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보 자취생의 '잘 먹기'에 대한 고찰
나는 먹는 게 좋다.
이것보다 더 명쾌한 문장이 있을 수는 없다. 나는 먹는 걸 정말 좋아한다. 세상에는 왜 이렇게 맛있는 음식도 많고 못 먹어본 음식도 많은 걸까? 하루 한 끼를 먹더라도 제대로 된 음식을 맛있게 먹어야 한다. 조금 멀더라도 여행지의 맛집은 꼭 들른다. 제일 싫은 것 중 하나는 대충 끼니 때우기, 먹고 싶은 음식은 며칠이 지나든 꼭 먹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에 배가 고프면 나도 모르게 예민해진다. 점심을 먹으면서 저녁 메뉴를 고민하는 전형적인 대식가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맛있는 걸 먹을 때 가장 행복하지만 내가 먹고 싶은 걸 고집한다든지 메뉴에 딱히 까탈스럽지는 않다. 싫어하는 음식이 거의 없기도 하고 내가 먹고 싶은 건 나중에 혼자 가서 먹으면 그만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특히 집밥에 있어서는 한 번도 반찬 투정 비슷한 것조차 해 본 적이 없다. 엄마는 '아침은 꼭 먹자' 주의라 아무리 바쁘더라도 (게다가 내가 아침을 거의 챙겨 먹지 않음에도) 늘 아침을 만들어놓고 출근하는데, 2주 넘게 같은 메뉴가 반복되면 다른 게 먹고 싶다고 얘기하긴 하지만 그것도 이내 유야무야 지나가곤 한다. 바쁜 아침에 딸, 아들 건강 챙기겠다고 꼭 뭔가를 만들어주는 것도 품이 드는 일인걸 알기 때문이다.
엄마의 정성에는 미안하지만 타이페이에 와서는 지척에 널린 게 조찬집임에도 불구하고 아침을 먹은 적이 거의 없다. 원체 아침잠이 많아 이때 일어나지 않으면 무조건 늦는 지각 최대점에 이르러야 일어나기 때문이기도 하고 몸이 완전히 깨는데 두 시간 정도는 걸려서 아직 입이 까끌한 탓이기도 하다. 먹는 걸 그렇게 사랑하는 나답게 대만의 조찬 메뉴 역시 맛있는 게 가득하다고 생각은 하지만 늘 아침을 사러 나가는 것보다는 침대에 5분이라도 더 누워있는 쪽이 행복한 걸 어쩔 수 없다. 이른바 프로 귀차니스트.
대만은 자타공인 미식의 나라다. 한국인의 입맛에 크게 벗어나지 않는 음식들이 많고 대체로 음식들이 달고 짜고 기름져서 자극적인 맛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완벽한 선택지들을 제공한다. 친일 성향이 강해 일본 음식점도 쉽게 찾을 수 있으며 (비싸긴 하지만) 한식당도 많은 편이다. 정말 신선한 샐러드나 맛있는 치즈처럼 유럽 친구들이 그리워하는 음식들은 찾기 힘들지만 한국인 입장에서는 크게 아쉬울 것 없는 식문화다. 유럽인의 관점에서 개인적인 불평을 좀 보태자면 빵들까지 너무 달아서 한국에서 먹던 건강한 빵들이 그립긴 하지만.
생애 첫 자취에 해외 생활이라는 특수 변수가 더해지면서 자취 생활, 특히 먹는 데 있어 많은 것을 느낀다. 밥솥 없이 밥을 하는 건 정말 귀찮은 일이라든지 술을 잔뜩 마시고 아침에 일어났는데 물이 없어서 절망했다든지. 이런 소소하지만 서울 집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불편들을 몸소 체험하고 있다. 가족들과 함께 살 때는 뭘 먹어도 그게 그거겠거니 했는데 - 유기농 채소나 그냥 채소나 엄마가 전문가니까 알아서 잘 샀겠지? - 혼자 살기 시작하면서 슈퍼에 가면 가격과 품질 사이의 딜레마에 빠지곤 한다. 유학생 생활비야 정해져 있으니 너무 비싼 걸 고를 수는 없더라도 몸에 좋은 걸 먹고 싶은데 막상 처음 보는 맥주와 과일 앞에서는 늘 맥주를 고르게 된다. 밥만 잘 챙겨 먹어도 웬만한 잔병치레는 피할 수 있을 텐데 대만에 와서 유난히 유리몸이 된 건 먹는 이유가 분명 있지 않을까.
대만에 와서 사귄 친구들 중에는 유럽인들이 많은데 수업이 끝나 함께 밥을 먹을 때면 애들이 입에 달고 사는 말이 있다. 뭘 먹고 싶냐고 물어봐도 'Something healthy', 주문해 놓은 메뉴를 보고도 'Eat healthy' 하는 식이다. 어쩌다 각국의 음식 얘기가 나오면 네덜란드나 독일에서 온 친구들은 항상 대표 음식이 마땅치 않다고 대답한다. 본인들피셜 아마도 소시지? 대신 건강하게 먹는 걸 중요시한다고. 그러면서도 감자튀김만 보면 세상 다 가진 것처럼 행복해하는 게 아이러니하긴 하지만 여튼 평소에 보면 신선한 채소나 육류를 포함한 균형 잡힌 식단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그때그때 끌리는 것이나 내가 좋아하는 걸 먹는 게 중요하지, 뭘 먹어야 건강할지는 딱히 생각해 본 적 없었는데 말이지. 한 번은 새벽 한 시쯤 다 같이 영화를 보다가 배고프다고 만들어 온 야식이 삶은 닭가슴살을 먹기 좋은 사이즈로 찢어 브로콜리, 파프리카, 당근 등과 함께 살짝 드레싱해 온 요리였으니 야식은 곧 치느님이요 비빔면, 피자였던 내게는 문화충격이 따로 없었다.
친구들에게 놀란 또 다른 점은 남녀불문 기초적인 요리는 다 할 줄 안다는 것이다. 내 친구들이 특별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요리는 물론이고 베이킹까지 한다. 얼마 전 있었던 추수감사절 저녁을 비롯해 종종 포트럭 파티를 하곤 하는데 그때마다 친구들이 가져오는 음식들이나 요리하는 모습을 보면 가끔 말이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달고 짠 자극적인 맛은 없지만 건강하고 정갈한 음식들이 대부분이다. 워낙 매운맛을 좋아하는 내 취향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내가 해가는 닭갈비나 제육볶음 같은 한식들이 제일 자극적인 느낌이다. 외식과 포장이 일상인 대만에서 무려 '대만인' 친구가 본인 저녁은 항상 스스로 해 먹는다고 해 나를 놀라게 했는데 며칠 전 추수감사절에는 브라우니를 만들어 한 번 더 놀라게 한 일도 있었다.
룸메이트들도 마찬가지다. 다안구의 집으로 이사한 가장 큰 이유는 주방이 있는 집에서 살고 싶기 때문이었는데 우리 집 주방은 비는 날이 거의 없다. 매일 누군가 요리를 하고 냉장고에도 항상 신선한 재료들이 가득하다. 주방 집기들도 거의 완벽하게 구비되어 있다. 대만에서 외국인들이 셰어하우스에 많이 사는 이유 중 하나는 일반 원룸 격인 타오팡(套房)에는 주방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도 있지 않을까.
자취를 시작하면서부터 '잘 먹는 것'이 생각보다 중요하고 어렵다는 것을 깨닫는다. 하면 좋지만 막상 또 한없이 귀찮은 게 요리다. 더군다나 한창 더울 때는 체감온도 40도를 넘나드는 와중에 불 앞에 서서 무언가를 요리하는 게 고문에 가까웠다. 만들고 치우고 정리하는 데는 한 시간이 걸리는데 먹는 데는 10분이면 되는 것도 억울(?)했다. 대만은 외식 문화가 굉장히 발달한 나라라 사 먹는 게 재료를 사 와서 요리하는 것보다 싸기도 해서 생활비가 정해져 있는 유학생 입장에서는 외면하기 힘든 유혹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저런 핑계를 차치하고 최근엔 꽤 요리하려고 하는 편이고 한국에 돌아가서도 종종 할까 한다. 요리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여유이자 즐거움이기도 하고 이제는 '잘 먹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깨달았으니까. 괜히 의식주라고 하는 게 아니다. 대만 생활 동안 '삶의 질'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게 됐는데 먹는 즐거움에는 단순히 미식적으로 좋은 걸 넘어 나 자신을 위해 건강한 음식을 만드는 즐거움도 포함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서로를 위해 건강하고 맛있는 음식을 만들고 다른 친구들과 나누는 행복을 경험하며 많은 것을 느꼈다. 이래서 경험한 만큼 보인다고들 하나 보다.
잘 먹는 것을 넘어 행복하게 먹는 것. 이제는 그런 것들이 더 중요해졌다. 맛집 다니는 걸 좋아하는 나로서는 좋아하는 사람들을 데려가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는 게 또 하나의 행복이었는데 대만에 와서 새로운 즐거움이 생겼다. 바로 내가 한 요리를 친구들이 맛있게 먹어주는 것, '루나, 잘 먹었어' 하는 이야기를 듣는 것이다. 돌아가서는 한국에 있는 내 소중한 사람들과도 그 즐거움을 나누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