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배가게 꼬맹이

by luna Han 윤영

어릴 적 내가 살던 곳은 종암동이었다. 초등학교 입학을 하기도 전에 이사를 갔지만, 그 전까지는 그 골목이 내 세상의 전부였다. 기억 속 골목은 넓고 크기만 했다. 그런데 어른이 되어 다시 찾아갔을 때, 그 길은 생각보다 좁고 금세 지나쳐버릴 만큼 짧았다. 기억이란 그렇다. 어린 시절에 각인된 풍경은 크고 웅장하다.


아빠가 돌아가신 뒤, 시골에 계신 큰아버지가 오셔서 우리 넷을 데려가겠다고 했단다.

“제수씨는 아직 젊고 앞날이 창창한데, 아이들 성을 바꿔서 다른 성으로 살게 할 수 없어요.”

그 말에 엄마는 단호하게 대답하셨다.

“아니에요. 제가 책임지고 키울 겁니다.”

그 한마디로 큰아버지를 돌려보냈다고 한다. 어릴 적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당연하게만 느껴졌던 엄마의 결단이, 지금은 아무나 할 수 없는 나의 엄마만의 위대함이라는 걸 안다.

우리 집은 골목 쪽으로 난 벽을 허물어 작은 구멍을 만들고, 그 안에 담배 부스를 넣었다. 그 옆은 더 넓혀 과일 가게로 바뀌었다. 엄마가 과일을 파는 동안 나는 부스 안에 앉아 담배를 팔았다.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의 꼬맹이가 담배 값을 척척 계산하니, 어른들은 신기해하며 잔돈을 내 손에 쥐여주었다. 얼굴도 부스 밖에선 보이지 않는 작은 내가, 잔돈을 정확하게 거슬러주는 모습이 대견했나 보다. 엄마도 그럴 때면 잠시 웃으셨다.


골목길을 지나는 발소리, 삐걱이는 자전거 소리, 그 사이로 부스 안에서 보이는 세상은 커다란 거인들이 오가는 나라 같았다. 멀리선 찐빵 찌는 김 냄새가 났고, 가끔 지나가는 오토바이의 거친 배기음이 골목 끝을 흔들었다.

엄마는 멍든 과일을 조심스레 깎아 우리 앞에 놓았다. 그 손길은 빠르면서도 한 조각 한 조각이 정성스러웠다. 멍든 과일처럼, 엄마의 마음에도 멍이 깊게 들어갔을 텐데… 도려내고 깎아낸 과일처럼, 상처를 감추고 정말 억척 같이 살아내셨다.


그렇게 억척 같은 우리의 보호막이었던 엄마가, 몸집이 점점 작아지면서 아이가 되어 간다. 벤자민의 거꾸로 가는 시계처럼, 세월이 엄마를 거꾸로 데려가고 있다.

지난 주말,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6년 전 이곳에 와서 나를 떠나보낸 뒤, 아침저녁으로 시차를 계산해가며 전화를 하던 내가, 바쁘다는 핑계로 한동안 전화를 못 드렸다. 깜짝 놀라 카카오톡을 확인하니 벌써 3주나 지나 있었다. 아침 9시, 센터에서 오는 차를 타고 나가 저녁 6시 반에 돌아오신다고 했다. 침대에 누워만 계신 시간이 많아, 내 전화에 잠을 깨면 밤새 잠을 설친다고 하셔서 시간을 잘 맞춰야 한다.


토요일 전화에서 엄마는 이제 센터에 그만 나가겠다고 하셨다.

“뭐가 또 마음에 안 드셨어?”

“밥이 맛이 없어.”

“거기 맛집 가는 게 목적은 아니잖아. 주말마다 올케가 해주는 밥은 맛있잖아. 단체 급식이 다 그렇지. 그러지 말고 다니면서 건강 챙겨야, 나 있는 데도 와보지.”

“응…”


나는 엄마를 설득했다.

“이번 겨울에 여기 와서 몇 달 같이 살자. 엄마랑 딸이 같이 여행 온 거 보면 사람들이 얼마나 부러워하는지 몰라.”

“그게 부러웠어? 근데… 내가 비행기를 탈 수 있을까?”

“그러니까 운동해야지. 그리고 병원 가서 비행기 탈 수 있는지 물어보자. 엄마만 컨디션이 되면 내가 데리러 갔다가 모셔다 드릴게.”

“그래, 그럼 운동해야겠다.”


엄마의 목소리가 조금 밝아졌다. 숨 사이사이에 묻어나는 설렘이 느껴졌다. 전화를 끊고 나서도 그 온기가 오래 남았다.


제발, 엄마와 단 한 번이라도

내가 행복해진 지금을 함께 바라볼 수 있기를.

하늘이 그 소원만은 허락해주기를.




오늘도 제 글에 머물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마음 덕분에, 계속 쓸 수 있습니다.


요일별 연재 안내

《비(非)전지적 나만의 시점》 (월·화 / 감정 매거진)

나는 누구인가.

그 질문 앞에서, 나도 모르는 나를 찾아가는 여정이 시작되었습니다.

완전하지 않은 기억과 감정의 조각들을,

형식 없이 꺼내어 적어가는 감정 에세이 매거진입니다.

https://brunch.co.kr/magazine/findingmemyway


《진실, 유죄》 (수)

사라진 진실에 대해, 이제는 말하려고 합니다.

조용한 증언이자, 늦은 질문들에 대한 연속 기록.

https://brunch.co.kr/brunchbook/truthguilty


《엄마, 이제 내가 엄마할게》 (목·금)

기억을 잃어가는 엄마를

끝까지 기억하려는 딸의 오래된 다짐과 조용한 기록입니다.

https://brunch.co.kr/brunchbook/be-my-moms-mom


《루나의 세비야》 (토·일)

이방인으로 시작한 도시에서 삶, 사랑, 자립을 다시 배우는 어느 여자의 회복기.

https://brunch.co.kr/brunchbook/lunainsevilla


완결된 시리즈

《이혼해도 괜찮아》 (완결)

두 번의 이혼, 세 번째 결혼. 상처를 지나 다시 나로 서기까지—

버텨낸 나에게 건네는 늦은 응원.

https://brunch.co.kr/brunchbook/divorceisok


댓글과 공유는 큰 힘이 됩니다.

#LunaHan윤영의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담배가게꼬맹이 #엄마이제내가엄마할게 #종암동기억 #엄마와딸이야기 #세월의무게 #억척같은엄마 #어린시절추억 #LunaHan윤영



목요일 연재
이전 05화엄마의 빈칸, 삶의 무게가 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