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10월 첫 주, 대성리의 가을 공기는 유난히 투명했다.
얇게 깔린 물안개 사이로 햇살이 부서졌고, 카메라 셔터 소리가 계절의 한 페이지를 기록하듯 이어졌다.
그날의 공기와 빛이 오래도록 내 곁에 머물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는 걸,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되었다.
촬영을 마치고 청량리역으로 돌아왔다.
분주한 발걸음과 차들이 내뿜는 경적, 상점 불빛이 뒤섞이고, 가을 저녁 공기에 섞인 군밤 냄새가 거리를 채웠다.
그날의 뒤풀이는 단골 감자탕집이었다.
늘 그렇듯, 각자 그날 촬영 주제에 대해 돌아가며 발표를 마치고 나서야 술자리가 시작되었다.
내 앞엔 친한 동기 규동이가 앉아 있었다.
그날은 문득 내 주량이 궁금해졌다.
“나랑 같이 똑같이 마시자. 먼저 취하는 사람이 덜 취한 사람이 챙겨주기다.”
규동이가 웃으며 잔을 부딪쳤다. 나도 웃으며 잔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여기는 내 방이 아니었다.
낯선 침대 구조, 창문으로 스며드는 생경한 빛.
내 인기척에 친구 J가 침대 밑에서 몸을 일으켰다.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내가 왜 여기 있지?’
방바닥이 천장이 되고, 천장이 바닥이 되는 듯 어지러웠다.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머릿속은 비어 있고, 오직 ‘집에 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엄마였다.
친구가 일어나 괜찮냐고 물었지만,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묻기엔 정신이 아득했다.
그녀의 부모님이 깰까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겼다. 문을 나서며 들이킨 차가운 새벽 공기가 폐 깊숙이 스며들자, 그제야 속이 조금 가라앉았다.
집에 도착하니, 마당을 쓸고 있는 엄마가 눈에 들어왔다. 날카로운 잔소리가 귓등을 스쳤지만, 나는 곧장 방으로 들어가 쓰러졌다.
그날, 잠만큼 좋은 해장이 없다는 걸 처음 알았다.
창문 틈 바람이 식은 속을 더 서늘하게 스쳤다. 부끄러움과 불안이 번갈아 밀려오다, 결국 한 사람만 떠올랐다.
오후가 되어 서서히 정신이 돌아올 무렵, 전화가 울렸다.
“여보세요.”
“윤영아! 괜찮니?”
그 한마디에, 금세 몸이 멀쩡해진 기분이었다.
“아, 네. 괜찮아요. 어쩐 일이세요?”
그가 우리 집으로 전화를 한 건 처음이라 의아했다.
“이따 저녁에 종로에 나올 수 있어?”
“네!”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수화기를 내려놓고도 한동안 손끝이 저렸다. 어젯밤의 공백을 채울 말이 이제 막 도착할 것만 같았다.
낯선 두근거림이 가슴속에 자리 잡은 채, 나는 서둘러 종로로 향했다.
저녁, 종로 연타운 앞에서 마주한 그는 첫마디로 또 물었다.
“괜찮니?”
“몸은 괜찮은데… 기억이 안 나요.”
“오늘 내가 보자고 한 건, 월요일에 학교 가서 어제 일 듣게 되면 그냥 그러려니 하라고. 그 말 하려고 부른 거야.”
“기억이 안 나서 그런데… 제가 취해서 어땠는데요? 큰 실수했어요?”
그는 조용히 웃기만 했다.
“얘기 좀 해주세요.”
“아냐, 별일 없었어.”
“근데, 현성이 오빠가 누구야?”
“어… 오빠가 현성이 오빠를 어떻게 알아요?”
“어제 네가 막 울면서 이름을 계속 부르더라.”
“아… 제가 청량리역 근처 입시학원을 몇 달 다녔는데, 같은 반 삼수생 오빠였어요. 학원 다니다가 작년 이맘때쯤 미국으로 유학을 갔는데….”
그는 미소를 지으며 “그랬구나” 하고는, 느닷없이 내 취향을 묻기 시작했다.
“그런데 너는 무슨 색을 좋아하니?”
그렇게 좋아하는 음식, 계절, 노래… 사소한 질문들이 이어졌다.
그는 나에게 둘도 없는 첫 지지자였다.
편지로 주고받는 우리의 대화는, 미완이던 나를 하루하루 완성시켜 주었다.
나의 좋은 점을 먼저 찾아주고, 내가 자신 없어 하는 일에도 용기를 내도록 응원해 주었다.
그의 향기로운 말소리에, 그가 나를 바라보는 빛나는 눈동자에—
나는 꽤나 괜찮은 여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진짜 아까까지만 해도 ‘이젠 술 못 마시겠다’ 했는데, 또 이렇게 맥주가 들어가네요.”
“하하하.”
그는 웃으며 말했다.
“너 힘들 텐데, 이제 그만 가자. 집에 가서 좀 쉬어.”
가로등 불빛이 인도 위를 물들이고, 수많은 사람들 사이로 우리 둘만 있는 듯, 가을 바람은 옷깃 사이로 스며들어 내 옆에 그와 나란히 걷는 내게 상쾌함을 안겨 주었다.
발걸음마다 스치는 말소리, 유리창에 부서지는 헤드라이트 빛. 종로의 가을밤은 그 활기로 저녁의 빛을 한층 선명하게 물들였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그는 버스 정류장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했다.
나는 그와 있으면 자꾸 웃음이 났다. 신호등 앞에 서 있는데, 그가 불쑥 물었다.
“너는 남자친구가 생기면 어떻게 걷고 싶어?”
“갑자기요?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객관식으로 4지선다 해주세요.”
“1. 손을 잡는다. 2. 어깨를 두른다. 3. 팔짱을 낀다. 4. 허리를 감싼다.”
몇 초간 머릿속에 남자친구와 걷는 모습을 그려봤다.
“…4번이요.”
내 말이 끝나자 그는 잠깐 숨을 고르더니,
아주 자연스럽게 그의 팔이 내 허리를 감싼다.
심장이 귀 옆에서 뛰는 듯했고, 그 온기가 전해지는 순간 이 관계가 달라질 것 같았다.
그의 숨소리가 귀 옆을 스쳤고, 코끝에는 그의 옷깃에서 풍긴 은은한 비누 향이 맴돌았다.
이대로 지구 끝까지라도 걷고 싶었다.
버스 정류장에 다다르자, 나란히 걷던 그의 팔에 힘이 들어가며 내 몸이 그를 향했다. 그리고 천천히, 그는 나에게 키스했다.
짧고 조용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 침묵이, 우리 사이의 선을 아주 조금 옮겼다.
정류장을 오가는 사람들은 창피함보다 그의 배경이 되었다.
우리 집 방향 버스를 발견한 그는 “버스 왔다, 이제 가야겠네”라고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후들거리는 다리와 뜨겁게 달아오른 볼은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다.
버스에 올라 창밖을 바라보니, 그는 환하게 웃으며 “잘 가”라고 손을 흔들었다.
그 순간, 세상의 소음은 멀어지고, 그 웃음만이 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집으로 가는 내내, 한용운의 시 〈님의 침묵〉 한 구절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그의 말과 눈빛은, 시의 문장이 아니라 내 운명의 문장처럼 내게 박혔다.
그날의 심장이 요동치는 소리가 아직도 느껴지는, 날카로운 나의 첫 키스는 온몸에 새겨진 듯하다.
1992년 가을, 매일이 새롭게 행복했고, 그는 나에게 둘도 없는 첫 지지자였다.
그 행복이 그렇게 짧게 끝날 줄 알았다면… 나는 더 많이, 더 깊이 용기를 내어 사랑했을 텐데.
내일을 알 수 없는 나는 내일도 오늘처럼 행복할 것만 같았다.
그 가을이 그와 마지막 가을인지도 모른 채,
나의 20살 가을은 그렇게 마냥 행복했다…
오늘도 제 글에 머물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마음 덕분에, 계속 쓸 수 있습니다.
요일별 연재 안내
《비(非)전지적 나만의 시점》 (월·화 / 감정 매거진)
나는 누구인가.
그 질문 앞에서, 나도 모르는 나를 찾아가는 여정이 시작되었습니다.
완전하지 않은 기억과 감정의 조각들을,
형식 없이 꺼내어 적어가는 감정 에세이 매거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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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 유죄》 (수)
사라진 진실에 대해, 이제는 말하려고 합니다.
조용한 증언이자, 늦은 질문들에 대한 연속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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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이제 내가 엄마할게》 (목·금)
기억을 잃어가는 엄마를
끝까지 기억하려는 딸의 오래된 다짐과 조용한 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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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나의 세비야》 (토·일)
이방인으로 시작한 도시에서 삶, 사랑, 자립을 다시 배우는 어느 여자의 회복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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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된 시리즈
《이혼해도 괜찮아》 (완결)
두 번의 이혼, 세 번째 결혼. 상처를 지나 다시 나로 서기까지—
버텨낸 나에게 건네는 늦은 응원.
https://brunch.co.kr/brunchbook/divorceis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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