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그 빈칸은 방어막이었다
나에게 아빠는, 그리움이라 부르기보다는 마음속의 빈칸에 가깝다.
그 빈 자리를 온전히 알지 못한 채 살아왔기에,
그때의 슬픔을 몰라도 되었으니, 그것이 내겐 다행이었다.
내게 빈칸은 마음의 방어막이었다.
하지만 엄마에게 그 빈칸은, 살아내야 하는 무게였다.
그리고 나는, 어느 순간부터 겁이 나기 시작했다.
20대와 30대에는 청첩장과 돌잔치 초대장을 주로 받았다.
하지만 40대를 넘기면서, 친구들에게서 받는 건 부고장이 되었다.
한국에 살던 시절, 결혼식이나 돌잔치는
가능한 한 참석하려 했지만,
거리가 멀거나 일이 있는 날엔 어쩔 수 없이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부고장만큼은 달랐다.
어디든 달려갔다.
친구들의 슬픔 속에 내가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이내, 눈물이 참을 수 없이 흘렀다.
그건 슬픔이 아니라, 끔찍한 두려움이었다.
아빠는 무일푼으로 서울에 올라와,
말 그대로 일만 하셨다고 한다.
출장이 잦았다는 아빠.
사람을 좋아하셨다는 아빠.
술을 즐기셨다는 아빠.
그런 아빠의 주변은 언제나 웃음과 이야기로 가득했다고 한다.
흑백 사진 속의 아빠는 훤칠하고 잘생겼다.
집도 장만하고,
조금씩 여유가 생기던 참에
강화도에 땅도 조금 사두셨다고 했다.
70년대 초, 땅을 살 무렵
아빠는 잠시 강남과 잠실도 떠올리셨다한다.
하지만 그때는 뽕나무와 배나무가 자라는 밭일 뿐,
누구도 그 위에 빌딩 숲이 들어설 거라 상상하지 못했다.
아빠는 결국 외할아버지와 상의해
강화도 외가 근처 논을 택했다.
쌀밥이 전부이던 그 시절,
배와 뽕밭이 이겼다면
“강남 어디쯤은 우리 땅이었을 텐데” 하고
엄마는 종종 아쉬워하셨다.
고등학생 시절, 나는 엄마의 서랍 속에서
똑같이 생긴 검은 장부 두 권을 발견했다.
한 권에는 아빠가 지인과 친척들에게 빌려준 돈의 액수와 날자,
다른 한 권에는 아빠의 형제들,
6남 1녀, 친가 친척들의 이름과 생년월일,
가족관계가 한자와 함께 빼곡히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장부의 뒷면에서
나는 아빠가 남기신 짧은 일기를 발견했다.
1974년, 아마도 돌아가시기 직전 무렵의 기록이었다.
아빠는 서울대병원에서 대장암 말기 진단을 받고
1차 수술 후 병원에 입원 중이셨다.
일기 속의 그 문장—
나는 아직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내가 살자고 하면,
집이며 땅이며 다 사라질 것이다.
그래도, 산다는 보장은 없다.
나는 남겨질 가족들을 위해 퇴원을 결심하고, 집으로 돌아간다.”
그날, 나는
그 문장을 다 읽기도 전에
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남편이란 그늘이 사라진 뒤, 엄마는 홀로 네 아이를 키우며 결국 그 집과 땅을 지켜내셨다.
그 길은 끝이 보이지 않는 모래길 같았을 것이다.
햇볕은 뜨겁고, 발밑은 뜨거운 모래뿐인데, 그늘 하나 없이 걸어야 하는 길.
아침 해보다 먼저 일어나
밥과 도시락을 준비하시던 엄마를 보며,
나는 반찬 투정이 사치인 줄 아는 어른아이가 되었다.
남편이란 그늘이 사라진 뒤,
엄마에게 남은 건
지켜내야 할 아이들뿐이었다.
한 여자로서의 고단했던 삶을
어떻게 말로 다 전할 수 있을까.
그 세월을 나는 다 알지 못하지만,
그늘 없는 사막 같은 삶 속에서
엄마는 끝내, 단단하게 서 있었다.
그 단단함이, 지금의 나를 버티게 한다.
만약 그 자리에 내가 있었다면—
나는 그 사막에서 끝까지 살아낼 수 있었을까.
오늘도 제 글에 머물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마음 덕분에, 계속 쓸 수 있습니다.
《비(非)전지적 나만의 시점》 (월·화 / 감정 매거진)
나는 누구인가.
그 질문 앞에서, 나도 모르는 나를 찾아가는 여정이 시작되었습니다.
완전하지 않은 기억과 감정의 조각들을,
형식 없이 꺼내어 적어가는 감정 에세이 매거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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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 유죄》 (수)
사라진 진실에 대해, 이제는 말하려고 합니다.
조용한 증언이자, 늦은 질문들에 대한 연속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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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이제 내가 엄마할게》 (목·금)
기억을 잃어가는 엄마를
끝까지 기억하려는 딸의 오래된 다짐과 조용한 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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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나의 세비야》 (토·일)
이방인으로 시작한 도시에서 삶, 사랑, 자립을 다시 배우는 어느 여자의 회복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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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된 시리즈
《이혼해도 괜찮아》 (완결)
두 번의 이혼, 세 번째 결혼. 상처를 지나 다시 나로 서기까지—
버텨낸 나에게 건네는 늦은 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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