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부끄러워했던 쪽문, 엄마로 향하는 가장 짧은 길

by luna Han 윤영

어제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엄마는,

내가 며칠 동안 전화를 하지 않은 건 또렷이 기억하신다.


“내가 좀 배웠으면 다르게 살았을 텐데… 외할아버지가 학교를 안 보내가지고.

그래도 엄마는 할아버지한테 두루마기며, 양장으로 양복도 해드리고…

‘이거 입고 어디 가지’ 하시더니, 끝내 그 양복은 못 입으셨지.

엄마는 할아버지랑 할머니한테 그래도 잘했어.”


그 말 속엔, 오래 묵혀둔 그리움과 서운함이 묻어 있었다.

아마도 우리에게 쌓인 서운함을 녹이려, 당신의 효도 이야기를 꺼내신 듯했다.

엄마에게 효도란 소박한 것이었다.

자주 전화하고, 자주 얼굴 보여드리는 일.

그 단순한 바람조차, 이젠 일정을 비워내고 또 끌어모아야 겨우 한 번 이룰 수 있다.

낯선 곳에서 살아낸다는 핑계가, 어느새 ‘바쁘서‘ 라는 말이 먼저 나온다.


아빠를 떠나보낸 뒤, 그 고된 날들은 모조리 엄마의 몫이 되었다.

새벽마다 과일 상자를 들여놓던 엄마의 손끝은 늘 차가웠다.

우리 곁에 머물 수 있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붙잡았던 과일가게는,

재고를 오래 둘 수 없어 금세 적자로 기울었다.

그 일은 오래가지 못했고, 엄마는 다시 다른 일을 찾으셨다.


우리가 살던 동네엔 한 골목, 높은 담과 넓은 마당을 가진 집들이 줄지어 있었다.

그중 한 집이 엄마의 새 일터가 되었다.

그 시절 사람들은 지금의 ‘가사도우미’를 습관처럼 ‘파출부’라 불렀다.

엄마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식사·청소·빨래를 도맡으셨다.

엄마는 그 부잣집에서 일하면서 어떤 마음이셨을까?

우리 넷을 키우기 위해 슬픔도 삼키고, 아빠의 그늘이 그리웠을까?

그래서일까. 더 배우지 못한 탓이라는 ‘한’이, 엄마 마음속에서 끝내 사라지지 않았던 걸까.


나는 학교가 끝나면 곧장 그 집으로 가 쪽문(부엌 옆)을 통해 들어갔다.

햇볕이 희미하게 스며든 부엌,

작은 식탁에 놓인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

엄마가 내어준 그 한 끼를 먹고, 그 집 식구들에게 인사를 했다.

밥을 다 먹으면, 다시 그 쪽문으로 나와 우리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의 쪽문은 내 하루의 지름길이자, 엄마에게로 닿는 숨은 길이었다.


6학년이 되던 해, 나는 처음으로 이전과 다른 나를 마주했다.

바쁜 엄마 대신, 담임 선생님이 내게 ‘자신감’이라는 감정을 심어주셨다.

60명이 넘는 아이들을 편견 없이 대하며,

매일 번호 순서대로 점심을 함께하셨고, 내 차례였을 때

“엄마가 고생이 많으시겠다” 하시며 학급 임원으로 세워주셨다.

늘 숙인 채였던 고개가 조금씩 들렸다.


하지만 그 무렵, 친구들의 시선이 나를 멈춰 세웠다.

“너네 엄마, S네 집에서 파출부로 일하셨다며?”

그 한마디에 교실이 잠시 멈췄다.

‘파출부’라는 말은 그때도, 지금도 귀에 닿는 결이 거칠었다.

친구들의 시선이 흔들리는 사이, 입안이 바짝 말랐지만 애써 태연한 척 말했다.

“아빠가 일찍 돌아가셔서 엄마가 일하신 건데, 그게 뭐 어때서?”

말을 꺼내고 나니, 마치 내가 숨겨두었던 것을 스스로 꺼내놓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괜찮은 척 한 덕분에 지금도 인생사를 나누는 가장 값진 친구들이 되었다.


시간이 흘러, 작년 엄마와 나눈 대화 속에 그 집 이야기가 다시 떠올랐다.

“엄마, 예전에 일했던 집 기억나지? 그 집 둘째 딸이 내 친구야. 얼마 전 그 친구 아버지가 돌아가셨어.”

“아이고 그래? 그 집 아저씨 점잖고 친절했는데… 네가 그 집 딸이랑은 아직도 연락이 되나 보네.”

“응, 친한 친구였잖아. 지금은 미국에서 살아.”


우리는 그렇게 오래전 기억을 다시 꺼내 놓았다.

“아이고, 내가 못 배워서 할 수 있는 게 그런 일밖에는 없었어.”

“그래도 우리를 이렇게 건강하게, 잘 살게 키워주셨잖아.”


엄마의 고생스러웠던 날들은, 시간이 지나 하나의 추억이자 애틋하게 품게 되는 기억이 되었다.

그 쪽문을 드나들던 엄마와 나, 이제는 웃으며 꺼낼 수 있는 이야기만 남았다.

다만, 그때 잠시라도 부끄러워했던 나를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 깊은 곳에서 오래된 멍 자국이 은근히 아려온다.




오늘도 제 글에 머물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마음 덕분에, 계속 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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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非)전지적 나만의 시점》 (월·화 / 감정 매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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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 유죄》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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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이제 내가 엄마할게》 (목·금)

기억을 잃어가는 엄마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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