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8월 10일, 서울
비가 온다. 오늘 밤은 좀 쏟아질 모양이다.
언제인지도 모를 예전부터 나는 비 오는 날을 좋아했다. 장대처럼 쏟아지는 비 때문에 운동화가 찰박거려도, 문을 나서자마자 옷 위로 무언가 습하게 내려앉아도 나는 비 오는 날을 좋아했다. 해마다 장마를 기다리고 왜 비가 안 오지, 하고 기다릴 정도는 아니어도 비가 오는 날이 좋았다.
정확히는 빗소리를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고 비가 오는 날 왠지 모르게 살짝 차분해지는 감정이 좋은 것 같기도 하다. 누군가 왜 비가 오는 날이 좋냐고 물어본다면 아직도 딱 이렇다 할 대답을 주지는 못하겠다. 글쎄, 비가 오면 글을 쓸 수 있는 '스위치'가 잘 켜지곤 하니까? 지금보다 좀 더 어렸을 때는 비가 오면 작게 음악을 틀어두고 글을 썼다. 짧은 조각글일 때도 있었고 일기일 때도 있었다. 그때는 라디오를 좋아해서 항상 심야 라디오를 켜뒀었던 기억이 난다. 좋아하는 디제이가 다정한 목소리로 엔딩 멘트를 할 때면 어느새 비가 잦아들어 있었다.
수험생 때는 비가 미친 듯이 쏟아지는 사거리 한복판에 서있었던 적도 있다. 집에 오는 길, 얇은 일회용 우산 너머로 굴러 떨어지는 물방울들을 보며 한참을 신호등 앞에 서있었다. 그럴 때면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된다. 빗소리가 이렇게 소란스러운데, 세상은 놀랄 만큼 조용해져서 꼭 혼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한달까. 매일매일이 똑같이 스트레스의 연속인 고3 수험생에게는 그만한 도피가 없었다. 아무 생각도 할 필요가 없고, 굳이 비를 피할 이유도 없었다. 싸구려 비닐우산을 들고 10분쯤 비 내리는 거리에 서있다 보면 빗소리에 스트레스도 씻겨 내리는 것 같았다.
타이페이에 살 때 비는 그야말로 애증의 존재였다. 지금 타이페이를 생각해보면 햇빛이 뜨겁다 못해 잔인하게 내리꽂는 화창한 여름날이 떠오르지만 처음 내가 도착했을 때와 떠날 때를 생각해보면 습하고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안 그래도 감정이 요동치는 시기에 매일 주룩주룩 내리던 비가 한 뼘씩 우울감을 보태는 것 같았다. 그래도 타이페이에 살았던 시간의 절반 정도는 비가 왔을 건데 그때는 상황이 상황인지라 더 감정이 증폭됐었나 싶다. 대만의 겨울은 우울할 만큼 비가 자주 내리고, 그래서 그런지 습한 특유의 냄새가 있다. 한국으로 돌아오던 날 공항에 가려고 집을 딱 나섰는데 훅 끼쳐오는 그리운 겨울 냄새에 문득 눈물 날 만큼 서러웠던 기억이 난다. 처음 이 냄새가 나는 대만에 도착했을 때는 아무것도 몰랐는데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러서 돌아갈 때가 됐구나, 하는 생각에 그랬었나 보다. 어쨌든 타이페이는 내게 제2의 고향 같은 도시라서.
이번 여름은 유난히 장마가 긴 느낌이다. 개인적으로 그야말로 너무나 많은 일이 벌어졌던 여름날들이 흘러 벌써 8월도 중순에 가까워졌다. 출퇴근에 치여 좋아하는 책 한 줄 읽기도 어려운 요즘은 그나마 집에 오는 길에 찰박거리는 거리를 걷거나 시원하게 쏟아져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일기를 쓰는 게 낙이 됐다. 비가 내리면 수험생 때 그랬던 것처럼 지금 끌어안고 있는 고민들도 다 씻겨 내려갈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시간이 흐르면 무뎌질 거라 믿는 것처럼 나는 어리석게도 내 고민을 비에 흘려보내고 싶은가 보다. 아니면 답답한 마음이라도 좀 덜해질까 바라는 것 같기도 하다.
글을 쓰는 동안 어느덧 비가 조금씩 잦아들었다. 한바탕 쏟아붓고 나니 잔잔하게 내릴 모양이다. 나도 한껏 부풀었던 감정을 달래고 잠드려나 싶다. 밤공기가 선선하니 좋다.