가 사라지기 전까진.


하얀 목련이 필 때면,

나는 여전히 그날에 멈춘다.



오늘도 제 글에 머물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마음 덕분에, 계속 쓸 수 있습니다.


* 요일별 연재 안내 *

《비(非)전지적 나만의 시점》 (월·화 / 감정 매거진)

나는 누구인가.

그 질문 앞에서, 나도 모르는 나를 찾아가는 여정이 시작되었습니다.

완전하지 않은 기억과 감정의 조각들을,

형식 없이 꺼내어 적어가는 감정 에세이 매거진입니다.

https://brunch.co.kr/magazine/findingmemyway

《진실, 유죄》 (수)

사라진 진실에 대해, 이제는 말하려고 합니다.

조용한 증언이자, 늦은 질문들에 대한 연속 기록.

https://brunch.co.kr/brunchbook/truthguilty

《엄마, 이제 내가 엄마할게》 (목·금)

기억을 잃어가는 엄마를 끝까지 기억하려는 딸의 오래된 다짐과 조용한 기록입니다.

https://brunch.co.kr/brunchbook/be-my-moms-mom

《루나의 세비야》 (토·일)

이방인으로 시작한 도시에서 삶, 사랑, 자립을 다시 배우는 어느 여자의 회복기.

https://brunch.co.kr/brunchbook/lunainsevilla

완결된 시리즈

《이혼해도 괜찮아》 (완결).

두 번의 이혼, 세 번째 결혼.

상처를 지나 다시 나로 서기까지—

버텨낸 나에게 건네는 늦은 응원.

https://brunch.co.kr/brunchbook/divorceis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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