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이제, 생일을 기다리는 사람
오전, 출근 준비를 하는데 반가운 전화가 걸려왔다.
그런 사람이 있다. 언제나 반가운 사람. 만나면 기분 좋아지는 사람.
이 부부는 나의 ‘고민 담당자들’이다.
나는 그 동생보다 세비야를 사랑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어쩌면 세비야 사람보다 더 세비야를 사랑하는,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비밀이야!” 같은 말 없이도 믿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
가까운 이웃사촌이 가족보다
때로는 편할 때가 있다.
함께 문화의 차이에 대해 이야기하고,
내가 이곳에서 무엇 때문에 힘든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바로 옆에서 현실로 마주하며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들은 늘 나에게
쓴소리도 서슴지 않는다.
그 덕분에 나는 멈추지 않고,
계속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이들을 세비야에서 만나
더 고달플 수 있었던 세비야살이가
훨씬 가벼워졌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나에게 진짜 동생이 있다면,
이렇게 누나 동생, 언니 동생 사이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이런 인연은 참 소중하다.
그리고 나를 ‘행복한 사람’으로 느끼게 해준다.
“누나, 어디세요?”
“나? 출근 준비 중인데?”
“00이 모로코 출장 가는 길이라 데려다주고 오는 길이에요.
누나 내일 생일이라, 식당에 계시면 잠깐 들르려고요.”
“아, 내일 내 생일이야?”
나도 잊고 있던 생일을 이렇게 챙겨주다니.
⸻
사랑이라 믿었던 관계가
상처가 되어 끝났을 때,
나는 다시는 누군가에게 마음을 내어주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사랑해”라는 말을 건넸을 때,
돌아온 건 외면이었다.
두 번의 이혼은 내 삶에
지울 수 없는 균열을 남겼다.
사랑이란 말 속에서도,
기념일이란 특별함은
오래도록 나에게서 멀어져 있었다.
⸻
내 생일.
나는 ‘365일을 생일처럼 살자’는 말로
스스로를 다독이며 살아왔다.
괜히 외롭다고 느끼기 싫은,
나만의 위로였다.
특별한 날에 대한 기억이 없어서다.
엄마는, 일찍 세상을 떠난 아빠 몫까지 해내시느라
언제나 바쁘셨다.
내 생일을 엄마가 챙겨준 기억은, 솔직히 없다.
친구들을 초대해 생일을 보낸 적도 없다.
기억조차 희미하다.
왠지 모르게, 특별한 날일수록 더 외로웠던 것 같다.
성탄절이면 겨울 저녁,
고요한 거실에 혼자 앉아
TV 속 크리스마스를 바라보며
엄마의 인기척을 기다렸다.
연애도, 결혼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심지어 결혼기념일조차 그렇다.
그래서 나는, 그런 특별한 날을
일부러 기억하지 않기로 했다.
그런데,
그런 시간들을 지나
이 먼 곳 세비야에서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축하를 받게 되다니—
오늘, 생일은 참 좋은 날이다.
⸻
나는 오늘이 며칠인지, 한참 생각해야 알 정도다.
월요일 하루 숨 고르고 나면,
화요일부터는 식당의 리듬에 맞춰 움직인다.
주말이 가까워질수록 쉴 틈은 줄고,
일요일 밤이 되어서야
비로소 숨을 내쉰다.
그러니, 오늘이 며칠인지 생각해야 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누나 시간 되시면 잠깐 보려고요. 필요한 거 있으세요?”
“필요한 건 없어. 근데, 너무 고마워!”
그런데 세비야에서,
그 마음을 조심스럽게 다시 꺼내게 한 사람들이 생겼다.
기념일을 함께 기억해주고,
다정한 눈빛 하나로 마음을 건네는 사람들.
가까운 이웃사촌이 가족보다
때로는 편할 때가 있다.
나는 그들 덕분에
사람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
나에게 필요한 건 이런 마음이다.
따뜻하게, 조용히 전해지는 이 마음.
그보다 더 좋은 선물은 없는 것 같다.
누군가의 진심이, 오늘을 특별하게 만든다.
오늘, 나는 그 진심 덕분에
기꺼이 나이를 먹었다.
그리고 이제는,
내 곁을 지키는 사람과도
기념일을 나눌 수 있게 되었다.
남편도 아침부터 묻는다.
“생일 선물 뭐 갖고 싶어?”
하하하, 나도 당황했다.
“고민 좀 해볼게!”
그러고 보니,
나도 이제 내 생일을 기다리는 사람이 되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회차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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