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 슬리퍼를 신고 쫓아가던 꼬맹이
어렸을 때의 기억이 거의 없다.
기억할 만한 일이 없었던 걸까.
아니면,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걸까.
지금도 알 수 없다.
다만, 내가 아주 작은 꼬맹이였던 걸 보면
아마 다섯 살, 여섯 살 즈음이었을까.
아침이면 늘 불안했다.
엄마가 나를 두고 일하러 가버릴까 봐,
눈을 떼지 않으려 애썼던 기억이 난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마루에 앉아 있던 내가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엄마가 마당을 가로질러 대문 밖으로 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본능처럼 일어섰다.
급한 마음에 마당에 놓인 커다란 갈색 슬리퍼를 신었다.
발이 반쯤 빠져버려 걷기도 힘든 그 신발을 끌며
“엄마! 엄마!” 하고 울먹이며 따라 나섰다.
엄마는, 뒤도 돌아보지 못한 채
버스에 올랐다.
나는 길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눈물 사이로 본 엄마의 얼굴엔
나를 보지 않으려 애쓰는 눈빛이 어렴풋이 보였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나를 길을 잃은 아이라고 생각했는지
파출소로 데려갔다.
나는 마음속으로는 집을 찾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모른다고 했다.
아저씨들은 내게 우유를 주고,
‘보름달’이라는 동그란 빵을 건네주었다.
나는 눈물과 땀에 젖은 채
딱딱한 나무 의자에 누워 잠이 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숨이 찬 얼굴로 문을 열고 들어온 엄마가
나를 보자마자 와락 끌어안았다.
“집도 모르면서 왜 엄마 따라왔어…
그날, 난 너를 잃어버린 줄 알고
온 동네를 뛰어다녔어.
파출소에 자고 있는 널 보는데,
얼마나 마음이 아프던지…”
엄마가 우는 모습을,
나는 그날 처음 기억한다.
그 순간,
나 때문에 엄마가 울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엄마 등에 엎혀 집으로 가는 길은
이상하리만치 따뜻하고,
너무나 편안했다.
그날이,
어린 시절 내 기억의 시작이었다.
그 일 이후,
세 살 위인 오빠가 방학을 하면
나와 오빠는 시골 외가댁으로 보내지곤 했다.
우리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언제쯤 집에 돌아갈 수 있을지
마음속으로 날짜를 세어가며,
엄마를 그리워하는 감정을
서로 말없이 미뤄두고 있다는 것을.
외가집의 오래된,
깜깜한 부엌과
별로 말이 없었던 외삼촌,
오빠만 챙기던 외할머니,
해가 지기도 전에 아궁이에 불을 지피던 외숙모.
외가에서 보낸 시간은,
그리움을 참는 연습장이었다.
우리는 엄마를 부르지 않기 위해
서로를 더 자주 바라보았다.
나를 챙겨주는 오빠도
엄마를 보고 싶어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가끔, 마음속으로 달력을 그리며
하루를 넘겼다.
그렇게, 기다림이라는 감정을
아주 일찍 배워버렸다.
훨씬 나이가 든 어느 날,
문득 이 이야기를 꺼냈을 때
엄마는 한참을 말없이 있다가
조용히 그 시절 이야기를 꺼내주었다.
“그날, 난 너를 잃어버린 줄 알았어.
온 동네를 찾아 헤맸지.”
그리고, 파출소에 뛰어들어갔을 때—
똘망똘망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그날의 나를, 엄마는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은 잊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날의 꼬맹이는
엄마의 기억 속에
아주 선명하게 남아 있었던 것이다.
아빠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생계를 위해 어린 나를 떼어놓아야 했던
아픈 손가락 하나의 시작이었다.
오늘도 제 글에 머물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마음 덕분에, 계속 쓸 수 있습니다.
《비(非)전지적 나만의 시점》 (월·화 / 감정 매거진)
나는 누구인가.
그 질문 앞에서, 나도 모르는 나를 찾아가는 여정이 시작되었습니다.
완전하지 않은 기억과 감정의 조각들을,
형식 없이 꺼내어 적어가는 감정 에세이 매거진입니다.
https://brunch.co.kr/magazine/findingmemyway
《진실, 유죄》 (수)
사라진 진실에 대해, 이제는 말하려고 합니다.
조용한 증언이자, 늦은 질문들에 대한 연속 기록.
https://brunch.co.kr/brunchbook/truthguilty
《엄마, 이제 내가 엄마할게》 (목·금)
기억을 잃어가는 엄마를
끝까지 기억하려는 딸의 오래된 다짐과 조용한 기록입니다.
https://brunch.co.kr/brunchbook/be-my-moms-mom
《루나의 세비야》 (토·일)
이방인으로 시작한 도시에서 삶, 사랑, 자립을 다시 배우는 어느 여자의 회복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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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된 시리즈
《이혼해도 괜찮아》 (완결)
두 번의 이혼, 세 번째 결혼. 상처를 지나 다시 나로 서기까지—
버텨낸 나에게 건네는 늦은 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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